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 감독
- 오현진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조철순, 송희수, 우석순, 김용금, 서미자, 박수길, 정금숙, 오현진
살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나와 공동체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를 포함한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래된 질문이지만 낯설어서 답을 구하기 쉽지 않다. 아니 우선 그 질문 앞에 서기 어렵다. 일상을 영위하는 일이 예전보다 몇 배 어려워졌고 운 좋게 그런 질문 앞에 선다고 해도 진지해지면 창피해지는 주변 분위기에 어디 물어볼 곳도 없다. 이 질문들은 사회변혁에 대한 실험이 일상에서 사라진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낯설다. 사랑 고백 같은 아니 사랑 고백이라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 어떤 점거 >를 보고 있으면 위의 질문들이 떠오른다. 영화는 “2009년 12월 25일 시작해 2011년 6월 8일 마무리 된 두리반 점거농성의 531일과 그 시간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에너지를 모두 담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기록영상이기보다는....” 로 시작된다. 감독은 고백만큼이나 사랑스럽게 일상을 잡아낸다. 스마트폰으로 찍어낸 농성장의 일상은 거칠고 어둡지만 그 만큼 친밀하다. 칼국숫집의 주인은 안종녀와 유치림이지만 농성장의 주인은 농성을 함께 하는 ‘상근자’를 포함한 이곳을 찾는 모두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불편에 맞서 농성장을 살아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은 전기가 끊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기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는 것부터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농성장엔 햇빛발전기, 자가발전 전구, 연탄, 뜨거운 물이 전기를 대신한다. 번개탄 네 개를 사용해도 연탄불이 붙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유치림의 모습은 그에 대한 감독의 사랑만큼이나 길게 그려진다. 그리고 불편해진 상황을 버티는 것이 농성장의 일상임을 보여준다. 보통은 불편함이 모여 피로를 만들고 결국에는 무기력으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농성장에서는 불편은 다른 것들을 만든다. 안종녀와 유치림 그리고 ‘상근자’(농성장에 연대하러 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들은 불편함을 다르게 소화한다. ‘상근자’들의 잠자리 추위는 유치림이 뜨거운 물로 채운 페트병의 온기로 밀어낸다. 언제든 불쑥 염탐하러 들어오는 용역들의 일상적 위협이 만드는 긴장은 ‘상근자’들의 음악으로 해소한다. 안종녀는 늘어난 ‘상근자’들을 위해 국수를 더 삶으며 자기 순서를 선뜻 내어주고 ‘상근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순간들을 나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은 새로운 감정들과 시간들 그리고 다른 경험들로 변한다. 철거 때문에 텅 빈 공간은 연대하러 온 홍대의 뮤지션들의 공연장으로 변하고 공연이라고는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유치림은 농성이 끝나면 공연장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공사를 위해 버려진 공터는 싱싱한 채소를 얻을 수 있는 텃밭이 되고 옥상은 햇빛발전기를 위한 공간이 된다. 그렇게 농성장은 자본의 질서 대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공간과 시간이 된다. 싸우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기에 투쟁하는 ‘상근자’들과 안종녀, 유치림은 일상을 새롭게 구성하며 풍요로워졌다. < 어떤 점거 >는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다. ‘상근자’로 농성장을 지킨 감독은 자신이 경험한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고 곱씹어 내어 자신만의 대답을 내놨다. 독립다큐멘터리는 감독의 시선이 닿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누구의 강요도 틀도 아닌 것이기에 영화는 감독의 대답이 된다. <어떤 점거>는 사회변혁의 실험이 어려운 시기에 개인이 어떻게 연대하고 싸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살아낼 수 있는지 힌트를 준다.
