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캠프
- 감독
- 이상빈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백도빈, 정시아, 곽도원, 김성오, 승창진, 류동훈, 전재홍, 문건, 정다원, 홍주용, 엄태구, 박성용, 유일한, 이승민, 민지희, 조수정, 효우, 소혜영, 이범학, 박용기
1980년에 출판된 미국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 인 아메리카 Marquis Who’s Who in America」에는 렌 라이(1901-1980)가 ‘모션 컴포저(Motion Composer)’로 등재되어 있다. 직역하면 ‘동작(움직임) 작곡가’가 될 이 합성어는 드로잉, 회화, 직물염색(납염, Batik), 사진, 영화, 키네틱 조각, 시와 산문 등의 매체로 작업해왔던 라이가 본인의 작업을 ‘움직임의 형상(figure of motion)’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를 대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모션 컴포저’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운동의 리듬을 탐구했던 라이를 대변한다면, 1958년에 첫 상영되었던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는 그의 작업 이력 전체를 함축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는 화학용어로서 유리기라고 번역되는데, 홀전자(unpaired electron)를 갖는 원자나 분자를 의미한다. 보통의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는 회전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빛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가 가해져서 전자의 결합이 끊어지면 홀전자가 되고, 이는 다른 원소들과의 반응을 촉진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한다. 라이는 전 작업을 걸쳐서 신체와 물질을 탐구했었고, 자신의 창작이론을 진화론, 신경과학, 양자역학, 유전학에서의 발견들을 통해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는 신체와 물질 각각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환 역시 에너지로 생각했고 안무를 에너지에 헌정된 예술로 간주했다. 그가 자주 썼던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오래된 뇌(old brain, 이성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깊숙한 곳)’와 유전자(태고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활동들이 각인된 저장소)는 사물의 운동(에너지)와 공감각적으로 공감(empathy)한다. 라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색채, 댄스, 리듬 등의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은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 래디컬스>에서는 제목이 뜻하듯, 하나의 형상이 전개되고 다른 형상으로 변주되는 과정이 화학적인 촉발과 반응처럼 구성되었고, 아프리카 바기르미족(Bagirmi)의 드럼 음악(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에 맞춰 안무 되었다는 점에서 라이의 관심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 별표 시퀀스의 일부 출처: http://thethird-eye.co.uk/free-radicals-by-len-lye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다소 결연한 의지로 만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라이의 영화들은 제작비의 출처에 따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the London Film Society, 1925년에 설립되어 1939년까지 지속되었던 영국 최초의 영화 협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캐럴 리드와 같은 감독들도 회원이었다)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던 1929-34년, (2) 영국 중앙우체국(GPO, the General Post Office)의 영화과 등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던 1935-40년, (3) 영국 정보부(MOI, the Ministry of Information)의 사실주의자 영화과(Realist Film Unit)에 소속되어 나치에 대항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던 1941-43년(공교롭게도 MOI는 라이의 영화를 보고 선전영화는 더 직설적이고 덜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에 뉴욕으로 옮겨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 (타임 사에서 제작했던 단편 뉴스릴 영화 시리즈로 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상영되었다) 시리즈의 연출가로 뉴스릴 영화를 만들었던 1944-51년, (5) 제작비 대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던 1952-59년, (6) 키네틱 조각을 만들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그의 고국 뉴질랜드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던 1979-80년이다. (지면의 한계로 작품의 상세한 목록을 생략한다. http://sensesofcinema.com/2002/feature-articles/lye-2/#filmo을 참고하기 바란다.) 1945년 경 <마치 오브 타임>의 사무실에 있는 렌 라이 사진의 왼쪽은 라이가 디자인한 시리즈의 로고 출처: http://www.art-newzealand.com/Issue101/lye.htm <마치 오브 타임> 시리즈의 일부를 연출했던 시기까지 라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존 그리어슨이 이끌던 GPO의 영화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 년에 두 편 정도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장르를 엄밀히 따지자면 광고에 해당한다. 작품 제작을 지원했던 단체 혹은 회사들(예를 들면, 임페리얼 Imperial 항공사)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작품 제작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달았을 뿐, 라이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라이의 대표작을 색채의 관점에서 꼽아야 한다면, 단연코 <컬러 박스 Colour Box>(193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거의’ 처음으로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록상으로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아르날도 지나(Arnaldo Ginna)와 브루노 코라(Bruno Corra)가 1908년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착상을 했고, 1910년에 네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 한스 스톨텐베르그(Hans Stoltenberg)나 앙리 스토크(Henri Storck)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는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이렉트(direct) 필름’이라고 불렀다. 이를 지칭하는 유사한 용어로는 ‘카메라 없는 영화(Cameraless film)’나 ‘필름 위에 그린 애니메이션(Drawn-on-film animation)’이 있고, 좀 더 폭넓게는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도 해당된다. <컬러 박스>는 영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에게 보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다이렉트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컬러 박스>는 1935년 브뤼셀 국제영화제의 판타지 영화 부문에서 명예상(Medal of Honor)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나치 관객들은 오스카 피싱거의 추상영화에 비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형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즈 음악이 흑인적(negroid)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에 영국에서 이 작품을 본 노만 맥라렌(1936년부터 1939년까지 GPO에서 일했다)은 “여기 손으로 그린(handpainted) 영화의 개척자가 있다...