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관계
- 감독
- David Beaird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조지 뉴번, 레슬리 호프, Kimberly Foster
아마 금방 첫눈이 내릴 것이다. 눈 내린 풍경에서 가장 웃긴 순간은 넘어진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누군가 미끄러져 자빠질 때일 것이다. 그게 꼭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을 볼 때 거의 기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물론 그런 다음에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거리를 지키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감춘 채 시선을 돌리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우리가 자빠지는 모습을 보고 공식적으로 웃을 수 있는 장소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이다. 지금도 이 개그는 웃음을 자아낸다. 브라운관에서 너도 나도 자빠질 때 그걸 바라보던 언론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자빠지는 것 말고 없다는 비난과 함께 지성이 없는 희극이라는 비판을 던졌다. 이 개그는 가장 단순하지만 매번 보는 쪽을 웃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자빠지는 개그가 시작된 곳은 아마도 보드빌 연극무대였을 것이다. 이 무대에서 활동하던 많은 배우들이 각자의 퍼포먼스를 갖고 카메라 앞으로 왔다. 보드빌 무대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빠졌다. 왜냐하면 그 퍼포먼스가 가장 쉽고 가장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말했지만 이 퍼포먼스는 부상당할 위험이 항상 있었으며 게다가 상대방과의 앙상블이 중요했기 때문에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은 그의 경력 초기부터 자빠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1916년은 채플린에게 중요한 한 해가 되었다. 당시에는 매주 월급의 형식으로 지불하는 주급(週給)방식으로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다. 채플린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더 많은 주급을 받으면서 매년 연간 제작 편수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1915년에 연간 16편의 영화 연출(과 주연으)로 계약을 맺었던 것을 1916년에는 12편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시간적 여유는 채플린을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채플린은 좀 더 시나리오에 공을 들일 수 있었고, 자신의 개그 퍼포먼스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으며,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점점 그의 영화가 눈에 보이게 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채플린의 영화들은 점차 서사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고 드라마투르기를 작동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씬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는 과정을 통해 씬 안에서 활동하는 동선과 드라마, 감정선, 퍼포먼스의 디테일, 그것들이 펼쳐지는 장소의 미장센,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거리를 정식화시켜 나아갔다. 채플린이 말한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클로즈업과 롱 쇼트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액션과 상황의 원근법을 창조해냈다. 원근법은 가까운 것(近)과 먼 것(遠)이 한자리에 있을 때만 구별되는 것이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그 둘 사이의 왕복운동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씬이 희극이자 비극이라는 천재적인 발명을 해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루게 될 것이다. 이 해에 만든 영화 중에서 마지막으로 개봉한 <롤러 스케이트장(The Rink)>은 상영 시간 24분의 소동극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찰리는 손님 주문을 받으면서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도 실수를 거듭하지만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면 보란 듯이 솜씨를 뽐낸다. 이때 찰리는 레스토랑에 온 진상 손님 스토우트씨를 여기서 다시 만나자 골탕을 먹인다. 게다가 여기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이 찰리를 롤러 스케이트장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스토우트씨와 마주친다. 일대 난동이 벌어지고 찰리는 유유히 빠져나와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달리는 자동차의 뒤에 매달려 뒤를 쫓아오는 신사들로부터 멀어진다. 