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잔혹사] 주간시트콤 6화-인턴's life
- 제작년도
- 2010
최근 OTT 드라마 <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와 JTBC의 <전체관람가+: 숏버스터>의 한 에피소드인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2022)와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 말이야 바른 말이지 >(2022) 등으로 부쩍 바빠 보이지만, 윤성호 감독의 다산성은 동시대 그 어떤 크리에이터에 뒤지지 않는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단편영화로 시작한 그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성 가득 한 작품을 거쳐 장편영화를 경유한 후 웹드라마라는 형식을 개척하더니 지상파와 케이블과 OTT에 이르렀다. 20여 년 동안 20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과 15편의 드라마를 만든 숨가쁜 시간! 여기서 쉼터 같은 작품이 하나 있다면, 바로 < 도약선생 >(2011)이다. 이 자유분방한 영화는 놀랍게도(!) 문화체육관광부와 아리랑TV가 제공하는 공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도시를 알리기 위한 시리즈 중 한 편이었다. 윤성호 감독은 대구를 배경으로 <도약선생>을 만들었고, 윤태용 감독은 서울을 배경으로 < 서울 >을, 배창호 감독은 제주에서 < 여행 >을, 김성호 감독은 부산에서 < 그녀에게 >를, 전계수 감독은 춘천에서 < 뭘 또 그렇게까지 >를, 진광교 감독은 여수에서 < 려수 >를, 문승욱 감독은 인천에서 < 시티 오브 크레인 >을 연출했다. 65분이라는 애매한 러닝타임을 지닌, 스포츠 예능을 풍자하고 있는 건지 스포츠 영화를 조금 독특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이 영화는 20세기까진 한국영화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취향의 B 무비였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면서 만든 단편 < 졸업영화 >(2006)로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하고 첫 장편 < 은하해방전선 >(2007)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던 윤성호 감독은 이후 단편으론 ‘두근두근’ 시리즈를, 웹드라마로는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를 내놓으며 왕성한 30대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안 하나를 받는다. 아리랑 TV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시리즈는 각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프로젝트였다. 그의 도시는 순천. 윤성호 감독은 순천 송광사에 미국의 흑인 래퍼가 힐링 하러 온 이야기인 <소울>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때 갑자기 제작사에서 도시를 바꾸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에서 영화를 찍으면 제작 지원과 현물 협찬이 들어온다는 제안이었고, 윤성호 감독은 받아들인다. 처음 기획한 제목은 ‘육상소녀’였다. 의도는 진지했다. 육상을 빙자해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원래 들어오기로 한 제작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그래서 장면들을 빼기 시작했고, 몇몇 장면들은 즉흥적인 예능처럼 찍었다. 엔딩에서 영화를 황급하게 닫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고, 러닝타임은 한 시간을 조금 넘기는 65분이 되었다. 제목은 <도약선생>. 주인공은 윤성호의 페르소나인 박혁권, 당시 웹드라마로 인연을 맺은 걸그룹 밀크 출신의 박재영(본명 박희본), 그리고 처음 함께 작업하는 나수윤이었다. 우정 역의 이우정과 원식 역의 나수윤. 이우정은 윤성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은하해방전선>부터 시작해 총 10편의 윤성호 감독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2008년부터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고 2020년엔 첫 장편 < 최선의 삶 >을 내놓았다. 나수윤은 <도약선생>에서 윤성호 감독과 처음 만나, 이후 여러 편의 웹드라마에서 함께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동성 친구인 우정(이우정)과 원식(나수윤). 남친이 생긴 우정은 대구에서 서울로 떠나게 되고, 원식은 매달린다. 우정은 원식에게 “뭔가를 보여 줘. 크고 높고 늠름한 걸”이라고 말하고, 원식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영록 코치(박혁권)에게 장대높이뛰기를 배운다. 여기에 재영(박재영)이 합류하고, 그들은 다양한 트레이닝을 통해 조금씩 도약한다. <도약선생>은 윤성호 감독의 단편과 웹드라마를 꾸준히 ‘복용’해온 관객에겐 익숙하지만, 그의 영화 문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꽤 난해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낯선 가장 큰 이유는 ‘생뚱맞음’이다. 