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꼴
- 감독
- 홍진아
- 제작년도
- 2018
대부분 영화팬들은 이용민 을 60년대 한국 호러영화의 대표작인 < 살인마 >의 감독으로 기억할 텐데, 그는 이 작품 이외에도 < 악의 꽃 > < 목 없는 미녀 > < 공포의 이중인간 >과 같은 구미 당기는 제목의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김일안 이 원안을 쓴 < 무덤에서 나온 신랑 >은 63년 작인데, 포스터와 캐스팅만 봐도 알겠지만 코미디 비중이 높은 편이다. 시작하자마자 타이틀롤이 나온다.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길가에 쓰러진 그는 지나가던 택시에 올라타고 부상을 당했다며 집으로 데려달라고 한다. 집에 도착한 그는 돈을 주겠다며 기사에게 따라오라고 하지만 겁에 질린 기사는 달아나고 만다. 이 정도면 혁이 정말 귀신이긴 한 건가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귀신 맞나 보다. 그러니까 귀신이 택시 타고 집에 찾아오는 영화다. 택시에 탄 귀신 이야기는 역사가 꽤 긴 편이니 이는 호러가 될 수도 있고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 살인마 >의 도입부를 생각해보면 둘 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날은 당연히 혁의 제삿날로, 그의 친구 맹갑과 삼룡이 제상 앞에 앉아 있다. 혁은 자기가 귀신과 결혼해서 신혼 첫날에 이 꼴이 되었으니 오대산 백년골이란 곳에 가서 원수도 갚고 저승길에 갈 때 꼭 필요하니 거기 있는 자기 양복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맹갑과 삼룡이 가는 백년골이란 곳은 ‘삼칠 기도를 드리면 병 가진 사람이 완쾌해서 백 년을 산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좋은 곳인 거 같은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호러 경험의 연속이다. 무시무시한 할머니가 나타나기도 하고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달걀귀신과 만나기도 한다. 단지 시나리오에 그냥 ‘달걀귀신’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 진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걸 훔쳐봤는데 선경이 갑자기 달걀귀신이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훔쳐보고 있는 맹갑 앞에 갑자기 달걀귀신이 나타났단 말인가. 계속 읽다 보면 후자인 것 같지만. 둘은 탈박노인이 살고 있는 폐옥에 도착한다. 그들은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이야기하고 노인은 원수를 갚을 생각이냐고 묻는다. 그냥 사연을 듣고 원혼을 위로할 생각이라고 하자 노인은 그들에게 방을 내어준다. 단지 조건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까 봐 한 달 스무날 동안은 장사를 지내지 않는데, 마침 한 달 스무날이 된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두 개 있으니 두 사람이 차례대로 다녀와 못을 박으라는 것이다. 삼룡은 허겁지겁 임무를 완수하지만 겁에 질린 맹갑은 온갖 소동을 연출한다. 임무를 마친 둘은 오월이라는 여자가 약사대전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 몰래 훔쳐보니 오월과 탈박노인은 고양이에게 약을 먹여 독살하고 있다. 이 묘사를 보면 걱정이 된다. 당시 충무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험악하게 다루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 살인마 >에도 수상쩍은 장면이 하나 있다. 엿보다 들킨 둘은 화살을 쏘며 쫓아오는 탈박노인을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 잡히고 만다. 이제 그들은 억지로 마을에 머물며 삼칠기도를 드려야 한다. 노인은 계속 약초를 기르며 무슨 실험을 계속하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아까 잠시 등장한 선경이라는 여자가 그 노인의 딸이고, 노인은 딸의 치료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삼룡은 선경이 혁의 신부라고 확신하고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지만 선경은 오히려 결혼해달라며 삼룡을 유혹한다. 그러는 동안 맹갑은 오월이와 엮인다. 그 뒤로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들과 벌이는 소동들이 이어진다. 이 장면들을 보다 꼼꼼하게 묘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갖고 있는 시나리오의 지문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몇몇 장면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아마 내가 이렇게 탈락시킨 장면들이 진짜로 괜찮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말에 가서야 진상이 밝혀진다. 알고 봤더니 선경은 몽유병 환자였고 탈박노인은 지금까지 그 병을 치료하려고 연구 중이었다. 혁은 선경이 몽유병에 걸려 떠도는 선경을 보고 놀라 죽었던 것이고. 다행히도 선경은 치료가 되었고 삼룡은 선경의, 맹갑은 오월이의 짝이 된다. 합동결혼식을 올리겠다며 호들갑 떠는 결말은 발랄하기 그지없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승에 입고 갈 양복을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는 혁의 귀신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된다.
