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흥행이 두려운 감독들의 속사정
- 제작년도
- 2009
2016년 한 해 동안 영화제들을 통해 소개된 다큐멘터리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르는 작품들 중 다수는 단편들이다. 4.19, 5.18, 87년 6월, 2015년 촛불집회를 기록한 스틸사진들 한 모퉁이에 자리한 흐릿한 얼굴들의 클로즈업과 셰익스피어, 단테, 제발트 등의 작품들에서 인용된 독백을 내레이션으로 하여 되풀이되는 민중, 학생, 노동자, 시민들의 봉기를 상기한 백종관 감독의 < 순환하는 밤 >. 어두운 밤 스케이트보드와 디스코팡팡 위에서 빛나고 돌아가는 이미지들을 익스트림 줌인으로 잡아내고 다양한 사운드들과의 몽타주를 시도하며 디지털실험영화의 영역을 탐구하는 임철민 감독의 < 빙빙 >. 감독의 캠코더에 들어온 2016년 서울의 풍경들과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셰익스피어의 글귀들 속에서 ‘삶의 지도’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작품으로, 이미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고재홍 감독의 <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 너무 다른 작업들이라, 작품들 사이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작품 외적인 것이지만 중요한 것으로, 세 편 이상 꾸준히 작업을 해오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꼽게 된 나름의 기준은 있다. 각 영화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각 영화들이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사운드로 충분히 구축해 낸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이 리스트에는 한 작품이 더 있다. 다른 세 작품에 비해서는 가장 적게 소개되어 아쉬운 장윤미 감독의 < 늙은 연꽃 >이다. < 늙은 연꽃 >은 한 폭의 정물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놓고 그린 그림이고, <늙은 연꽃>에 등장하는 나이든 촌부(村婦)는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정물화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첫째로 영화가 촌부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고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영화 중간 촌부가 말을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듦에도 이를 자막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촌부에 대해 그녀의 방 한 켠에 쌓여 있는 늙은 호박들이 주는 정보 - 누렇게 잘 익은 호박들이 방 한 켠에 쌓여 있다 - 이상의 어떤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이 늙은 여인은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사람’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두 번째는 촌부의 삶에 어떤 변화, 움직임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는 움직인다. 여느 시골의 삶과 마찬가지로, 마른 곡식을 거두고 키질을 하며 잠이 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 촌부의 일상은 촬영 전이나 후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고, 카메라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 마냥 이를 관찰한다. 영화가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촌부는 그저 촌부이고, 그녀의 늙은 호박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들에 머물 뿐이다. 세 번째는 촌부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정물화를 그릴 때 화가와 사물 사이의 거리 정도로,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이 스스럼없이 가까운 거리는 < 늙은 연꽃 >만의 독특한 이미지, ‘늙음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좁은 방 안에서 촌부와 마주 보고 있는 카메라에 담긴 그녀의 얼굴은 주름의 깊이와 개수를 가늠할 수 있게 하고, 무덤 곁에 있는 마르고 거친 풀뿌리들을 맨손으로 뽑아내는 손의 클로즈업은 주름의 깊이만큼이나 두툼한 굳은살을 보게 한다. 그러나 <늙은 연꽃>은 이 이미지들을 < 워낭소리 >나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처럼 죽음 혹은 노쇠함의 고통으로 환원시키지도 지나 가버린 시절에 대한 회한과 감상으로 이어버리지도 않는다. < 늙은 연꽃 >의 정물과 같고, 알 수 없는 늙은 여인의 이미지를 정박시키는 하나의 쇼트가 있다. 오솔길을 따라 무덤으로 향하는 촌부를 따라가는 길에 불쑥 끼어드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줌인하는 장면이다. 허리와 목이 굽은 탓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얼굴은, 그것도 미소 띤 얼굴은 여전히 늙어있지만 아름다움과 온기가 느껴진다. 영화의 제목인 ‘늙은 연꽃’이 상기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 이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촌부의 모습에는 늙고 노쇠함 즉, 추에 가까운 것과 연꽃 즉,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영화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며 이는 이 영화만의 독특하고 강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이 힌트를 가지고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늙은 여인의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끝에 이르러 반전에 가까운 영화의 비밀이 밝혀진다. “할매, 그럼 설에 뵐게요. 설에.” 카메라 뒤에 있는 이는 이 할머니의 손녀다.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대화씬이다. 이 장면에서 할머니는 카메라 뒤에 있는 손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영화 중간에 끼어든 그 아름다운 미소와 같은 미소다. 카메라 뒤에 있었던 이가 이 촌부의 손녀였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될 수 있었고, 그 아름다운 미소를 카메라의 정면으로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비밀은 곧바로 다른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 늙은 연꽃 >을 만든 장윤미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녀는 어떻게 하여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낯섦,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유혹, 설명과 이야기에 대한 강박 속에서 이 같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혹은 이러한 것들은 애초에 고민의 지점이 아니었고,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본 것들을 어떻게 이미지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단 하나의 고민만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장윤미 감독의 전 작품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2012),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를 다시 보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그녀의 다음 영화들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스크린 진출의 신호탄이었던 < 워낭소리 >는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산업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에 따라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기존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달리 극장 개봉 등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에 적극적이던 이들 독립PD들은 각종 해외 영화제 초청 및 피칭 프로젝트 참여 등을 통해 영화를 홍보하고 해외자본을 끌어오는 노하우를 일찌감치 터득했을 뿐 아니라, 대중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했다. 