택시블랙박스-택시기사가 손님에게 사기를 당하다
- 제작년도
- 2009
사진: “ Safety Last!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때로는 영화보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 그 장면의 스틸 사진이 더 유명한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순진무구한 젊은 청년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시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마 (스필버그가 제작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 빽 투 더 퓨쳐 >(1985)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방금 떠 올린 그 영화, 마이클 J. 폭스가 매달려 있는 그 장면은 오마주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도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3D 영화 < 휴고 >(2011)를 연출하면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성룡도 < 프로젝트 A >(1984)에서 시계에 매달렸다. 더 많은 예를 열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데미의 영화 이론서 표지에도 등장한다. 나도 스틸 사진을 먼저 보았다. 영화사에서 빌딩 시계에 처음 매달린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이다. 위대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름. ‘방랑자’ 채플린, ‘스톤 페이스(Stone face)’ 버스터 키튼과 함께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이끈 세 명 중의 한 명. 둥근 프레임의 뿔테 안경을 쓰고 (이 스타일의 안경은 이제 로이드 안경테라고도 불린다) 둥글고 납작한 보터 모자를 쓴 해롤드 로이드는 가난한 ‘모던 보이’. 그 소년이 시계에 매달린 영화는 Safety Last (1923)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금방 이해되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Safety Last”는 공사장에 붙어있는 “Safety First(안전 우선)”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 마무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수정하겠다. 역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채플린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들지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신의 도움을 받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빠져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벗어난다. 해롤드 로이드는 반대이다. 버스터 키튼이 스피드의 대가라면 해롤드 로이드는 위험한 상황에 온갖 장애물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실수를 연발하면서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그 실수의 시간을 최대로 연장한 영화가 <안전 마무리>이다. <안전 마무리> 중 / 사진: “ Safety Last! ”, IMDb 이번에는 LA가 무대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지참금을 구해야 하는 (영화 속의 이름도 마찬가지인) 해롤드는 백화점에 취직한다. 그런데 함께 지내는 빌에게는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같은 재능이 있다. 백화점 지배인은 손님을 건물에 끌어모으기 위해 1,000달러를 내걸고 빌은 12층 빌딩에 1층부터 등반하겠다고 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해롤드가 1층을 올라가게 된다. 일이 생긴 빌은 다음 층에 옷을 갈아입고 자기가 오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층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 바꿔치기는 그다음 층으로 미뤄지고 그러면서 가여운 해롤드는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게다가 그 자리에 여자친구도 도착한다. 층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이제 내려갈 수도 없는 해롤드는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클라이맥스는 빌딩에 달린 시계에 매달릴 때 벌어진다. <안전 마무리>는 해롤드가 12층 빌딩을 19분 50초 동안 등반하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는 영화이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이 등반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좀 이상한 비교이기는 하지만 이 씬은 < 전함 포템킨 >(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의 거의 두 배이다. 물론 마지막은 여자친구와 키스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이다. 사진: “Safety Last!