궁시렁쟁이 40대 아저씨, 덩치 크고 나이 먹은 트렌스젠더, 반항기 가득한 10대 가출 소녀. 도대체 어울릴까 싶은 이 희한한 조합의 노숙자 3인방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더 나을 것도 없는 같은 노숙자 주제에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는 40대 아저씨 `긴`과 이 꼴이 못마땅한 가출 소녀 `미유키`는 크리스마스인 오늘도 어김없이 티격태격 싸움질을 하고 있다. 싸움도 말릴 겸, 트렌스젠더 `하나`는 이 둘을 데리고 미유키를 위해 눈 여겨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으러 분리수거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쓰레기를 뒤지던 3인방은, 점 찍어둔 선물은 웬걸 얼굴에 점이 있는 작디작은 갓난아기를 발견하게 된다. 놀람과 기쁨과 곤란이 한 공간에 섞인다. 엉킨 실타래 같은 각자의 삶으로부터 도시의 틈새까지 도망 온 그들의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 또 하나의 실뭉치가 비비고 들어온 것이다. 긴과 미유키는 흔치 않게 한마음이 되어 한사코 거부하지만 씩씩하고 감수성 넘치는 트렌스젠더 하나상의 다소는 과격한 시위로 결국 이들은 아기의 부모를 직접 찾아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사랑을 버리거나, 혹은 잃거나 또 사랑에 내몰려 스스로를 버린 그들이 작은 아기에게 자신을 나누기로 선택을 한 순간, 별것 없던 삶 속에서 사소하고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와 무관한 한 생명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 걷고 달리는 사이 각자들의 엉킨 과거에 실마리가 한 가닥씩 풀려가고 이들의 삶에도 생명력이 차올라 간다. 한국 내 상영 제목인 <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은 매우 잘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 내내 크고 작은 행운과 우연들이 이들을 축복해 주고 이끌어 주지만 도무지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눈살이 찌푸려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사소한 행운들이 쌓고 쌓이며 점점 커지는 장면들은 그럴듯하니 시기적절하게 여겨진다. 마치 그동안 막혀 있던 세 명분의 행운이 이날 한 번에 터져나 오는 듯하더니 결국엔 기적을 일으켜 아기를 지켜내는 장면에 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故 곤 사토시 감독의 애니메이션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도쿄 갓파더스>도 시나리오와 연출이 굉장히 치밀해 한 치의 틈이나 흠을 찾기가 힘들지만, 그 의도와 즐거움은 친절하게 느껴질 만큼 알아채기 쉽다. 화면 곳곳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디테일하게 뿌려져 있고 자잘한 이야기 도구들이 `보기 좋게 숨어` 있어서 잠시도 눈을 떼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보통은 원작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 더빙판은 찾지 않는 편이지만 이 애니메이션만큼은 더빙판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생긴다. 자막을 읽어 내용을 따라가는 것 못지않게 영상에서 주는 즐거움이 참으로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쿄 갓파더스>는 <쓰리 갓파더스> 라는 1948년 제작된 맥시코 영화에서 모티브를 잡아온 것 같다. 이 영화는 세 명의 은행 강도가 황무지에서 도망 중에 죽어가는 여자에게 아기를 부탁받은 후 아기의 생명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해 나가고 결국엔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도쿄 갓파더스>에서 나오는 불행한 인물들은 대체로 다른 형태의 같은 결핍을 갖고들 있다. 그리곤 곤고하고 사랑 없는 현실로부터 달아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거나 죽으려 한다. 이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그저 풀어낸 듯 평범하고 불쌍하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너를 위해 나를 내어놓자 우리의 결핍이 채워진다. 애정이 그 공백을 메꾸어 가고 칙칙한 여백 속에 색깔이 차오른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그들만의 아기 예수는 그렇게 노숙자 3인방의 삶에 구원을 던진다. 그리고 유쾌하게 잡아챔으로써 우리에게도 희망을 품게 해준다. 따뜻하다. 즐겁다.