이것은 확실히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방식과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초기에는 제작 배경이 다른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규 , 박봉남 , 이승준 감독 등 독립PD들의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이들의 지속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꾸준히 힘을 축적해 가고 있었고, 이러한 노력은 결국 5백만 관객 동원이라는 한국 다양성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게 된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로 이어진다. < 춘희막이 >는 < 워낭소리 >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들은 제작방식의 유사성뿐 아니라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소위 ‘시장에서 통하는 이야기’로서의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은 현대의 대도시, 자본주의적 관계망에서 벗어난 깊은 산골이나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수십 년에 걸쳐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한계 상황은 내러티브를 경제적으로 조직하고 영화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 워낭소리 >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 춘희막이 > ‘노년’ ‘동행’ ‘운명’ ‘죽음까지 초월한 사랑’ 혹은 ‘우정’ 등 지극히 낭만적인 수사로 점철된 영화의 홍보 문구는 이 영화들의 정서적 소구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테면 < Old Partner >라는 영문 제목이 붙은 < 워낭소리 >는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소와 역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할아버지의 오랜 동반자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는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이별하는 시골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다. < 춘희막이 >는 한 남자의 본처와 씨받이로 만난 두 여성이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모녀처럼, 자매처럼 혹은 친구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기이한 동거 혹은 우정을 다루고 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법한 인물들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이들의 관계를 운명마저 초월한 낭만적 동반자의 관계로 거듭해서 묘사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는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은 정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유대감이 깨지고 가족은 해체되었으며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삶은 자본주의적 소외를 벗어난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위무감을 줄 뿐 아니라, 나 역시 원한다면 그러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소망충족 혹은 대리만족 판타지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로 호명되고 소비되는 과정은 이러한 판타지의 작동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런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니!’라는 감탄과 기쁨. 이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때로 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감추는 데 더 효과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허구가 아닌 현실’이라는 관객의 믿음에 의지해 허구보다 더 능란하게 판타지를 펼쳐 보일 수도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린 민하는 다큐멘터리가 “광적으로 조작적인 픽션”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관객들이 이 영화들에서 보고 싶어 한 것은 다큐적인(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반대로 현실에 부재한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제작자들은 철저하게 비자본주의적, 전근대적 시공간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판타지의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삶은 현대 자본주의적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 워낭소리 >나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 춘희막이 >의 등장인물들처럼 외딴 시골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도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은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것을 이 영화의 제작자들이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영화가 의도한 효과를 위해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자본주의적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고 배제하는 전략을 취한다. 관객이 원한 것은 비릿한 실제 삶의 풍경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는 부재하는 헌신과 낭만, 영원한 사랑 따위의 ‘상실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작동을 위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적 배우로서의 노인들은 철저하게 현실의 때를 지우고 순수한 존재로 탈색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향수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자본주의적 질서와 가치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공간으로 노인을 호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인의 삶을 타자화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일상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시골 오지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내 카메라 앞에 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원한 것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 향수였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철저하게 노인들의 현실적인 삶의 한 측면을 감추고 낭만화, 미화되어야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노인의 타자화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노인의 타자화란 노인의 낭만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 타자화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지우고 ‘순수한’ 삶의 껍질만 남겨놓은 ‘낭만화’의 최종 결과이다.) 