( 1 , 2 )”, IMDb 해롤드 로이드가 이 장면의 영감을 받은 것은 192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다음 영화 회의를 위해서 영화사로 향하던 길에 LA 7번가 브록맨 빌딩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자기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건물을 타고 매달려 한 층씩 등산하듯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옥상까지 올라갔고, 마치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옥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환호에 응답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회의 시간을 놓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깐 본다고 생각했는데 등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롤드 로이드는 보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이 등반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일 이 건물 등반을 영화로 찍으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촬영이 초보 단계였던 1923년에 이 장면은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안전 마무리>가 첫 상영을 마쳤을 때 극장 안은 비명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해롤드 로이드가 ‘진짜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걸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특수촬영은 이미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퀀스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처음 1층에서 올라가는 장면은 해롤드 로이드가 건물을 타고 오른다. 그런 다음 3층 높이의 세트를 지었다. 이 장면이 세트 촬영이고 거리의 풍경을 이중노출로 합성했다는 것은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를 보지 말고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 장면을 그 위치에 찍었다면 정말 위험한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보다 촬영감독이었을 것이다. 시계에 매달린 장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세트를 건물 옥상에 지었다. 그래서 옥상에 세워진 세트에 달아놓은 시계에 해롤드 로이드가 매달렸다. 건물을 타고 오른 후, 시계에 매달리는 해롤드 로이드 / 사진: “Safety Last!( 1 , 2 , 3 , 4 )”, IMDb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에 관한 콘티이다. 게다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해롤드 로이드에게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튼 매달리고 올라가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1919년 촬영 도중 소품 사고로 해롤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은 세 손가락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 마무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촬영과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다시 볼 때마다 이 시퀀스가 위치와 각도, 편집 타이밍, 구도, 동작, 진행 사이로 끼어드는 장애물들의 리듬, 이 모든 것이 마치 정교한 마법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손가락 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매달려 있는 장면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해비 페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해비 페리는 1919년부터 해롤드 로이드의 위험한 장면 대역을 연기했다. 더 정확하게는 위험한 장면에서 해비 페리는 해롤드 로이드의 상대 쇼트(reverse shot)를 연기했으며.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혹은 위험한 순간에 멀리서 해롤드 로이드 대신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해롤드 로이드의 모험을 믿었다. 해비 페리는 자신이 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롤드 로이드가 세상을 떠나는 1971년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으로 경력이 60년에 달하는 해비 페리는 험프리 보가트, 피터 로레의 할리우드 영화들, 심지어 키가 1미터 52센티였기 때문에 매리 픽포드의 대역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리 픽포드가 달리는 말에 능숙하게 올라탈 수 있는지 비밀이 풀렸을 것이다. 물론 비밀이 풀릴 때도 있지만 할리우드는 스턴트맨들의 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해비 페리 (사진: “ Harvey Parry ”, IMDb / © 1980 Steve Banks_ mptvimages )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1959년부터 이어져 온 동두천의 터줏대감 1959년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서 문을 연 동광극장 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상업용 개봉영화 단관 영화관(스크린을 하나만 갖춘 극장)이다. 전국에 단관 영화관들이 몇몇 있지만 예술영화 전용관, 실버극장 등으로 운영이 되고 있고 개봉영화 상영관으로 단관인 곳은 동광극장이 유일한데, 단독 건물이기까지 하다. 건물 자체가 영화관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1986년에 수리를 위해 천장을 뜯을 때 상량에 “1959”라고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4년 기준으로 2,500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했다. 