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당착
- 감독
- 김곡, 김선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왕눈이, 표상우, 송연수, 성원, Vasiliy Bolonkin, 서원중, 정아영
한국영화의 지난 2년간 관객 2억 명을 돌파하고 자국영화의 점유율이 50%를 넘어서며 제2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뒤지지 않은 영화시장, 불과 30여 년을 돌아보았을 때, 지금의 상황은 한강의 기적에 비견된다. 그러나 화려한 성취 이면에 대기업이 주도하는 영화산업은 심각한 시장 불균형에 놓여있다. 수직계열화와 독과점에 따른 병폐에 중지를 모아야 할 때, 영화계는 최근 또 다른 난처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관료적 개입이다. 이러한 징후들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난 정부 독립영화를 둘러싼 퇴행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민간단체들은 자립성을 세우며 이를 돌파해 왔다. 이러한 자율적 흐름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로 이어져 갔다. 민간과 정부는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며 영화문화의 로드맵을 그려 나갈 때였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가두고 있는가.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몇몇 작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천안함 프로젝트 > < 다이빙 벨 > <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 등등, 유령처럼 배회하던 어떤 힘들이 몇몇 영화에 대한 구체적으로 노골적인 탄압을 통해 실체화되는 듯하다. 지극히 합당하고 상식적인 제도와 규칙 속에 충분히 가능했던 것들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보편타당했던 시스템이 관료 체계 속에서 일그러지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2015년 접어들면서 영화계가 겪는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빈곤을 반영하고 있다. ‘지원하니, 간섭하겠다’는 낡은 논리와 으름장의 향연! 부산시의 부산국제영화제 운영 개입, 영화진흥위원회 심의면제추천 개선 의지에 따른 일부 영화들의 상영보류, 예술영화전용관과 다양성영화개봉지원 사업에 대한 석연찮은 움직임. 각각 개별적인 로드맵에 따랐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간명하게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영화 표현의 자유! 영화단체들은 일련의 사태를 근심하며 즉각적인 입장을 밝히고 연대하고 있다. 50여 개 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 영화인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존경받는 원로영화인에서부터 현장의 젊은 영화인까지, 영화제작사와 영화단체, 영화제를 포괄하는 대책위는 영화에 있어 표현의 자유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불어 한편으론 현명하고 합리적으로 영화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귀한 에너지가 길바닥에 뿌려지는 것이 못내 울화통이 들지만, 한결같은 영화인들의 단호한 태도는 표현의 자유 없는 영화의 신체를 부여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네마로써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있는 유기체이다. 한국영화 역시 영혼이 표류하던 보잘것없는 신체를 가졌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오늘 우리 영화의 정신과 신체는 어떠할까?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미래 쇄신안을 논의하기 위한 공청회에 임권택 감독이 참석했다. 딱딱한 공간에 선뜻 어울리지 않는 노장은 자신이 무슨 정책을 얘기 하겠냐며, 그저 거들러 나왔다고 말을 시작했다. 과거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해외에 갔을 때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나라의 영화 예술가로서 꽤나 주눅 들어 내내 구석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80년대를 기억하시는 듯했다. 이어 그는 현재와 같은 한국영화의 위상은 부산국제영화제로부터 비롯되었다며 후배들을 옹호하고 지지하였다. 102편의 영화를 연출한 거장의 소박한 말씀에 인간적인 존경의 마음이 먼저 일었다. 그 자신은 더 혹독한 예술의 시대를 통과했을 터인데, 시대를 온몸으로 체현한 그의 말에 무게를 두고두고 생각했다. 지난 1월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는 < 앙리 랑글루아의 유령 >을 상영했다. 시네마테크 운동의 대부 앙리 랑글루아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이었다. 210분간의 시간 동안 나치의 눈을 피해 지켜낸 영화들, 누벨바그의 친구들, 시네마테크 관장 해임 파문과 이에 맞섰던 거대한 저항들, 이후 죽기까지 그의 영화적 행보가 펼쳐졌다. 랑글루아 해임 건은 결국 유럽 전역을 흔든 68혁명으로 이어졌고, 전 세계 영화인들의 지지와 연대 가운데 앙리 랑글루와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로 복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 앙리 말로에 의해 주도되었던 랑글루아의 해임은 영화 수집가와 프로그래머로서의 그의 자질을 애써 무시하고 정부 지원금의 사용과 행정의 서투름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었다는 것. 기세에 눌려 그를 복귀시킨 대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대한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였다는 것. 그로 인해 시네마테크는 어려움에 처했고 랑글루아는 강의와 번외 활동을 통해 힘겹게 공간을 지켰다는 것. 세계적인 영화문화의 자산을 가진 나라치곤 유치한 과거사이다. 문화선진국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 역시 꾸준히 영화의 역사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한국영화의 오늘도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지금의 과정이 미래에 부디 뼈아픈 과오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어서 빨리 현장으로 새로운 작품과 사투를 벌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자유의 스크린을 통해 투사되어야만 한다. 누가 이것을 가로막으려 하는가!