여하튼 ‘노년의 낭만화’라는 영화적 전략은 이 영화들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세속적,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제거한 순수화, 낭만화의 최종 국면에 이르러 죽음은 이제 사회학적 사건이 아닌 신화적 세계의 사건으로 수용된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한 등장인물들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상호 헌신은 죽음으로써만이 종결될 수 있는 이들의 운명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에는 비극적 숭고미가 부과된다. < 춘희막이 >는 < 워낭소리 >와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에서 반복되는 죽음의 미학을 반복하는 듯하면서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희막이>에도 물론 죽음은 등장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 노인이 죽었을 때 막이 할머니는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구슬피 울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화는 이웃 노인의 죽음을 통해서 이제 90세를 넘긴 막이 할머니를 비롯한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도 죽음은 곧 닥칠 사건이라는 점을 충분히 암시한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리 <춘희막이>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의 죽음을 서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끝이 나고 결과적으로 죽음의 비극성보다는 ‘동행’의 느낌이 부각된다. 그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다. 사실 이 영화가 노인들을 소재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정했을 때 어쩌면 제작자들의 구성안에는 이미 주인공의 죽음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그 자체로 불온하다. 비극적 숭고미는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재의 선택은 필히 죽음으로 종결되는 내러티브 결말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좀 더 흡입력 있고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결국 다큐멘터리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제 90세가 된 노인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하고 2년간 촬영을 했을 때 <춘희막이> 제작진이 어디까지 이 영화를 기록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본 영화는 그러한 죽음의 포르노그라피의 유혹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기대되는 죽음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흥행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 영화가 포르노그라피적 천박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의 일상에 우리가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서사가 멈춘 뒤에도 계속될 주인공들의 삶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길을 뻔뻔스럽게 가는 이야기에는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그 직전에 멈춰 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러한 선택은 결말이 아닌 과정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그러한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앞으로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 춘희, 막이 할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은 한 해를 시작하는 영화제이고, 다큐멘터리 영화제이기 때문에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들이 많다. 필자 또한 한 쪽 귀를 열어 요즘 제작자들의 화두가 뭘까, 엿듣기도 하고 거들기도 했다. 작년하고 다르게 올해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에게 ‘제도화’ 진입단계를 넘어서, 이젠 ‘산업화’ 단계로 나아가면서의 느끼는 불안감 혹은 위기의식 같은 것이 감지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광범위한 위기의식이라기보다, 어떤 균열에 대한 예감 혹은 직감 같은... 어찌 되었건, 이미 ‘제도권/비제도권’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극장개봉을 통해 상당 부분 영화산업 내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눈 감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늦은 것은 아닌지. 1998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개편됨으로써 시작된 유일한 독립영화(다큐멘터리)제작지원은 이제 다양한 형태로 영화제, 재단, 기관에서 제작지원 및 배급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사실 여타의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풍족하다면 풍족할 수 있는 지원 조건들이다. 그리고 2014년 CGV아트하우스와 대명문화공장이 공동 배급한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같은 다큐멘터리는 “앞으로 < 워낭소리 >를 넘어서는 다큐멘터리는 없을 거야”라고 단정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산업에서 나름 성공(?)적인 케이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배급지원은 시장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확대 재편되고 있다. 재편과정에서 제작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만들어진 지원제도’에 잠재적 수혜대상이 되었다. 나름 봄날이다. 그런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미 만들어진 지원제도’는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선택하게 되는 상황, 여기에서 선택과 ‘배제’의 정치학이 작동된다. 누구에게나 과실이 될 수 없으니, 배제와 경쟁이라는 논리가 한층 자연스럽게 작동하게 -피칭의 경우 그것을 전면화 하는 쇼잉- 된다. 또 하나, 제작지원이 많아질수록 잠재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제작환경 자체는 나아졌다고 보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의 생활조건들은 나아졌느냐 하면은 여전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를 제작하는 환경 자체나 나아지겠지만, 현실에서 다큐하는 사람의 삶 자체는 팍팍하다. 이상한 부조합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지원제도가 주는 달콤함에 빠지기 쉬운 상황에서, 지원을 받게 되면 영화를 제작하고 지원을 받지 못하면 제작을 포기하는 상황. 지원받기 위해서 지원하는 상황.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동안 오랫동안 고민해온 제작자들의 자립과 자생에 대한 실험들과 고민 그리고 노력과 연대들을 삼켜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 물론 지원제도는 필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지원제도들이 개별 영화 혹은 프로젝트 위주의 지원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작품의 성과로만 보일 뿐, 한국 다큐멘터리라는 ‘토양’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열매의 과육만 맛보려고 인공비료를 잔뜩 뿌리면, 몇 년 동안은 풍성한 과실을 맛보겠지만 그 이후의 땅은 이전보다 오히려 황폐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결국 제작자들이 지원제도에 의존하지 않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작자의 조건에 따라 오히려 지원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방향. 자립과 자생이라는 기본 줄기를 속에서 제작자의 삶이 나아질 수 방향으로 우리들의 고민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토양을 풍성하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인지. 민간지원제도 혹은 지원재단을 설립하여 장기적인 독립다큐멘터리를 지원하면서도 다큐멘터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도 하나의 방향이다. 이제부터라도 논의를 시작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