현재 극장 대표인 고재서 씨가 1986년 인수하여 관리 및 운영 중이다. 동광극장이 오랫동안 지역에서 자리하게 되면서 극장 근처 다리 이름도 ‘동광교’라고 불리게 되었고, ‘동광’이라는 이름이 붙은 슈퍼마켓이나 카페 등이 영화관이 운영되는 긴 역사 내내 인근에 있곤 했다. 2024년 현재도 동광극장 백 미터 거리 안에 동광슈퍼, 동광호프, 카페동광, 동광여인숙 등이 있다. 2011년 도로명 주소가 생길 때(2011년 도로명 주소 고시, 2014년 전면 시행) 영화관이 있는 지역은 ‘동광로’가 되었다. 동광극장 인근에는 동광극장처럼 지역에서 오래된 ‘문화극장(2관 운영)’이 있으며 ‘양키시장(구 애신시장),’ ‘제일시장,’ ‘중앙시장’이 있다. 블로그,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 시대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 지역으로 일명 ‘레트로 여행’을 체험하러 오는 젊은 층들이 시장과 영화관들을 둘러보곤 하는데, 그들에게 동광극장은 필수코스 중 하나이다. 지역 주민들의 추천에 의해 2023년 ‘경기도형 노포(오래된 가게)’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이후로는 개인뿐 아니라 지자체나 단체 등에서 공정여행이나 지역 역사 등을 주제로 여행 프로그램을 짜면서 지역의 명소로서 동광극장을 찾기도 한다. 경기 노포 같은 경우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경기도만의 정서와 이야기를 발굴해서 생활 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발굴한다’라는 목적으로 2023년 처음 실시한 것으로, ‘가게 운영 기간 20년 이상에 지역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야 하며 보존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선정 조건에 부합해야 하는데, 영화관으로서는 동광극장이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건물 외벽 “경기노포” 표지 1950년대부터 동두천시에 영화관이 여러 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군 기지 도시였던 것이 주요했다. 동두천시는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이라는 작은 시골 면 소재지였으나 한국전쟁 중 미군이 주둔한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동두천읍, 동두천시로 점차 승격되었다. 1951년에는 미국 육군 제24사단의 휴양소가 설치되었고, 1952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미군 제7사단이 장기 주둔했다. 제7사단이 1970년 이후 본국으로 철수한 뒤에는 전방에 있던 미군 제2사단이 동두천으로 이전하고 총 6개의 미군 부대가 주둔해 왔다. 즉, 동두천시는 미군과 미군기지로 인해 인구가 늘고 지역 상권이 발전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동두천은 “리틀 시카고(Little Chicago)”라고 불리며 ‘동두천에 가면 한국 돈보다 달러가 더 많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호황을 누렸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동두천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6%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생업에 종사한 것으로 집계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미군 부대가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이 80% 감소하였고, 이에 동두천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지역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군들이 떠나면서 도심 상가들의 휴·폐업이 이어졌다. 미군에 의존해오던 동두천시 지역 경제가 쇠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추억의 유물과 현재의 시스템이 공존하는 공간 동광극장 역시 호황기에는 영화 간판을 그리는 ‘화공’을 비롯하여 영화관 전체 직원이 10명에 달했다가 지금은 고재서 대표 1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재서 대표는 영사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름 영사기로 상영할 당시에 직접 영화를 틀기도 했다. 동광극장에 들어오면 보이는 ‘35mm 필름 영사기’ 같은 경우 영화 상영은 하지 않지만 지금도 작동 가능하게 관리되고 있다. 현재 영화 상영은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되고 있는데 영사기는 모니터로 체크하고 매표기에도 전산화가 도입되어 있다. 한 번 영화를 틀면 최소 2~3주간 상영한다. 지금도 작동 가능한 로비의 필름 영사기 동광극장은 1993년 5월에 4개월간 문을 닫았다가 가을에 재개관했는데 그 당시 스크린과 음향 시설 등을 리모델링했고, 리모델링 이후 최신 영화를 가까운 곳에서 좀 더 쾌적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개봉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012년 7월부터는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 시스템이 바뀌었다. 필름 영사기로 상영한 마지막 작품은 < 연가시 >(박정우, 2012)였고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한 첫 번째 작품은 < 도둑들 >(최동훈, 2012)이었다. 필름 영사기뿐 아니라, 동광극장은 외부와 내부 모두 현재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영화관 초창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을 준다. 