두 번의 시퀀스에서 찰리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찰리는 롤러스케이트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미끄러짐과 불안정한 균형을 이용해서 우아한 동선을 먼저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무례한 악당을 사정없이 쓰러트린다. 이때 악당은 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번 제풀에 미끄러지고 자빠진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들어서는 순간 일반적인 균형의 법칙은 사라지고 갑자기 새로운 중력 법칙이 작동하는 것만 같은 세상이 될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찰리는 이제까지 보잘것없이 모두에게 구박받던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여기서 세상의 법칙에 대한 주인의 자리에 간다. 이때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는 세상의 법칙에 대한 전복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개그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부자들을 마음껏 웃어주는 위대한 퍼포먼스가 된다. 물론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찰리를 잡기 위해 스케이트장 안으로 몰려든다. 하지만 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 사이를 공기처럼 빠져나간다. 점점 더 스케이트장은 카오스에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율동의 동선으로 가득 찬다. 모두의 동선이 실타래처럼 뒤엉키는데도 찰리만은 우아한 동작으로 그들 사이를 그렇게 빠져나간다.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 퍼포먼스의 스펙터클을 정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스펙터클이 품고 있는 웃음의 정치학을 발명해낸 것이다. 아마도 그때 이 스펙터클을 모스크바에서 레프 쿨레쇼프와 그의 제자들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 더. 아마도 그때 베를린에서 발터 벤야민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사 앞에서 나는 반문하고 싶다. 누가 이 스펙터클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는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린 코 위에 필름 릴을 올려놓은 멧돼지가 검푸른 바닷물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를 접한다. 제작사 ‘바라히 찰라나 치트람’의 로고 필름이다. 이때 이미 짐작했어야 했다. < 나는 파리다 >는 범상치 않은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오버’한다. 최근 < 바후발리: 더 비기닝 >(2015)으로 인도 박스오피스를 휩쓸었고 한국에도 알려진 S.S 라자몰리 감독이 2012년에 만든 이 영화는 ‘괴작’이라고 하기엔 보편적이고, ‘졸작’이라고 하기엔 상업적인 미덕이 상당하며, ‘걸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콘셉트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작’이랄까? 코드가 맞는 관객만 조금 확보되면 충분히 후세에 컬트로 추앙받을 만한 영화다. 참신하면서도 충격적인 로고 필름이 지나가면 영화가 시작된다. 무지 화면 위로 아빠와 딸의 대화가 오간다. 딸은 잠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아빠는 귀찮아한다. “거 참, 파리처럼 앵앵거리네. 가만있자… 옛날 옛날에 파리 한 마리가 살았어. 그런데 파리 주변엔 악당도 살고 있었지.” < 나는 파리다 >는 아빠가 딸에게 해주는 ‘베드 타임 스토리’다. 하지만 따뜻한 동화 같은 걸 기대해선 안 된다. 첫 신부터 영화는 우리의 기대를 산산조각낸다. 한 남자가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수딥(키차 수디파). 아빠가 말했던 ‘파리 주변의 악당’이다. 그가 등장한 첫 신부터 관객들은 견뎌야 한다. 라자몰리 감독의 악취미인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방식인지, 이 배우 특유의 향기인지, 인도 영화의 전반적인 관습인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느끼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중년 관객이라면 오래전 어느 개그 프로에 나왔던 ‘리마리오’라는 ‘느끼남’을 기억하실 거다. 놀라지 마시라. 수딥은 리마리오를 능가한다. 수딥은 근처에서 클레이 사격을 하는 칼라(함사 난디니)라는 글래머러스한 미녀에게 다가간다. 처음 보는 여성인 듯한데… 그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몸을 밀착하고 클레이 사격을 교습해준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맞다. 수딥은 악당이자, 그 어떤 여자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살아가는 녀석이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사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여자가 먼저 도발한다. “여기 매일 오세요?” 남자,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다. “오길 원해요?” 여자, 순식간에 진도를 나간다. “몇 시에?” 남자,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이 올 때.” 