이것은 윤성호 감독의 클리셰이자 유머 감각인데, 그 핵심은 ‘서사의 실험’이다. 파괴까지는 아니지만, 윤성호의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의 구성과 사뭇 다르다. 느슨한 챕터 구성인 <도약선생>은 한 국면이 넘어갈 때마다, “원식, 불심검문에 걸리다” “코치님은 채식주의다”라는 식으로 쨍한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의 화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다중 시점 서사는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론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걸 교란시킨다. 여러 명의 화자들은 때론 장면을 멈추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영화라는 장치’를 드러내는 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전반부를 대표하는 방식이었다. (왼쪽 사진) 윤성호 감독의 작품엔 종종 동료 감독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육상 체험장의 사회자는 최근 < 잔고 : 분노의 적자 >를 내놓은 한국 B 무비의 스페셜리스트 백승기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도약선생>은 배우 김종수의 초기작 중 한 편이다. 그는 대구스타디움 관리인으로 출연한다. 원래 썼던 시나리오가 어떤 완결성을 지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축약’된 <도약선생>에서 또 하나의 포인트는, 툭툭 끊기고 난데없으며 즉흥적인 톤이 주는 묘한 아우라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기록과 연습 방식과는 상이함”을 경고했듯, <도약선생>에서 전영록 코치(내내 가수 전영록의 잠자리 안경을 쓰고 나오는)의 트레이닝 방법은 독특하다. 기본적인 러닝에서 시작해 요가를 경유해 평행봉과 점핑을 거쳐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시 쓰기 수업까지 이어진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순전히 우발적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과정을 장대높이뛰기를 위한 트레이닝 커리큘럼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서사 구조를 따르는 듯하면서 그 내용은 예능과 다름없는, 변칙적 서사 전개다. 재밌는 대목은 실제로 대구 육상 스타디움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잔디에 들어간 죄로 관리인(김종수)에게 야단을 맡는 전영록과 선수들 앞에 갑자기 전영록의 군대 후임이었던 김 병장이 등장하고, 여러 후임들이 합세한 갑작스런 술자리가 이어지며, 그들은 군대 시절을 회상하고, 갑자기 모두 일어나 소주병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고삐 풀린 서사 전개는, 갑작스레 장대높이뛰기가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바꾸는 스포츠라는 대사가 등장함으로써 의외의 방식으로 봉합된다. (왼쪽 사진)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 장대높이뛰기를 요약하는 이 영화의 모토다. 소주병을 잡고 있는 사람은 < 장례식의 멤버 >(2009)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얼굴에 붕대를 감고 연을 날리고 있는 전영록. 그의 모습 위로 노래 ‘도약은 패턴’이 흐른다. 이처럼 <도약선생>은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영화적 서사’라는 것을 뒤흔들고, 그러면서도 정말 신기하게도 소정의 기승전결을 갖추며 전진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작스레 “우연히도 결전의 날”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절정에 다다르고, 갑작스런 이사를 하는 우정 앞에, 원식 역시 갑작스레 대미를 장식한다. “애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건지,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서 애정을 길어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쩌면 영화 전체의 전반적인 주객 전도 상황을 요약하는 듯하며, 역시 갑작스레 전영록이 지니고 있던 치명적 문제가 폭로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샹송 톤의 주제가 ‘도약은 패턴’이 흐르면서 영화를 닫는다. 여기서 윤성호 감독이 직접 쓴 가사는 음미할 만하다. “도약, 슬픈 믿음의 도약/약도, 약도를 들고 도착/도착, 제 시간에 도착/아아 그러나 나는 성도착/애착, 가쁜 착오들의 고착”으로 시작되는 가사는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이렇게 마무리된다. “패턴, 자기만의 패턴/아니 어쩌면 자기 기만의 패턴/유턴, 너를 목격하고 유턴/아니 어쩌면 너에게로 돌아가는 P턴/그렇게 나는 아직 인턴, 너에게 훌쩍/뛰었다 착지하는 나는 영원한 인턴/랜턴, 너는 나를 비추는 랜턴/윈스턴, 피아노는 역시 조지 윈스턴/볼턴, 이청용이 있는 볼턴/워싱턴, 오바마가 사는 워싱턴.” 한국영화의 삽입곡 중, 이토록 중독성 있는 라임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격조 있는 대미다.