김영빈 의 < 나에게 오라 > 하면 떠오르는 것은, 최민수 가 연기하는 정석이라는 전라도 시골 지역의 전설적인 깡패가 도박판에서 상대 패거리들의 습격을 받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영화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그 장면은 <테러리스트>로 충무로 액션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김영빈 감독의 토착적인 데 뿌리를 둔 액션 아이디어가 박력있게 만개하는 장면이었다. 요컨대, 나는 그렇게 좁은 한국식 가옥 방안 공간에서 거두절미하고 몇 개의 커트로 붙여버린 사내들의 싸움을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한 순간의 방심때문에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 치명적 내상을 초래하는, 겉모습만 으스대는 사내의 허망한 최후를 목격하게 해 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 나에게 오라 >가 액션영화인 것도, 최민수 가 연기한 정석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도 아니다. 최민수는 특별 출연에 가까웠다. 그가 연기하는 정석은 박상민 이 연기하는 주인공 춘근이 흠모하는 인물이다. 춘근은 일자무식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못 했고 깡패로 한 번 먹고 살겠다고 작정한 놈이다. 서울에 올라갔다가 별 볼일 없이 귀향한 이 무지랭이 청년은 변변히 잘 거처도 없이 시골 역전 근처를 떠돈다. 시장 근처에서 대충 노숙하며 일어난 그가 1970년대 당시 시골 아침에 울려 퍼지던 새마을 노래에 맞춰 ‘새벽 X 이 꼴렸네. 너도 나도 일어나 XXX를 칩시다”란 육두문자로 개사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늘 하루 무슨 일을 저지를까 궁리중일 때 이 영화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초 코드로 청춘을 통과하는 이들의 마음 속 바닥을 보여줄 것임을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춘근과 달리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윤호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몰래 고향에 내려온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는 청춘기의 심장을 자학으로 채우려 한다. 그는 춘근의 졸개를 자처하며 마초 어른 흉내를 내는 춘근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이 어리석은 두 꼬마 마초들을 감싸는 것은 그들만큼 어리석고 무지막지한 시대의 기운이다. 영화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끼어든다.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고향후배들 앞에서 출정 선언 비슷한 걸 하는 춘근의 어느 선배는 서울에 갔다가 별 볼 일 없이 돌아온 후 시골 아낙네들에게 미국 포르노를 영사기로 틀어주며 그래도 예술은 살아있다고 자기기만의 환상을 놓지 않는다. 정석의 에피소드는 더 통렬하다. 춘근과 윤호의 우상인 정석은 그래봤자 삼류 깡패 주제에 주색을 즐기면서 난을 치는 풍류객 놀이에 빠져 있다. 그러나 시골 마을에까지 스며든 정치권력의 세력판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신흥세력에게 린치당하고 꼬마 건달들의 우상 자리에서도 퇴각당한다. 마초들의 퇴행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동들의 극단이 유신 시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공기와 적절하게 부응하는 것은 김영빈 감독 또래 세대의 경험적인 성찰이 배어있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의 지독한 남성중심적 환상이 관철되는 여성의 대상화는 송기원의 원작 소설에도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의 정서를 편벽되게 만드는 결정적 흠집으로 남는다. 남성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어머니이자 창부인 이상향으로서의 여성상을 이 영화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그리워하며 스크린에 현실인 것처럼 구현시킨다. 여자의 자궁 속에서 끝장을 보려는 듯 달려들었다가 결국 그녀들을 파멸시키며 비겁하게 도망치는 남자들을 향해 영화 속의 여성들은 끝내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남성적 환상에로의 퇴행이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 해도 불우한 당대의 시대적 공기를 남성 캐릭터들의 면면과 시골 공간에 배어나게 한 김영빈의 연출력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경력이 짧게 끝난 것을 아쉽게 여기게 한다. 영화 클라이맥스에 펼쳐지는 시골 들판에서의 불놀이 장면은 무엇을, 누구를 겨냥하고 싸워야 할지 조차도 몰랐던 무지한 남성마초들의 모험담의 종착지로 부족할 게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지한 아이들은 불나방처럼 날개짓하다가 헛되게 자기 자신들을 망친다. 어떤 삶이 그들에게 바람직한 형태로 남아있었을까. 그들은 답을 몰랐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같은 관객은 그랬다.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 것은 사필귀정일 수도 있으나 이 영화가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