올해의 테마를 정리한다면 어린이, 노인, 여성, 퀴어가 되나보다. 일부러 테마를 정리해서 영화를 고른 건 아닌데, 뽑다 보니 그렇게 됐다. 클래식 할리우드에 대한 내 페티시를 자극해 은근슬쩍 리스트에 오른 < 헤일, 시저! >를 제외한다면 리스트에 선정된 모든 영화들이 여기 어딘가에 서 있다. 이중 몇몇은 두 개 이상의 테마를 공유한다. < 캐롤 >과 < 아가씨 >는 여성중심인 동시에 퀴어물이다. < 우리들 >의 주인공들은 여성인 동시에 어린이다. < 어둠의 여인 >의 주인공은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이다. < 45년 후 >와 < 다가오는 것들 >은 모두 여성의 노년을 다룬다. 어린이를 청소년으로 넉넉잡아 본다면 < 비밀은 없다 >는 저 테마 중 세 개를 커버한다. 이 테마를 연장해서 다른 영화들도 몇 편 더 언급했으면 좋겠다. 여성 + 퀴어 테마의 영화로는 얼마 전에 개봉한 < 연애담 >과 개봉을 기다리는 < 꿈의 제인 >을 뽑았으면 좋겠고, 노인에 대한 영화로 빠진 작품으로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 빠지면 아쉽다. < 우리들 >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로는 엉겁결에 정지우 의 최고 걸작이 된 < 4등 >이 있다. 이들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보다 덜 마음에 든다거나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번 리스트를 만들 때는 그냥 저 영화들을 넣고 싶었고 여기에 완벽한 줄 세우기가 개입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연애담>을 < 아가씨 >보다 더 좋아한다고 할 수 있고 <아가씨>에 대한 내 입장은 거의 매일, 심지어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휙휙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는 내가 <아가씨>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올해는 한국영화를 조금 넉넉하게 뽑았다. 해외영화와 한국영화를 반반씩 뽑아도 되었을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이건 2016년은 한국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분노하고 열광할 시간이 많았다. 이들 중 몇 편은 아쉽게도 그 가치에 맞는 관객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오늘 내가 고른 영화는 이경미 의 < 비밀은 없다 >이다. 흥행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가장 아쉽다. 거의 수정처럼 투명하고 보편적인 < 우리들 >이나 감독과 원작자의 명성을 입고 해외에서 호평세례를 받고 있는 < 아가씨 >와는 달리, 이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은 한국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어처구니없는 비열함에 대한 지식과 분노가 있고, 사투리와 억양을 구별하는 귀를 구별할 수 있는 한국어 사용자. 사전지식 없이 자막으로 보는 외국 관객들이 이 영화의 뉘앙스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본다면 21세기 초의 한국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로 <비밀은 없다>만큼 좋은 작품은 없다. 다른 영화들이 이 나라의 표면만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산 채로 해부해 보인다. 설정을 보자. 텔레비전 앵커 출신인 종찬은 고향인 경상북도 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 중이다. 원래 여당 텃밭이지만 이전 여당 국회의원이었던 무소속 후보 때문에 경쟁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선거 유세 첫날, 중학생인 딸 민진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정보를 준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계는 정치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 영화가 모자란 편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을 전에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비밀은 없다 >의 도입부는 아주 좋지만 전형적인 한국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재료를 다 갖추고 있다. 주인공을 종찬으로 만들면 영화는 당연히 그 길을 갈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 비극에나 나올 법한 처절한 아이러니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종찬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배우에서부터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안 한다. 제작자이고 공동 각본가인 박찬욱은 이 캐릭터의 분량이 줄어든 걸 아쉬워했는데, 내 생각엔 이 분량이 딱 맞다. 종찬이 근사한 상황에 빠진 훌륭한 캐릭터라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 비밀은 없다 >의 장점은 그의 분량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이어야 마땅한 이 인물을 당연하다는 듯 조연으로 밀어버리는 무심함에 있다. 대신 영화는 주인공 자리를 종찬의 아내 연홍에게 준다. 이 사람이 주인공임을 선포하는 오프닝의 클로즈업을 제외하면 사실 초반에서 연홍은 그렇게 눈에 뜨이는 존재는 아니다. 남편의 대업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예쁘장한 30대 여성. 하지만 딸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혼자 탐정 일을 시작하면서 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면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이 균열은 점점 커지면서 연홍의 얼굴을 떠나 연홍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세계 전체로 퍼져간다. 연홍의 수사과정은 하드보일드 소설과 필름 누아르의 영역에 있다. 퍼즐 추리물과 하드보일드 물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미지가 있다. 퍼즐 추리소설이 파편화된 정보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면 하드보일드 물은 어둡고 좁은 미로 속에서 망치로 벽을 깨부수며 목적지까지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랄까. 개인적으로는 로스 맥도널드의 60년대 이후 소설과 이 영화를 비교하고 싶다. 거대한 비리와 소소한 가족의 비밀이 얽혀 뜻밖의 미로를 완성하는 그 과정이 많이 닮았다. 단지 < 비밀은 없다 >에는 루 아처가 없다. 지도를 완성하는 역할은 실종된 딸의 어머니에게 넘어간다. 이제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이다. 그리고 연홍이 미로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우리’ 안에서 자신이 늘 타자였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만약 공식대로 종찬이 주인공이었다면 그가 몰락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를 만든 남성 중심적인 정치판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그의 몰락은 흔한 일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고 호남 출신이고 지금까지 위태롭게 ‘정치가의 아내’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성인 여성에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인 성숙 따위엔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이 미숙한 영혼은 중2병 아이들에 걸맞은 파괴력으로 그 주변의 세계를 박살 내버린다. 이런 한국 영화를 전에 몇 번이나 보았는가. 그렇다고 < 비밀은 없다 >가 남자들에게 희생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냐면 사실은 정반대이다. 민진의 실종으로 시작되는 영화 속 드라마의 대부분은 여자들에 의해 저질러졌고 여자들 때문에 일어났다. 여자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가장 먼저 잘못한 것이 누구냐를 따진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페미니스트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며 자신을 그렇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이유가 무엇이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변 여자들과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격렬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남자들의 존재감은 이상할 정도로 흐릿하다. 심지어 거의 궁중 사극처럼 남자 한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민진의 마지막 대사는 그 남자의 마지막 존재감마저도 날려버린다.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의 사정이다. < 비밀은 없다 >의 파괴력도 여기에 있다. 앞에서 종찬이 주인공이었고 그의 몰락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면 세계는 바뀌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몰락이 그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의미가 없고 그의 자리는 언제나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균형의 측면에서 보면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의 세계를 뒤흔드는 것은 모두 (정신적으로 조금씩 미숙한) 여자들이고 청소년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하는 중장년 남자들의 세계관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자와 아이들의 자리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따귀를 한 대 맞으면 세 대 받아치고 친구에게 해를 끼치면 차로 세 번 밀어버린다. 그렇다. 이 영화의 청소년 주인공 중 한 명은 심지어 운전을 한다. 지금까지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그 사회에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세계를 때려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묵시록적인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존 사회에 대해 어떤 기대도 아쉬움도 없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묵시론적 비전은 즐겁기 그지없다.