그것은 마치 내게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렌 라이는 그 방식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했었다. 라이는 이 시기에 듀페이컬러(Dufaycolor), 가스파르컬러(Gasparcolor), 테크니컬러(Technicolor)와 같은 컬러 필름들을 실험하는 데 집중했었다.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출처: https://filmcolors.org/2014/04/18/dufaycolor-films-by-len-lye 1951년에 라이가 <마치 오브 타임>을 그만두고, 1952년에 자신과 부인 앤(Ann)만 속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다이렉트 필름으로 정했던 것은 카메라로 찍는 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손으로 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라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영화사 이름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한스 리히터의 초청을 받아서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뒤이어 콜롬비아대학,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을 설립하고 나서 첫 영화로 <컬러 크라이 Color Cry>(1952)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라이의 영화 작품 포맷은 16mm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라이가 틈틈이 해왔던 포토그램(photogram, 필름 위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빛에 잠깐 노출시켜서 상을 맺게 하는 방법) 작품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라이는 모슬린 천에 새겨진 점(dot) 패턴을 마음에 들어 했고, 포토그램 방식으로 필름 위에 점 패턴을 복사했다. 이때 라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춤추는 원자”였다. 원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치 오브 타임>을 연출할 당시에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아인슈타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커져 왔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듬 Rhythm>(1957)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을 찍은 푸티지들을 점프 컷으로 구성해 만든 1분 길이의 파운드푸티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도 점과 선의 패턴이 나온다. <리듬>은 1957년 뉴욕 아트 디렉터스 페스티벌(New York Arts Directors Festival)의 텔레비전 광고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크라이슬러사가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싫어했고 광고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었다. 1957년에 라이가 <프리 래디컬스>를 만들 전의 상황이 이러했다. 그런데 1958년 브뤼셀 엑스포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던 실험영화제 EXPRMNTL로부터 작품을 보내달라는 초청을 1957년에 받았다. (EXPRMNTL은 일명 크노케-르-주트 실험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1958년부터 74년까지 총 다섯 번 개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실험영화작가들이 상호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제가 우리에게 좀 남다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실험영화를 사용한-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했던바 내에서-첫 공식기록으로, 1957년 6월 23일 자 「국제실험영화제」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해당 영화제의 작품 공모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본 연재에서 맡은 유현목의 <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는 초청을 받고 약 8개월간 <프리 래디컬스>에 집중했었다. 이 작품은 라이가 품어왔던 ‘춤추는 원자’의 실현이자, 블랙 리더(leader)로만 만든 첫 영화이다. 라이는 16mm 블랙 리더의 이멀전(emulsion)을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긁어내어 형상을 새겨 넣었다. 필름 이멀전을 벗겨내어 만드는 영화를 ‘스크래치(scratch) 필름’이라고 한다. <프리 래디컬스>는 스크래치 필름이기 때문에, 곧잘 맥라렌의 <블링키티 블랭크 Blinkity Blank>(1955)와 비교되기도 하고 이 작품에 라이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맥라렌의 작품은 검은 배경에 색채가 강조되는 작품이고, 라이의 <프리 래디컬스>는 흑백으로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스크래치는 라이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영향 관계라기보다는 작업 태도를 공유하는 작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사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로 EXPRMNTL의 2등 상을 받았다. 대상은 폴란드의 발레리안 보르보츠크(Walerian Borowczyk)와 얀 레니차(Jan Lenica)의 <돔 Dom>(1958)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은 만 레이, 존 그리어슨, 노만 맥라렌,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에드가 바레즈였다. 라이는 상금으로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성과에 힘입어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가 미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배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공식 상영된 곳은 아모스 보겔이 개최했던 ‘시네마 16’뿐이었고, 상영료로 50달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라이는 제작 후원을 구하고 실험적인 영화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비서로부터 답장을 받긴 했다), 미국 해외공보처, 문화교류재단 등에도 편지를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프리 래디컬스> 프린트 가격으로 4천 달러를 제시했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이는 1959년에 「영화는 예술인가? Is Film Art?」