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 아워 바디 >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대학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좁은 방에 갇혀 고시에만 매달려온 자영(최희서)은 더 이상 공부도 시험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온 심신은 목표가 사라지자 갈 곳을 잃는다. 그야말로 소진(burn-out)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아워 바디>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소진은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어떤 정해진 그릇이 있어 그 안의 내용물이 비워지고 다시 채우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소진된 자영은 아예 존재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자영은 생동감과 활기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전진하는 다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팔, 현주를 뒤쫓는 눈, 그리고 현주의 기를 받는 내장감각까지 그렇게 자영의 심신은 하나 둘 다시 생성된다. 영화는 분절된 신체의 클로즈업과 그 부분-신체들을 쫓는 주관적 시점들을 통해 존재 감각이 통일된 전체의 방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생성됨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각기 자기 용도를 처음 발견한 부분-신체들이다. 고시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몸을 인지하고 이질적인 에너지를 가진 타인과 조우하며 자영도 소진된 심신을 다시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복잡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자영이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영의 심신이 단일한 목표만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목표가 사라지면 그에 종속된 심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목표마저 자기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엄마와 전 애인은 ‘사람구실’이라는 말로 그녀의 욕망을 가두려 한다. 정규직 혹은 공무원 같은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는 이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실패로 낙인찍히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뽑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빈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 리스트에 올리는 바람에 올해 리스트에서는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들의 올해 리스트엔 여전히 이 영화가 있다! 아, 다들 무시하고 버텼나보다.) 더 아쉬운 영화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사아마, 2019)이다. 영상자료원이 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감일이 11월 8일.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11월 9일. 어쩔 수가 있나. 안 본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일단 올해는 한국 영화를 많이 넣었다. < 우리집 >, < 아워 바디 > 그리고 < 벌새 >(!)는 올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았던 영화들이다. 봉준호 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흉악하게 재미있는 작품일 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 더 페이버릿 >도 만만치 않다. 극도로 개인적이고 거의 기이하기까지 한 특별한 개인사를 냉전시대 역사로 보편화시킨 심술궂은 영화 < 콜드 워 >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와 < 체르노빌 >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매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경계선 >, < 어스 >, < 미드소마 >는 판타지와 호러 영역에 속하는데, 여기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린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 한가람 , 2019) 이야기를 하자. 이 영화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였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굉장히 심술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 대부분은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설정만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포기해버린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바탕을 둔 생활 체육 홍보 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전해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안 간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도 원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 기껏해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과 질병은 분명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뭔지 어떻게 아는가? 군인과 검투사의 나라에 살았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워 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관점을 충실하게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게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의 고시 생활 중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이 두 영화를 비교했었다. 다행히도 자영은 그 방향으로는 안 간다. 덜 뒤틀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내는 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워 바디>는 현주, 정확히 말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단지 그 욕망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이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거 같다. 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 바디>가 멀쩡하고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그게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워 바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영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선망으로 정의하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다. 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영에게 불건강한 죄의식을 제공해주기엔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정말 드물게 다가간 ‘여자친구’였다. 현주는 남의 시선을 받기 싫어 한동안 런닝 머신만 뛰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든 ‘여자친구’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들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워 바디>가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역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이성애자여도 상대방과 자신의 몸을 사랑하며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 바디>의 작은 세계에서 이성애는 모든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그러고보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멀쩡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눈 사람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생각난다. <아워 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섹스는 매력적인 구석이 단 하나도 없고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마지막 섹스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죽음 이후 달리기 모임의 남자와 한 섹스는 남자의 자기 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상사인 중년 남자와 나눈 섹스는 문장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품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들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와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 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마지막 섹스에서 영화는 이 상황이 얼마나 불쾌한지 인식하게 하는 뜻밖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성애 섹스가 지겨울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애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보다보면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는데 이성애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질겁하는 마지막 섹스는 따지고 보면 자영이 할 수 있는 가장 동성애에 가까운 섹스이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대신 실천한 것이니까.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정말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뒤늦게 참회하며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몇 의미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어쩔 수 없지. 우리의 몸과 정신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욕망은 결코 온전하게 납득이 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아워 바디>는 엄청나게 심술궂다. 종종 심술궂기로는 만만치 않은 <기생충>을 능가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 주인공과 관객의 욕망은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으며 이들이 가는 길은 최악의 모양으로 배배 꼬여있다. 정말로 성격 안 좋은 이야기꾼이 킬킬 웃으면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아워 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처음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