93세의 할머니가 어느 날 자살을 시도한다. 수면제를 먹고 누운 할머니의 화장대에는 장례비로 쓰라며 전 재산 30만 원이 놓여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가까운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 삶을 붙잡지 못할 정도로 가벼웠던 것일까, 하고 자책하게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에 커서 이제 30대가 된 감독은 할머니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서울에서 전라도 화순까지 ‘할머니의 먼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상은 죽음보다 삶과 가깝다. 먼 길 온 손녀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고, 뻔히 따로 먹을 것을 아는 큰아들의 식사를 차리고, 마당 한켠 작은 텃밭을 가꾼다. 늦잠을 자다 카메라를 들고나온 감독은 마당에서 잔디를 고르고 있는 할머니를 본다. 집에선 엄마가 뭐라고 해서 그렇게 늦게까지 못 누워있지, 하며 웃는 할머니의 모습은 감독을 여유 있는 품으로 키워준 바로 그 모습이다. 그런 할머니는 왜 죽으려고 했을까. 감독의 물음에 할머니는 그저 ‘성가신게’ 하고 말할 뿐이다. 감독의 방문으로 안정을 찾으시던 할머니는 큰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삶의 기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속이 꽉 막혀 들어가지 않는 밥 대신 죽은 아들이 좋아하던 술을 마시고, 누워서 잠을 청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감독은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영양제를 놓아드린다. 더 이상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할머니가 스스로 떠나지 않도록 자주 가서 들여다 뵙는 것뿐. 살날이 많이 남은 젊은 손녀는 죽음밖에는 남지 않은 성가신 삶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때로 다큐멘터리의 윤리와 부딪히기도 한다. 어느 순간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할머니의 먼 집 >은 할머니의 자살시도로 시작하고, 때로 노골적인 죽음의 바람이 드러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묫자리를 옮기고 온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낸 다음 해 질 녘 산 아래를 내려오며, 할머니는 말한다. 오늘 밤에라도 여기 오게 되면 좋겠다고. 자식들도 웃으며 말한다. 묫자리 잘해놨으니 언제 와도 편히 계실 수 있다고. 감독의 어머니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보다 돌아가셔서 땅에 묻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한다. 자식들이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이미 긴 노년에 접어들어, 할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죽음을 기다리는 불편함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굉장히 밝고 사랑스럽다. 할머니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손녀도, 같이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먹고 낮잠을 자는 두 사람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다 놓고 소박한 파티를 하는 모습도, 관객들에게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들이다. 영화 내내 할머니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감독의 간절한 마음이 스크린 너머까지 전해져온다. “참말로 올해는 꼭 죽어야제. 그 맴 밖엔 없어. 통 죽을 맴 밖엔” “할머니, 죽으면 나도 못 본데 괜찮애?” “요만치나 컸응게 괜찮애야” “안 괜찮애, 나는” < 할머니의 먼 집 > 중에서 < 할머니의 먼 집 >의 영문 제목은 Dear Grandma 이다. 이 절절한 러브레터는 감독의 할머니에게만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겨우내 찬 기운을 피해 창고에 들어가 있던 화분들을 꺼내 물을 주고, 손녀와 함께 저수지 산책을 하며 할머니는 말한다. “인자 가자, 깐닥깐닥 구경 잘했다. 어디 먼디 구경 온 것 맹이로.” 할머니의 남은 생이 손녀와의 산책처럼 즐겁길, < 할머니의 먼 집 >이라는 ‘홈비디오 다큐멘터리’가 할머니의 새로운 봄맞이가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