단 네 줄의 대사로, 시작한 지 5분도 안 된 영화는 관객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워진다. 과연 이 거대한 아우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지만 당신은 아직 다음 신을 보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한 여성이 조심스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작은 세공품을 만드는 ‘마이크로아트’다. 그녀의 이름은 빈두(사만다 루스 프랍후). 이때 갑자기 정전이 된다. 그 모습을 길 건넛집 옥상의 나니(나니)가 바라본다. 나니는 2년째 빈두를 따라다니는 짝사랑의 주인공. 수딥 못지않게 느끼한 녀석이다. 정전이 그에겐 기회다. 재빨리 위성 접시에 은박지를 붙이고 그 위에 플래시 빛을 비추어 발광체를 만드는 나니. 그는 서서히 접시를 빈두의 창문 쪽으로 돌린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더라도 나만은 당신의 한 줄기 빛이 되겠다는 순애보의 행동이다. 낭만적이다. 마음을 표시하진 않지만, 빈두도 싫은 눈치는 아니다. 이후 둘은 결국 연인이 된다. < 나는 파리다 >는,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제목을 뒤로 한 채, 일단 남자 캐릭터들의 과한 매력으로 시작한다. 정말 이 영화의 초반부는, 관객을 기어이 토하게 만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느끼하다. 모든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돈 많은 악당 수딥. 폭죽 만드는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순애보의 청년 나니. NGO에서 활동하는 아름다운 여인 빈두. 빈두는 기부금을 받기 위해 수딥을 찾아가고, 흑심을 품은 수딥이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이때 빈두와 나니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수딥에게 감지되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관계를 해결하는 악당의 방법은 정해져 있다. 상대편 남자를 제거하는 것. 나니는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영화는 급변한다. < 나는 파리다 >는 여기서부터 제목에 충실해지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죽는 순간, 나니의 억울한 영혼은 마침 근처에 있던 파리 알로 들어간다. 정말 놀라운 설정이다. 이후 알에서 태어난 파리. 나니의 환생이다. 여기서 몇몇 텍스트가 떠오를 것이다. 혹시… 카프카의 「변신」? 아니다. 이 영화를 실존주의와 연결시키는 건 수딥의 윙크하는 얼굴보다 더 ‘오버’다. 파리가 된 나니는 고뇌하지 않는다. 그는 의외로 빨리 적응하고, 나름 삶의 의욕에 넘친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 플라이 >(1986)? 일견 통하는 구석도 있다. <나는 파리다>도 심각한 대목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복수극이자 로맨스다. 그런 면에서 <나는 파리다>는 의외의 영화와 만난다. 바로 제리 주커 감독의 < 사랑과 영혼 >(1990)이다. 유령이 된 남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곁을 맴도는 것처럼, 나니는 파리가 되어 빈두 곁을 머문다. ‘파리/나니’는 빈두에 대한 수딥의 야욕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깟 파리 한 마리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아니다. 영화는 파리와 수딥 사이의 ‘다윗과 골리앗’ 싸움을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여기서 라자몰리 감독의 놀라운 솜씨가 발휘된다. 앵앵거리면서 괴롭히던 수준에서 점증되어 차량 전복 사건까지, 둘의 대결은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한다. 여기서 감독은 훌륭한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대결에만 집중하면 영화의 감정은 메마르게 되는 법. 파리는 자신이 곧 나니임을 빈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 사랑과 영혼 >에서 동전을 끌어올리던 샘(패트릭 스웨이지)의 안간힘을 연상케 한다고나 할까? 기회를 잡은 ‘파리/나니’는 빈두의 탁자 위에 물로 글씨를 쓴다. “나니에요. 다시 태어났어요.” 빈두는 받아들인다. < 나는 파리다 >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적 요소는 ‘파리 CG’다. 약 2,000개에 CG 숏이 사용된 <나는 파리다>는 전형적인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 즉 ‘영화의 특정 요소를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상업영화’다(거의 모든 해상 신을 CG로 만든 < 명량 >(2014)도 1,500~1,600숏 수준이다). 굳이 신조어를 만든다면 플라이플로이테이션(flyploitation) 필름? 파리 등장 이후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결합처럼 느껴지며, 90% 가까이 인도 기술로 이루어진 컴퓨터그래픽은 과시하듯 드러낸다. 실제 소스 촬영 없이 오로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파리 캐릭터는 지나치게 큰 눈, 말벌 크기는 되어 보이는 볼륨, 강렬한 색감 등 꽤나 과장된 크리처인데 이후 점입가경으로 들어선다. 파리는 복수를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고글을 쓰고, 손엔 쇠로 된 무기를 장착한다. 