이 때문에 영화박물관이나 촬영 세트장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입구 왼편에 매점이 있고 오른편이 티켓부스다. 그리고 나머지 전체가 휴게실인데 소파와 안마의자가 있고 영화관의 옛 사진들과 영화 포스터들이 구석구석 붙어 있다. 손으로 직접 쓴 관람 시 주의사항 표지는 물론 신문 기사 등도 있는데 동광극장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휴게실에 모두 있는 셈이다. 휴게실 공간의 맨 끝에 철문을 열면 상영관에 입장하게 된다. 상영관 안에는 관객의 보행을 돕는 파란 LED 조명선이 있고 조명선을 따라 들어간 뒤 원하는 좌석에 앉으면 된다. 리모델링 당시 스크린 아래 무대를 뜯어내고 소파를 놓았고 그로 인해 50석이 줄어들었는데, 대신 앞뒤 객석의 간격이 넓어져서 더 쾌적해졌다. 1층 같은 경우 2009년에 전석 갈색의 가죽 리클라이너 소파와 간이 테이블을 설치하였는데 테이블과 보조 받침대가 있고 핸드폰 충전이 가능하도록 콘센트까지 설치되어 있다. 동광극장 상영관 내부 전경 동광극장은 건물 하나를 영화관으로만 쓰고 있다 보니 2층 건물 외부 전체가 상영작 포스터 간판을 비롯해서 영화관 관련한 표지들로 덮여 있다. 건물 맨 위에는 관객 수 1,000만 명이 넘은 한국영화들이 필름 모양 속에 나열되어 있고 그 밑에 노란색 액자 모양으로 크게 현재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가 있다. 상영작을 홍보하는 간판 그림은 1990년대 말까지 그려졌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사진으로 걸린다. 그 밑에 작게 “1959”라고 영화관이 문을 연 연도가 적혀 있다. 상영작 홍보 포스터 간판 밑에 전광판이 있고 그 밑에 “동광극장 상영 중”이라는 글자와 입구가 있다. 입구 같은 경우 도로가 새롭게 나면서 도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옛 입구가 있는 건물 벽면에 극장 이름이 시멘트로 조각되어 남아있다. 동광극장 외관 간판 부분 근접 사진 이렇듯 예전의 모습을 가진 영화관 내·외부 모습 때문에 유명 드라마 촬영지로 등장한 바 있으며(드라마 <시그널>,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김중미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의 동두천』(2018)에도 등장한다. SNS상에서는 ‘와칸다 극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유튜버가 방문했을 2018년 당시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안소니 루소, 조 루소, 2018)가 개봉해서 전국적인 흥행을 하고 있었는데, 동광극장에서도 해당 영화를 틀고 있어서 영화 속 주요 배경인 ‘와칸다 왕국’ 이름을 따서 누리꾼들이 지은 것이다.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현재는 설날이나 추석에 손님이 몰리는 편이고 흥행작이 개봉하면 지역 주민들이 극장을 찾아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이 보러 온 작품은 2023년 11월 22일에 개봉한 < 서울의 봄 >(김성수, 2022)이었다. 평소에는 영화관에 영화 자체를 보러 오는 손님보다 레트로 여행 등의 컨셉으로 인근 시장들을 둘러보고 오래된 영화관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동광극장 같은 경우 지역신문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나 장기적인 효과를 불러오지는 못했다. 전체적인 지역 경제 쇠퇴와 더불어 인근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은 물론 코로나 시기 OTT의 급부상 등이 부진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광극장은 개봉관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극장 내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쳤고, 매일 영화관을 열고 있다. 동광극장이 가진 소망은 1959년에 문을 연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계속 개봉영화를 상영하는 상업영화관으로 지역에 남는 것이다. 극장주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그러므로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동광극장 로비 전경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경기도 동두천시 동광로 33 (생연동) 2) 설립일 : 1959년 3) 대표자 : 고재서 4) 규모 : 지상 2층, 면적 483.63㎡, 연면적 707.32㎡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훨체어석): 상영관 1개관 총 283석 (리클라이너 의자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240석, 지정좌석제가 아닌 자율 착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자율적 운영, 정기휴무 없음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인 주중 9,000원, 주말 9,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군인, 간부, 소방공무원 주중 8,000원, 주말 8,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청소년, 정복 군인 주중 7,000원, 주말 7,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경로우대, 장애인, 국가유공자 주중 6,000원, 주말 6,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어린이 주중 5,000원, 주말 5,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8) 조직 구성 : 대표 1명 상근 9) 구성원 : 고재서 대표 1인 10) 주요 장비 (영사 장비, 음향): 디지털 영사기, 돌비 음향 시스템, 상영관 입구에 작동 가능한 필름영사기 취재 일자 : 2024년 6월 17일 글/인터뷰 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