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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눈부신 하루 - 옴니버스영화 : 보물섬, 엄마 찾아 삼만리, 공항남녀
- 감독
- 김성호, 김종관, 민동현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보물섬>, 모리 유키에, 서영화, 한받, 조희봉, 장우재, 민복기, 최성일, 홍승일, 이석호, 양익준, 서유정, 백인수, 고덕범, 양석훈, 김선엽, <엄마 찾아 삼만리>, 김동영, 정대훈, 최동환, 정형진, 오정세, 조성희, 조련, 이경미, 김성민, 김은석, 엄승환, 홍완택, 김양중, <공항남녀>, 이소연, 시오타 사다하루, 김주령, 김현아, 김형주, 김대욱
비디오 리츄얼
- 감독
- 김윤태
- 제작년도
- 1998
수집자료
조국은 없다 - 탈북자 김용화의 끝없는 유랑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전선은 있다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탈북소년들 중국에 가다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인디스토리 작품목록집 99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소책자
- 보관위치
- —
10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소책자
- 보관위치
- —
<인디스토리 창립 15주년 '인디GO영화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 —
콘텐츠
[영화현장]영화 <걷기왕>과 백승화 그리고 나
이 글은 오는 10월 20일 개봉하는 영화 < 걷기왕 >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일하는 직장은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 제작하는 (주)인디스토리다. 인디스토리는 십 칠년을 한결같이 독립영화, 단편영화와 함께 하고있다. 아무튼. 백승화 감독 첫인상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인디스토리에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의 배급의뢰를 백승화 감독 자신이 했는지 아님 프로듀서가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차저차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배급했다. 난 배급담당이 아니라 백승화 감독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간혹 수염 난 로커가 사무실을 들락거려서 신기하게 바라봤을 뿐. 그 이후에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의 주인공 밴드 중의 하나인 ‘갤럭시 익스프레스’가 미국 투어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백승화 감독이 투어 다큐를 찍고 싶어 했다. 당시 회사에서 제작비를 쏠 정도의 재정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촬영 기간이 짧고 미국투어에 숟가락 하나만 올리면 되는 상황과, 그리고 백승화 감독 본인이 진정한 멀티인이기 때문에 수공업이기는 해도 본인의 힘으로 영화를 완성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사실 제작비가 작게 들어간다는 장점이 가장 컸다.) 감독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 WILD DAYS >를 완성했다. 자잘한 C.G는 물론이고 편집도 거뜬하게 해놓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의 ‘참 영화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본인은 잘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나보다는 능력이 탁월하다. 다큐멘터리 두 편과 한 편의 단편영화(< 지각생들 >(2012)) 경력, 그리고 다재다능함만 있는 감독이 어느 날 불쑥 장편극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긴가민가했다. 시나리오 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 백승화 감독의 학부 전공은 애니메이션이다.) 재능 많은 감독들이 시나리오 앞에서 좌절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백승화 감독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 가지고 온 아이템은 (최종적으로 시나리오 형태로 완성된 게 아니지만) 인천의 쇠락한 볼링장을 배경으로 한 볼링천재 소녀의 이야기인 <데굴데굴 볼링왕>이었다. 인천이니까 < 천하장사 마돈나 >의 느낌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진행이 잘 안 되었다. 시나리오 개발한답시고 백승화 감독과 같이 인천역 부근 크라운 볼링장에서 같이 볼링도 치고, 유엔공원 산책도 하고 월미도에서 회 먹었다. 회사엔 비밀. 지금도 이 시나리오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꼭 한번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해보고 싶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온 아이템이 < 오목소녀 >다. 오목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는 소녀의 이야긴데, 바둑이 아니고 오목이라서 더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보면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오목소녀>를 만지작거렸다.) <오목소녀> 이야기도 끝을 못 보고, 이래저래 고민하던 차에 불쑥 등장한 것이 바로 < 걷기왕 >이었다. 멀미 증후군을 가진 고등학생 만복이가 경보를 한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볼링도 그렇고 오목 그리고 경보라니, ‘마이너’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볼링을 통해, 오목을 통해 경보를 통해 성장해가는 인물들이 주인공들이다. 주변에서 신경도 안 쓰는 마이너한 인생들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좌충우돌. 그 속에서도 “무조건 잘해라”, “일등 해라”가 아니라 “못해도 괜찮아”, “천천히 걸어가도 좋아”. “네가 하고픈 대로 살아도 괜찮아”. 이런 이야기는 인디밴드 출신인 백승화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것 같았다. 감독의 진심이 이럴진대, 사실 내가 거드는 것은 사족들이었고, 온전히 감독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툼한 초고를 놓고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이 인천영상위원회 제작지원 사업이었다. 영화의 주된 공간이 강화도였고, 백승화 감독 본인이 ‘인천의 영화 아들’이란 점을 면접에 내세워서 거금 3,000만원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게 < 걷기왕 > 탄생의 서막과 이후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천영상위원회 관계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실 지원금만으로는 영화를 찍을 수 없었고, 막막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열어준 게 (지금은 사라진 것 같은데) 독립영화제작펀드였다. 이야기하면 알 정도의 독립영화 선수들이 모여서 서울독립영화제 장편프로젝트로 의기투합하여, 독립영화제작사에서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걷기왕> 시나리오로 진행하려는 중 제작펀드가 갑자기 공중 부양했고, <걷기왕>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지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구사일생의 중요한 주인공이 심은경 배우다. 심은경 배우가 <걷기왕>에 출연하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계약서를 보내온 날, 기분 좋게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나 홀로 춤을 췄다는 것도 비밀. 감사합니다. 심은경 배우님. 힐링의 끝자락, 위로고 뭐고 다 필요 없는 세상이지만, < 걷기왕 >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가 닿기를 희망해본다.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지켜주고 온전히 탄생하게 만들어준 이정환 피디, 한상록 피디와 스태프들, 배우들, 관계자들 모두 감사합니다.