모두 ‘마이크로아트’를 하는 연인 빈두 덕분이다. 그러면서 대결은 점점 화력을 더하고, 클라이맥스에 가면 거의 재난영화 수준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쉴새 없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작위적 설정과 우연의 남발은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놀라운 건, 이 영화가 절정 대목에선 감정적으로 자극한다는 점이다. 파리의 위대한 순애보와 희생을 접하는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우린 장엄함을 느낀다. 파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이것은 진정 예기치 못한 감정이다. ‘인도의 스필버그’를 꿈꾸는 S.S 라자몰리 감독이 ‘약 빨고’ 만든 듯한 < 나는 파리다 >는 ‘병맛’처럼 시작해 점점 관객을 빨아들이다가 결국엔 “발리우드 만세!”를 외치게 만드는 영화다. 인터넷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의 간증에 가까운 댓글들이 증명하듯,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의 흥겨운 반응이 이미 입증했듯, <나는 파리다>는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넉넉한 즐거움의 영화다. 여기에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3분도 안 되어서 엔딩 크레디트를 올려 버리는 그 성급한 엔딩이라니! 그런데… 이 영화의 시작이, 아빠가 어린 딸에게 해주는 베드 타임 스토리 아니었던가? 잠자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아빠라니… 후덜덜한 설정이다. P.S. 1 안타깝게도 IPTV에선 만날 수 없어서 녹색 창이 유명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 받아 모니터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통해 IPTV의 조속한 서비스를 촉구한다. P.S. 2 원래 버전은 145분이지만 국내에선 107분 버전으로 줄여서 유통되면서 과도한 편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을 통해 풀 버전의 공개도 촉구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폴 지아마티가 그 특유의 권태로움을 가득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로 한 남자와 거의 장난전화로 추정되는 통화를 하고 있다. 한밤중인데 남의 집에 전화를 걸어 자기 와이프를 바꿔 달라고 하다니. 이제 당신 와이프가 아니라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왜 누드사진을 나에게 보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이 남자, 척 보기에 괴팍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캐릭터다. 아내는 없고, 딸과는 떨어져 살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자신의 옛 스캔들을 팔아먹는 책을 썼다. 그 스캔들이라는 건 바로 주인공 자신이 오랜 옛날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폴 지아마티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바니. 이 영화는 바니의 입장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이야기다. 한국 개봉제는 < 세 번째 사랑 >이라는, 뭔가 같은 제목의 영화가 한 30편쯤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의 타이틀이지만 원제는 <바니스 버전 Barney’s Version>이었다. 영화는 훌쩍 1960년대로 돌아간다. 바니는 유럽에서 소설을 쓰는 친구, 술과 담배에 쩔어 있는 여자친구, 그 밖에 캐릭터 이름이 크레딧에 등장하지 않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거의 무위도식하고 있다. 여자친구는 임신을 했고 바니는 곧바로 결혼을 한다. 어딘가 탐탁지 않았던 결혼 생활은 아내가 사산을 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내가 가졌던 아이는 흑인 친구의 아이였던 것이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던 아내는 결국 자살하고 바니의 첫 번째 결혼은 그렇게 끝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북미식의 추억 팔이 영화다. 1960년대 히피들이 가장 핫 한 세대였던 시절, 방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멋진 일로 취급되던 그 시대를 유럽에서 보냈던 추억담 속에는 베이비 붐 세대의 리버럴함, 예술 지상주의가 지나쳐 예술병으로 발전해 버린 그 세대의 예술관 등이 스쳐지나 듯 때로 독한 농담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영화는 곧바로 1970년대 미디어의 고성장 시대로 옮겨간다. 집시처럼 살던 바니는 몬트리올로 가서 삼촌이 소개한 TV 프로덕션 일을 시작한다. 유대인인 바니의 가족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인맥을 이용해 회사를 급성장시킨다. 그런 가운데 바니는 어느 부잣집 딸을 만나 두 번째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 아버지가 사돈과 잘 통하지 않는 약간의 장애 요소가 있지만 유럽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도 모조리 피로연장으로 찾아와 흥겨운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바니는 이번 결혼도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완벽한 결혼이란 없고 누구나 막연하게나마 결혼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이 두 번째 결혼에서는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완벽한 여인을 만나버린 것이다. 