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뫼산과 마고할미
- 감독
- 한지형
- 제작년도
- 2017
드러난 물질성 핀 스크린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있다. 정확히는 그런 기법이 있었다. 수많은 핀들을 꽂아서 만든 캔버스에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핀을 눌려 일종의 자국을 만들고, 거기에 적당한 조명을 쏘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인간 손의 흔적을 빛이 그린 그림자로 완성하는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기법)이 있었다.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던 핀 스크린의 마법은 많은 부분이 핀들과 핀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빛과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대상, 즉 물질의 표면이었다. 이런 걸 ‘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에서 물성이라는 것은 사실 모더니즘 시대를 풍미했던 구태의연한 논의였다. 이미 예술은 개념으로 전환으로 물질성을 넘어서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 물질적 속성이라는 것이 결국 예술 장르의 구분 짓기라는 점, 또는 예술 표현 수단의 가장 작은 단위(예를 들어 점, 선, 면, 색채 등)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예술의 테제, 또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셀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모든 이미지가 대상을 추상화하여 그려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대상 자체의 직접적인 물질성을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셀 애니메이션에서의 이미지는 그려진 ‘평면’ 이라는 물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에 더욱 방점을 두어야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의 경우 제작 방식에 있어서는 이미지를 적층시켜 환영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물질성이 드러나지만, 그것이 서사나 플롯 구성에서 잘 드러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보자면, 전통적인 실사영화도 마찬가지다. 분명 실사영화도 카메라는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물질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그것이 문학적 서사 내부에 들어오면서 물질성은 증발되고 캐릭터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이든, 실사영화든 극영화의 영역에서는 대상의 물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법과 양식에 대한 분류에 ‘오브제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대부분의 발전적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찰흙(클레이), 돌무더기, 심지어는 동물 사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질들이 애니메이션의 오브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때 많은 작품들의 성격이나 테제는 이 오브제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예컨대, 오브제로서 클레이는 비정형적이고 플라스마 적 물성, 돌이나 금속은 강인함과 거친 물성, 종이는 평면과 구겨짐과 같은 물성을 이용한다. 때문에 발전적 애니메이션에서의 오브제의 물질성은 작품 내에서 잘 봉합되고, 숨겨지고 감추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작품이 드러내는 속성들은 서사보다는 이미지를, 캐릭터보다는 오브제와 대상의 물질성을, 이음매 없는 유려함보다는 봉합의 흔적을 드러냄을 중요시하게 된다. < 사슴꽃 >도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사슴꽃 > 이음매 없음과 봉합 김강민 감독의 < 사슴꽃 >은 전작 단편 작품인 < 38-39°C >와 동일한 스톱모션 작품으로, 전작에서 쌓아 올린 이미지의 병렬세계를 더욱 견고하고 농밀하게 작업하였다. 예를 들면, 두 작품은 모두 과거의 한 단편적 기억으로부터 직조되었는데, 전작은 과거 한 지점의 목욕탕에서 아버지와의 기억을 소환하였다면, <사슴꽃>은 한 소년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소위 ‘보양식’의 최초 흡혈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여기서 대체로 기억을 구축하고, 구술하는 순간에 등장하는 독특한 이미지들의 나열은 각 작품들의 중심이미지라 할 수 있다. 특히 두 작품 모두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 일종의 마음의 변화, 즉 정동(情動, affect)의 순간과, 이때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병렬은 주로 평면과 입체, 빛, 추상적 이미지들이 교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일군의 성장담, 또는 오이디푸스 과정처럼 보이는 이 두 작품들이 스톱모션(발전적 애니메이션)의 입체 공간에 형이상학적인 평면 이미지들을 교차시켜 그 자체가 주요한 표현 수단으로 된 것이다. 이 두 작품이 실험 영화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예의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사슴꽃 >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전작의 컷 아웃 방식의 평면이 아닌 입체의 모양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이 3D 프린터를 이용해 출력된 것임을 쉽게 알아챈다. 표면들은 정리되지 않고 적층된 플라스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각의 표면의 ‘결’들은 그곳에 떨어진 조명을 표면에 의해 여러 층위로 난반사 한다. 요즘의 3D 프린터들이 첨단(cutting edge)의 느낌을 위해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려는 노력이 무상하게 말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표면들에 거칠게 드러나는 이음매들의 등장이다. 많은 부품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캐릭터들은 각진 표면에 수채화로 그려진 종이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들이 겹합된 부분은 여전히 여백으로 남아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이나, 디지털 영화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실재와 구분이 되지 않게 이음매를 지우고 매끈한 형태로 만들어,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을 추구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만들어진 대상’임을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봉합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들 봉합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좋은 예술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음매 없이 만들어져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천의무봉은 대상의 본질을 지움으로써 그 자체로 은폐한다. 하지만 이음매를 드러내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예컨대, 이음매가 드러난 곰 인형은 천과 솜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아는 것처럼 대상의 이전 상태를 드러낼 수 있다. 영화가 봉합을 하지 않고 이음매를 드러내면 영화가 기인하고 있는 현실 세계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대상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면서 대상의 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지닌 강점이다. 이는 대상이 어떤 상태로 그려지는가에 문제이기도 하면서 작품이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스톱모션/오브제 애니메이션은 생명이 없는 사물의 움직임, 움직이고 있는 죽음(좀비/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특성 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죽은 사물이 등장하는 곳에서 이음매를 드러낸 사물들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애니메이션 이전의 상태, 즉 사물의 움직임 이전의 움직임인 애니메이터의 존재 또는 애니메이터의 손과 만나는 것이다. 물질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각들, ‘결’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잘 봉합된 CG의 매끈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들, 삐뚤삐뚤 그려진 이미지와 지문이 남겨진 클레이, 실재 광원에서 떨어지는 빛, 먼지들의 가라앉은 작은 세트에서 묘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이음매들이 주는 존재의 함성과 결, 즉 작가의 손과 퍼포먼스 때문일 것이다. * 작품링크 : https://vimeo.com/219692884