[칼럼]멀리 가지는 못하리라
몇 년 전,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 기념 책자 작업에 참여하면서 인터뷰했었던 인디스토리 김화범 팀장은 인디스페이스 개관 직후 한독협을 그만두고 인디스토리로 옮기게 된 배경에 대해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데 멀리도 못 가고 인디스토리’였다면서 웃음을 주고받았었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시간이 벌써 10년 넘게 흘렀다. ‘독립영화’라는 단어와 내가 처음 연결된 것은 2003년의 일이었다. 아니, 2002년이던가? 어쩌다 보니 독립영화의 관객이 되고, 독립영화제에서 일하게 되고, 독립영화협회 사무국원이 되고, 회원이 되고, 조금 더 큰 영화제에서 일하다가 독립영화전용관 프로그래머가 되고, 몇몇 독립영화제의 예심을 보고 프로그램노트를 쓰고, 영화제 기간에는 GV를 진행하고... 이러고 살게 되었다. 중간에 한번, 독립영화와 연관된 모든 게(심지어 사람들도) 싫어져서 전혀 다른 일을 하겠다고, 이른바 업종 전환하겠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인디플러스를 결국 그만둔 작년 5월부터였다. 정말로 전혀 다른 일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 무슨 일을 같이하자고 할 때에도, 당장 생활은 유지해야 하니 잠깐씩 아르바이트 삼아 할 수 있는 일들이야 하긴 했지만, 길게 봐야 하는 일 중에서는 영화에 관한 일은 안 하겠다고 했고, 완전히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을 제안받으면 솔깃했다. 처음엔 그야말로 못 갈 곳이 없을 것 같았고, 절대로 영화, 특히 독립영화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한 이유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서였다. 글이 너무 심각해지거나 독해질 수 있으니 그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신뢰하는,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정도만 말해두는 걸로. 몇 달이 흘렀다. 많은 곳에 지원서를 냈고, 그 중 몇 군데는 면접을 보기도 했다. 주로 영화를 제외한 문화 관련 기관/단체들이었고, 무려 제약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10년에 달하는 영화 관련 경력을 먼저 보았고, 영화제에서 일했던 경험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독립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나도, 안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실상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모두 ‘독립영화로 이걸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운 사람들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결국은 ‘나를 둘러싼 것은 독립영화가 뿜어내는 공기’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오랜 은둔 혹은 칩거를 끝내고 3월 초부터 새로운 곳에 출근하고 있다.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느 국제기구인데, 올봄에 영화제를 시작해 보려고 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영화제 전문가(Expert of Film Festival)' 행세를 하고 있다. 내가 원해서 그러고 있는 건 아니고, 이곳에 영화제에서 일해보기는커녕 관객으로 가본 사람조차 없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되어 버렸다. 5월 하순에 시작될 이 영화제는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틀 것이다. 자국에서 꽤 큰 수익을 낸 상업영화들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독립영화들이다. 게스트도 여러 명 초청한다. 자국 내에서는 물론 인근 국가에까지 잘 알려진 섹시 콘셉트의 인기 여배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초청될 것이다. 영화제를 끝내고 나면 사업을 본격적으로 구상해 볼 생각이다. 영화를, 특히 독립영화를 매개로 하는 수익사업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업종 전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독립영화를 두고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초이스]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1996년, 우연히 기회를 얻어 대구에서 시네마테크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는 새로운 영화에 목말랐던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네마테크를 만들고 활동을 했던 꽃같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시네마테크는 합법적인 활동이 아니었다. 뭐랄까? 영화 문화의 밑거름을 만드는 일임은 분명했지만 음지에 존재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달까?(그래도 그때 활동들은 90년대 한국영화 문화를 더욱 성숙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그러던 97년 가을, 상상도 못한 전갈을 받았다. 정성일 평론가와 김홍준 감독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던 서울단편영화제가 4회째를 맞아 전국 각지에서 고군툰투하는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을 초청해 영화제의 특별상의 심사를 맡기겠단다, 이름하야 `젊은 시네마테크상`. 삼성영상사업단이 주최한 서울단편영화제는 1회 최우수상 수상자 임순례 감독을 시작으로 새로운 감각의 영화인들을 발굴해냈던 당대 최고의 영화제였고, 4회 영화제에는 영화광들의 큰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김기영 감독님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왕가위 감독 등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큰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영화제에서 심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다. 