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 감독
- 김재환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남명렬, 안석환, 이종윤, 최승호, 이상호, 이용마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어디로 가고 싶은가?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상시로 받거나 자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 한국의 교회에 이 질문을 똑같이 던진다면 과연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영화 < 쿼바디스 >의 화두다. 매년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나오고 또 독립영화의 그 자유로운 창작 정신으로 인해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그다지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가 현재 어떠한 상황과 위치에 있는 가를 생각한다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압축한 문구인, 교회가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교회가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고, 교회가 한국으로 가서 대기업이 되었다는 말처럼 한국의 교회는 점점 거대해져서 대기업이 되었고 여차하면 바벨탑을 쌓을 기세이다. 이는 비단 종교인이 아니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현실일 것이다. 적어도 도심에서는 밤하늘의 별보다 붉게 반짝이는 십자가를 보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니 말이다. 정통을 표방하든 이단으로 몰리든 교회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예수의 계승자로 보기엔 너무 세속화되었고 너무 물신화 되었다. 이 지점을 김재환 감독은 되묻고 있다. 그가 만든 문제적 전작들인 < 트루맛쇼 >와 < MB의 추억 >처럼 이 영화는 강렬한 사회비판을 담고 있다.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 우리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는 면에서는 전작들과 동일 선상에 있다. 이미 <트루맛쇼>를 만든 다음 차기작의 소재는 한국 기독교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던 그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블랙코미디적인 영화로 < 쿼바디스 >를 완성했다. 조롱과 비판을 적절히 섞고, 마이클 모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동원해 패러디적 요소를 가미하며 한국 기독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더욱 배가시켰고, 누가 들어도 알 만한 대형교회와 그들만의 교단과 목사들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언론인 출신답게 자신의 선배도 실명으로 동원해 주류 언론에 대한 비판도 자유분방하고 날카롭게 해낸다. 이 영화의 가장 강점이 바로 이런 점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비판하기 힘든 거대한 권력을 향해 조소와 비난을 마음껏 하는 그런 후련함 말이다. 자신이 주류 언론 출신이라 더욱 쉽지 않았을 이런 비판을 자유롭게 하는 정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독립영화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빛난다. 실제로 < 트루맛쇼 >를 만들 당시에 이미 여의도에서 꽤나 알려진 외주 제작사였던 그의 회사가 이 영화를 만든 뒤에 일감이 뚝 끊겨버린 것에서도 이러한 용감한 정신의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실제 필자가 김재환 감독을 수년 전에 만났을 때, 그도 <트루맛쇼>를 만들게 되면 자신의 회사가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실을 외쳐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후 < MB의 추억 >을 비롯해 < 쿼바디스 >에까지 이른 것을 보면 그의 일관된 사회 비판적 작가의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이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찬사와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한 편으로 한국 관객들은 민감한 주제를 강한 패러디와 조소로 엮어나간 이 작품에 대해 아직은 생경함을 느끼는 것 같다. 독립다큐멘터리로서는 2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흥행이라 할 수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에 비해선 그리 스코어가 높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독교 관련 영화들이 대부분 헌신적인 성직자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완전히 색다른 영화이고 대부분 기독교를 미화한 측면이 적지 않았던 영화들이 당연하게 일정한 관객을 담보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소재나 전개방식에 있어 이미 이러한 위험은 감수하고 제작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기대에는 조금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연상호 감독의 < 사이비 >와 같이 종교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은 영화들에 비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사이비>가 아주 세밀히 종교의 문제점을 파헤친 영화라면 < 쿼바디스 >는 보다 거시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한국의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강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길을 걷지 않고 반대로 가고 있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에는 이들이 분명 예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집단으로 확연히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그가 동의를 구하는 지점일 것이다. 물론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이 불합리한 현실에 우리가 눈감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나는 확신한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했던가? 요즘의 영화판을 보자면 도무지 어떤 법칙으로 흘러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판이다. 상업영화들도 투자가 메말라 작품수가 줄어들고 있고 좀처럼 신인작가나 실험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없는 구조에서 마케팅에 더 열을 올리는 작품들이 양산되고 독립영화는 그야말로 완전히 독립된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시장의 위축이 기본적인 전제이지만 독립영화 역시도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도전과 모험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지원은 아예 바라지도 않고 탄압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지경이니 세월의 시계가 한참이나 되돌려진 것 같다. 다른 예술영역들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기술의 발달로 많은 부분의 일손을 덜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예술장르다보니 더욱 어려운 지경이다. 문화체육관광부로 위시되는 정부의 문화정책 전반이 퇴행적 기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영화의 영역에만 한정해서 보면 영화진흥위원회가 갈지자 행보를 걷다 못해 이제 더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아님 말고’식으로 아예 없애자는 발표까지 나오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예술이라는 것과 정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가장 자유로워야할 창작의 영역에 어떤 하나의 방향과 기조를 골간으로 하는 정책이라는 개념은 어울리기 힘들고 어울린다 해도 불륜을 피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일정하게 시계추가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영화문화 그 자체에 대한 몰이해와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중요성을 한류나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상업적 수출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만드는 자리에 있고 그나마 그런 사람들도 다 채울 수 없어 그 지향을 떠나 기본소양과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사들이 행정을 좌지우지하니 이런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정책과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를 없애고 시장기능을 중심으로 단순한 행정지원센터 정도를 만든다는 발상은 어떤 뇌구조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인지 정말 개연성과 서사가 떨어지는 장르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산업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장기능을 중심으로 행정규제를 대폭 줄이고 간접지원을 하는 방식을 취하고 예술성과 창작성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들은 다양한 소재로 많이 만들 수 있게 직접적인 지원과 이러한 영화들이 다양하게 유통될 수 있게 각 주제별로 해당 부처와 함께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면 양과 질에서 우리 영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현실은 정말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순수이성으로 돌아가 보자. 비단 영화뿐만 아니겠지만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최종원 의원의 경우 한 평생 연극에 몸바쳐온 예술인이자 한국영화에 다양한 캐릭터를 심은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고향에 예술촌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를 문화부가 관광중심 사업으로 만들면서 계획안이 완전히 달라져서 제도개혁이 없이는 안 되겠다는 판단 하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고 한다. 물론 양자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니 그 사실 진위를 여기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평생을 예술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예술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뭔가 뒤틀려도 한참 뒤틀린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의 손에 대본이 들려있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호프 한잔 마시며 갑론을박하는 영화인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단편영화를 보고 웃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상에서 함께하는 영화와 그 영화가 일상에 힘을 주고 그 일상이 영화를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영화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북돋우는 정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극의 시나리오를 쓰고 싶지 않기에 영화인들의 손에는 시나리오와 촬영장비와 영사기가 들려 있어야 한다. 그들의 손에 촛불이 들려 있을 때 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불행의 서곡이 계속 울려 퍼지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