사실 등급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참으로 지겨운 일이다. 나는 2002년 2기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 죽어도 좋아 >의 제한상영가 판정에 항의해서 사퇴한 바가 있고, 그 이후 꾸준히 표현의 자유와 영등위의 개혁을 위해 싸우고 노력했다. 그런데 10년도 더 지난 지금 영등위는 당시보다 한참을 후퇴했고, 영화 표현의 자유는 제약받고 있으며, 관객의 볼 권리는 침해당하고 있다. 오히려 일베 사이트에서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리고 있지 않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화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와 유해 영화로부터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와 논리가 더 높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심한 자괴감이 든다. 두 번의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 뫼비우스 >의 찬반시사가 있었다. 상영에 앞서 제작진은 성인이 영화를 봐도 된다고 생각하면 ○표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표를 주는 투표용지를 나눠 주었다. 나눠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민망할 수밖에 없는 고육지책의 이벤트였다. 이런 사태를 만든 것은 영등위이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아니고, 영화를 보고 ○, ×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그 자리에 모인 영화비평가들과 감독, 피디를 포함한 영화관계자 역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투표 결과는 87%가 성인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라고 답했다. 혹시 만장일치가 나올까봐 나라도 반대표를 던져야 하나 잠깐 고민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던진 찬성표는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힘주어 말하지만 영화를 볼 수 없게 하는 제한상영가 등급은 없애야 한다.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남발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제한상영관도 없지 않은가? 영등위는 제한상영관이 없는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하지만, 제한상영가 등급을 주지 않는다면 애초에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 뫼비우스 >와 < 자가당착 >은 영등위로부터 연이어 2번에 걸쳐 제한상영가를 받았다. 이런 등급심의 절차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한 기관에서 내린 결정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했는데, 같은 기관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다시 심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재심을 청구할 경우 영화 제작자와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영등위가 원하는 방향으로 삭제하고 심의를 받게 된다. <뫼비우스>는 재심을 청구하면서 자진 삭제를 했고, 세 번째 심의를 청구하면서도 일부 장면을 삭제했다고 한다. 아마도 <뫼비우스>는 곧 관객이 볼 수 있겠지만, 만신창이처럼 삭제된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자가당착>은 영화를 삭제하지 않고, 무수한 손해를 감수하면서 영등위와의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언제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등급 결정에 불복할 경우 더구나 그것이 상영금지에 해당하는 경우라면, 한번 심의를 했던 같은 기관이 아닌 다른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다. 영등위는 지금까지 이런 부분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합리적인 심의절차를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독일은 상영금지 처분이 있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상영금지가 내려지지 않았다. 금지를 시킬 경우에도 같은 기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상위기관에서 다각도의 논의 속에 결정된다. 영상물이 상영될 권리와 관객의 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흔한 해외 사례를 드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 자가당착 >은 일본에서 중고생 관람가로 개봉했고, < 홀리모터스 >(편집자 주: <홀리모터스>는 남성의 발기한 성기가 노출된다는 이유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결국 블러 처리하여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다.)는 프랑스에서 전체관람가에 해당하는 U등급을 영국에서는 18세 관람 등급을 호주에서는 15세 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만이 온전히 영화를 개봉할 수 없는 등급을 받았다. < 뫼비우스 >는 국내 개봉 전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상영을 앞두고 있다. 유독 한국에서만 온전히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예술영화관에서만이라도 제한상영가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제한상영가가 상영금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미봉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당장의 사회적 논란은 피해갈 수 있겠지만, 와이드 릴리즈를 목표로 하는 영화는 18세관람가를 받기 위해 또다시 자진삭제를 하게 될 것이다. 현 등급제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영화인들의 지난한 싸움의 결과이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첫 번째, 제한상영가 등급을 없애는 것이다. 도대체 성인들이 귀중한 시간을 내고 자기 돈을 들여 보지 못한 영화란 무엇이란 말인가? 혹여 포르노그래피가 상영되면 어쩌냐는 우려는, 현재의 극장 시스템이 멀티플렉스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무엇이 포르노이고 그것을 상영 금지해야 하는지는 또 다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현재의 등급 체제에서 제한상영가를 내리지 않으면 된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최근 제한상영가를 받은 < 자가당착 > < 뫼비우스 > < 홀리모터스 > 같은 영화들은 제한상영가에 어울리지 않는 영화들이다. 