너와 나는 틀리다. 아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종종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해서 쓴다. 사전적인 차이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언어는 일종의 습관이자 무의식이다. 대수롭지 않게 쓰는 말에도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려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슬프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상대와의 차이를 인식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데 서툴다. 차이를 발견하면 생긴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열 관계를 설정하고 줄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허범욱 감독의 < 창백한 얼굴들 >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이러한 배척과 폭력의 양상을 포착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무채색인 가상의 행성이 있다. 다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 민재는 노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런 민재를 괴물이라 말하며 두려워한다. 민재의 부모는 그런 민재를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으로부터 민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리하고 감추기 위해서다. 부모는 저주 받은 존재가 태어났다며 끊임없이 민재를 원망하고 민재는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욕설과 폭언, 그리고 폭력을 양분 삼아 자란다. 세상과 격리된 지 어느덧 15년, 드디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민재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고자 애쓴다. 자신의 색을 지우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고, 끝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탈출하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 창백한 얼굴들 >의 설정과 표현은 그 자체로 효과적이고 직관적인 메타포다. 무채색의 세계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그러진 사회의 은유다. 감독은 그 안에서 (관객의 관점에선 유일하게 정상인) 민재가 어떻게 일그러져 가는지 관찰한다. 민재를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판타지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자 감독의 겪은 경험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집단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존재를 틀린 것으로 격하시키고 폭력을 통해 서열을 잡으려는 자들의 초상이 영화 전반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같은 상징과 전개가 때로는 지나칠 만큼 도식적이라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름을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틀린 세계, 폭력으로 이를 거부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과 이를 대물림 하는 부모. 조건이 이 정도로 짜여 있다면 사건이 파국으로 나아가는 게 필연이다. 파국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우리는 대개 파국의 순간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의 과정은 기억하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잔혹함, 황망함에 눈길을 빼앗겨 본질을 잊어버리는 사례는 지금도 흔하다. 허범욱 감독은 적어도 이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 창백한 얼굴들 >은 밀물처럼 소리 없이 차오르는 부조리가 어느덧 턱밑까지 차올라 당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잔혹하게 고발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폭력과 억압으로밖에 다스리지 못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파국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게 아니라 거미줄 같은 균열 한 가운데 있는 법이며 이 작품은 우리 안의 파국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빈말로도 편하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색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이런 색깔, 개성, 목소리가 필요하다. 연상호 감독의 < 사이비 >에 이어 2015년 홀랜드애니메이션필름페스티벌에서 장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그 개성이 진짜임을 이미 인정받았다. 특히 폭력의 이미지를 만화적 상상력과 결합시킨 작화 방식이 흥미롭다. 만화, 컷 아웃, 실사 등 디테일하고 실험적인 기법들이 익숙한 듯 새롭게 펼쳐진다. 해조류와 채소를 변형시킨 배경과 상상력도 재미있다. 단순히 불편함, 자극적, 충격적인 묘사와 강한 메시지를 넘어 적절한 표현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른 감독의 고뇌와 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흔한 이야기를 흔하지 않게 포장할 줄 아는 소중한 재능이다. 그 개성이 앞으로 어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풀어 놓을지, 다음이 더 기대된다.
나는 항상 애니메이션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예술가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물론 아직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니메이션 작업이 예술 작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틀림없다고 알려주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유리 노르슈테인의 < 안갯속의 고슴도치 >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대학 3학년 때, 애니메이션을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나서였다. 그동안은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만 봐 왔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형식의 이 작품을 보고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건 마치 <밤비>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놀라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어느 작품이나 훌륭하지만 나는 안갯속의 고슴도치 >를 특히 좋아한다. 주인공 고슴도치는 내가 본 디즈니나 픽사의 어떤 주인공보다도 귀엽다. 게다가 동화를 설명해 주는 러시아 아저씨의 목소리는 나를 북유럽 환타지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종이를 오려서 만드는 ‘컷 아웃 애니메이션’으로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작품은 지금과 같은 디지털 방식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암실에서 한 프레임씩 조명과 사투를 벌이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마 유리 노르슈테인과 조수이기도 한 그의 부인이 캄캄한 촬영실에서 작은 20~30개의 팔다리를 바꿔 붙이며 몇 달을 촬영하고 다시 촬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입체감과 안개, 조명, 그리고 아련한 느낌들이란. 종이로 만들어진 귀여운 고슴도치가 진짜 물로 된 것 같은 강을 건너며,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는 안갯속의 숲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작품은 모든 장면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숲과 안개와 빛들. 러시아 영화의 위대한 장점들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귀엽기까지 한 마술 같은 작품. 아! 이것이 진정 예술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1979년 < 이야기 속의 이야기 >를 끝으로 본격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국영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소유즈 멀티 필름’이 문을 닫으면서 작품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 차기작인 고골리의 소설이 원작인 <외투>는 십 몇 년 넘게 제작비 부족과 여러 가지 문제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외투>가 진정 만들어지기를 고대한다. 만약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이 예술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작품이 하나 추가 될 것이 분명하다. 못 보신 분들은 꼭 보기 바란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집은 국내에 나와 있는데다 너무나 싸게 구매할 수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 < 케르제네츠 전투 >와 < 이야기 속의 이야기 >도 훌륭한 작품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