술에 취한 채로 이 결혼식의 주인공인 바니는 터벅터벅 걸어가 아름다운 여인 미리엄과 인사를 나눈다. 이 여자는 다르다. 시가를 피운다고 핀잔만 줄 아는 대학원생 아내에 비해 이 여자는 몬테크리스토라는 시가의 별명과 그 사연까지도 꿰고 있다. 아이스하키광인 바니는 결정적으로 미리엄이 남긴 메모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몬트리올이 역전승 했어요”라는 메모.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어”라고 말한 순간 아내가 “나도 그래”라며 빰에 입을 맞춘다. 바니의 사랑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데. 피로연이 끝나자 바니는 비를 뚫고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미리엄을 찾아 그 앞에 앉는다. 다짜고짜 “우리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미리엄은 기겁한다. “우리는 방금 만났을 뿐, 그것도 당신의 결혼식장에서”라고 말한다. 기차표도 끊지 않은 관계로 결국 내리게 되지만 바니는 소년이라도 된 듯 기차를 따라 달리며 작별 인사를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 세 번째 사랑 >은 때로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예측 불가능하기도 한 방향으로 계속 플롯이 트위스트 된다. 어딘가 장황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알고 보니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인 모데카이 리클러의 동명 소설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는데, 이 영화는 그 설정이 1막을 훨씬 지나고 나서야 등장한다. 폴 지아마티는 그 특유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그러나 어쨌든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으로 젊은 시절로부터 노년에 이르는 40여년간의 바니를 연기했다. 결국 2011년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기 귀신들이 몇 등장하는데 일단 그 고약한 농담을 일삼는 바니의 아버지는 더스틴 호프만이다. 바니의 두 번째 아내는 미니 드라이버, 그리고 바니를 사로잡는 지성미 넘치는 미녀 미리엄은 로자먼드 파이크다. 은근히 호화 캐스팅이다. 1970년대의 바니는 ‘천하에 쓸모없는 프로덕션’이라는 겸손이 지나친 이름을 가진 자신의 회사에서 척 보기에 이미 3류인 드라마를 제작하는 등 직업적으로 그리 만족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매주 뉴욕에 살고 있는 미리엄에게 선물과 꽃을 보낸다. 미리엄은 제발 이러지 말라며 전화를 하지만 바니는 누구의 말을 귀담아 듣는 캐릭터가 아니다. ‘위대한 생각은 언제나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며 돌직구 애정 고백을 일방적으로 계속할 뿐이다. 그러니 어디 결혼 생활이라는 게 제대로 되겠는가. 하루종일 잔소리를 해 대는 아내를 별장에 두고 바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거기서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한다. 전 재산을 다 털리더라도 이혼하고 필생의 사랑인 미리엄에게 가겠다고. 그리고 별장으로 돌아오자 대단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부적절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사랑, 아니 두 번째 결혼은 정리가 되고 이 영화의 제목인 ‘세 번째 사랑’이 시작되는데 영화는 사실 지금부터 진짜 볼만하다. 여기까지는 떡밥만 깔아놓은 셈이다. 이 영화는 40대 이상을 위한 영화다. 단언할 수 있다. 결혼도 해 본 사람이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결혼과 사랑의 차이점을 매우 디테일하고 세심한 감정으로 다룬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잊혀지 듯 사랑도 서서히 지워진다. 그리고 사랑을 대체하는 다른 감정들이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부분, 사랑을 대체하는 다른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남자의 인생 역정을 비연대기 순으로 셔플하면서 스릴러적 장치도 이용하고, 나름 반전 아닌 반전도 있는데 한국 관객들에게는 제법 외면당했다. 로자먼드 파이크가 < 나를 찾아줘 >를 찍기 전이었기 때문일까. 감독은 리처드 J 루이스. 어디서 많이 듣던/보던 이름이라면 아마도 미드 CSI 시리즈 때문일 것이다. 여러 편 감독했고 여러 편 프로듀싱 했다. 주인공 바니와 비슷한 직업인데 아마도 이 영화는 그런 감독의 자아실현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폴 지아마티 때문일까 알렉산더 패인의 영화 같은 느낌도 좀 드는데 그만큼 치열하게 파고드는 영화는 아니다. 잔잔한 듯 시끄럽고 평이한 듯 독특한 영화.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만 보고 있어도 2시간 14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안락하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