혹 제한상영가가 내려지면, 영등위가 아닌 제3의 기구에서 판단을 내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영등위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세 번째, 영등위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심의를 민간자율로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영등위 위원들을 임명하고, 위원회에서 등급분류위원을 임명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비대한 조직과 불필요한 논란을 지속적으로 야기시켜왔다.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민간자율기구를 만들어 온전한 등급 서비스와 청소년을 위한 페어런츠 가이드(Parents Guide)를 제시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10년이 지속된 현 등급 체계가 끊이지 않는 논란을 제공하고 있기에 영화인들이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민간자율기구가 필요하다. 이런 부분들은 영등위가 지속되는 등급논란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연구하고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방어적이며 보수적인 논리로 조직의 유지에만 힘을 기울여 왔다. 앞으로 영화인들이 힘을 모아 영화 표현의 자유를 확고히 하고, 관객의 자발적 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추진해야 나아가야 할 과제이다. < 뫼비우스 > 사건과 관련해 영화감독조합은 영등위 위원장의 퇴진도 불사하는 투쟁을 시작했고, 장기적으로 민간 자율 심의를 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표현의 자유 문제는 독립영화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고, 법적 투쟁으로 제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 제한상영가를 없애는 문제. 나아가 민간자율심의기구를 만드는 문제는 독립영화인들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견을 조율하고 기구를 운영할 수 있는 방안과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빨리 논의 테이블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제안한 내용이 만병통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등급 시스템은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현실정치를 풍자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 <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 타이틀만으로 영화는 어쩌면 제 몫을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지경도 정도를 넘어선지 오래인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가 얽혀 매일 웃지 못 할 코메디를 만들어 내는 세상, 정말이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는 2008년 제작된 단편 <자가당착>의 장편버전으로 영화의 톤과 스타일은 유사하나, 전혀 다른 주인공의 대한민국 생존기이다. 정치적 레토릭으로 가득 찬 영화는 쌍둥이형제 곡사( 김선 , 김곡 )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서사와 난해하고 실험적인 표현들로 관객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웃음 짓게도 한다. 제 멋대로 이어지는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에서 대한민국과 관객들은 쥐락펴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단편버전 <자가당착>에서 왕눈이 마네킹이 호연을 펼쳤다면, 이번에 큰 눈망울을 자랑하는 공공의 귀염둥이 포돌이가 주인공이다. 딱딱한 공인의 이미지는 풍자를 통해 어떻게 해체 될 수 있을까. 그 끝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 <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포돌이는 귀엽기 그지없다. (물론, 포돌이의 성적 유희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은 여성들이 보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있다.) 대한민국 지구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포돌이는 하반신이 없다. 필연적으로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포돌이는 하반신을 얻어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러나 삶은 녹록치 않은 법, 쥐떼들이 그의 꿈과 희망을 갉아 먹는다. 이제 포돌이는 그의 아파트에서 악의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일대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그것은 단언컨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조악하고 난삽할 것이다. 또한 단단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엄숙한 주제를 조롱하는 곡사의 통제 불가능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어쩌면 당신의 정숙한 영화관이 붕괴될 수도 있을 터이다. 16mm필름의 거친 질감, 현실계의 어지러운 이미지 콜라쥬, 핸드메이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이합집산, 거침없는 액션과 포돌이 가정의 미스터리, 여기에 판타지와 멜로까지 가미 되었으니, 이야 말로 초호화 버라이어티 무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영화의 영화적 불순함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대한민국 성인남녀도 볼 수 없는 영화이니 지정된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하라는, 일종의 영화적 감금상태이다. 영화계는 곧바로 이에 항의하였고, 영화의 제작사인 곡사는 행정소송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운명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까? 며칠 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 결과가 나오자, SNS에서 이 영화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가당착 어떡해...’ 등의 슬픈 위로로 기억된다. 정치적 코메디가 계속되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가 아닐 런지. 관객이 그 영화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여나 부차적인 상처로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가 지금도 여전히 목도하고 있는 지구, 대한민국, 어느 곳의 씁쓸한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