뭐랄까, 음지에서 양지로 초대받는 듯한 그런 느낌. 시청 앞 삼성생명 건물에 있던 `전설의` 씨넥스에서 개최된 4회 서울단편영화제의 경쟁작품들은 정말 굉장했다. 이제는 유명 감독들이 된 송일곤 , 정윤철 , 오점균 , 김지훈 , 윤종찬 , 김태용 , 민규동 , 고 조은령 등의 단편영화들이 한꺼번에 상영되었으니 오죽 했겠는가? 송일곤 감독의 < 간과 감자 >, 정윤철 감독의 < 기념촬영 >이 공동으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오점균 감독의 < 초촌면 신암리 >가 우수작품상을, 고인이 된 조은령 감독의 < 스케이트 >가 예술공헌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심사에 참여했던 `젊은 시네마테크상`의 수상작은 <기념촬영>이었다. 하지만, 영화제 내내 가장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김정구 감독의 <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가 아니었나 싶다. 10분에 불과한 이 영화는 당시의 어떤 한국 (독립)영화와도 비교하기 힘든 파격적인 작품으로 영화제 내내 화제를 모았다. `자식 키우기`, `부쩍 커버린 아이`, `두 어른`, `어린 엄마 늙은 자식`, 이렇게 4개의 장으로로 구성된 <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는 한정된 공간에서 엄마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애인만 등장하고, 대사도 없는 꽤나 간결한 영화였다. 하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함의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영화는 제목대로 `모성애`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름답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의 사랑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엄마는 이런 아들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아들은 더더욱 엄마를 무시한다. 결국 엄마는 자해라는 방법을 동원해 아들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리고 아들은 엄마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을 거부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칼을 들고 자해까지 하며 사랑을 갈구하고, 그제서야 아들은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내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영화는 광각렌즈를 적극 활용해 기괴하고 일그러진 이미지들을 만들어내었지만, 반면 음악은 각 장마다 `미뉴에트`, `어머니와 고등어`, `물망초` 등 잔잔하고 애잔한 곡들로 선곡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었다. 이런 이질감을 통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금기시 되었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파격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영화 내내 텔레비전에서는 포르노가 그대로 노출되고(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씨넥스의 대형 스크린에 영사되는 포르노 이미지!), 아들과 아들의 애인의 성기도 은근히 노출되며(게다가 둘 다 남자! 동성애?), 급기야 엄마는 다 큰 아들 앞에서 상반신을 탈의하는 까지 부도덕한 상황까지 등장한다. 당시에는 영화관에서 이런 장면들을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생경한 경험이었기에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흘렀던 처철한 기타맨이 처절하게 부르는 오리지널 곡 `날 내버려둬`와 엔딩 크레딧 마지막에 등장한 [지하창작집단 '파적']이라는 생경한 제작단체 이름까지 영화는 파격, 그대로 였다. (실제로 지하창작집단 '파적'이라는 크레딧이 뜰 때, 관객의 탄성을 내질렀다!) 김정구 감독의 <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는 논란의 영화였지만, 결국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도 이 작품의 파격과 도발에 동의하고 지지했단 뜻이리라. 요즘도 가끔 이 영화를 생각할 때 마다 `젊은 시네마테크상`을 선정할 때 이 영화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젊은`이라는 수식어에 맞게 파격적인 영화를 지지했으면 더 폼 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 비록 상을 주며 지지를 표명하진 못했지만,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는 그 이후 15년간 '내 인생의 독립영화'가 되었다. 여전히 기존의 표현과 상상력을 넘어서는 도발적인 영화들은 독립영화 일을 계속하게 했던 크나큰 동력이었다. 독립영화야 말로 상상력과 창의력의 장이자, 영화를 혁신해내는 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현해내는 영화들, 그런 영화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사족] 당시 서울단편영화제 수상작들은 삼성의 케이블채널인 캐치원 등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포르노가 등장하는 등 당시의 사회 정서에 부합하지 못한 관계로 방영되지 못했고 수상작 비디오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말 독립영화배급사 인디스토리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자사 배급 작품 중 베스트 10을 선정하여 발매한 [인디스토리의 10주년 기념 DVD]에 수록되며 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