라는 글을 쓰고 영화작가로서 파업을 선언한 뒤 키네틱 조각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 피터 쿠벨카는 여러 차례 라이에게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키네틱 예술가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와 같이 <프리 래디컬스>는 일련의 영화작업이 수렴되었던 마침표이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라이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가 라이의 작품 이력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79년에 키네틱 조각에서 영화로 돌아와 다시 대면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리 래디컬스>는 1979년에 라이가 재편집했던 판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이가 키네틱 조각을 경유하면서 받은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의 키네틱 조각 작품들의 제목과 작업 방식을 보면 차라리 <프리 래디컬스>가 이후의 작품들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가 품었던 ‘춤추는 원자’라는 생각은 그의 키네틱 조각들에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라이의 키네틱 조각은 최소한 32개의 작품이 만들어졌거나 고안되었다. 이 작품들의 목록은 새로 발굴되는 자료가 추가되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데, 그중에 작품들의 제목을 일부 나열하면 <원자적 춤 Atomic Dance> <벨 막대기 Bell Wand> <춤추는 원자 Dancing Atom>,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and Two Twisters(일명 삼부작 Trilogy)> <우주 Universe(일명 루프 Loop)> 등이다. 라이는 이 개별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데 모아놓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에서 번개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샹고(Shango)의 신전을 만들려고 했다. 라이는 개별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을 만들었을 때, 같은 스케일로 제작한 적이 없고 늘 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 이상인 경우가 많다. 관람객이 촬영한 <우주> 관람객이 촬영한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라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 때, 그가 낙서(doodling)라고 부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낙서는 재료를 만지고 흔들거나 휘어보면서, 재료에서부터 파생되는 운동(에너지)의 형상을 몸으로 느껴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낙서는 그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도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어였다. 라이는 조그만 필름 표면 위에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로 그리거나 긁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재료를 느끼며 형상을 낙서해나갔다. 낙서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과 유사한 방법인데, 라이가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던 직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영향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이는 초현실주의가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비판했고 언제나 몸을 중심에 놓고자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이의 낙서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라이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금속으로, 가늘고 긴 조각(strip), 막대, 판(sheet), 롤(roll) 등의 기본 형태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필름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키네틱 조각에서도 필름의 물성 자체에 대한 라이의 관심이 연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이는 금속 재료로 기본 형태를 만든 뒤에 모터나 전자석을 붙여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키네틱 작품들은 지속시간이 그의 영화들의 평균과 같이 4분에서 5분 정도였다. 라이는 재료에 열처리를 하거나 표면을 사포로 긁어내서 질감에 변형을 주고, 이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차이들을 실험했다. 재료의 소리도 중요했다. 라이는 키넥틱 조각품에서 나는 소리들을 따로 녹음에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아이튠즈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키네틱 작품을 전시할 때, 각각의 작품들에서 반사되는 빛과 소리가 대위(counterpoint)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들은 아래에 삽입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잘 드러나 있다. [영상 3] <낙서: 렌 라이의 인상들 Doodlin’: Impressions of Len Lye>(1987) [영상 4]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 Two Twisters>(1995)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를 재편집한 이후 <공간 속의 소립자들 Particles in Space>(1979)을 만들었다. 평자들에 따라서 후자를 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스탠 브래키지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다. 물론 <프리 래디컬스>에 대해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걸작”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공간 속의 소립자들>에서 사용된 소리는 라이의 키네틱 조각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된 것이다. <프리 래디컬스>와 <공간 속의 소립자들> 사이에 라이의 키네틱 조각을 놓으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스케일이다. 개인적으로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 답을 스케일에 대한 경이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라이는 소립자의 운동과 태양의 운동은 에너지란 측면에서 같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영화로 번역하면 16mm의 작은 표면 위에 새겨진 미세한 운동은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이미지의 운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같다. 다만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확장되었을 때, 필름 표면 위의 미세한 운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증폭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조각은 삼차원이고 영화 스크린은 평면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라이가 필름 위에 몸으로 새긴, 그래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차이는 필름 이멀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고, 이는 스크린 상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반복해서 느껴야만 터득될 수 있다. 영화의 초창기, 그토록 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념비적인 조각을 구현할 때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장애들을 영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영화를 만들고 보던 학생이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혀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이 당혹감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부끄러움 속에 감추어버리지만, 사실 이러한 스케일의 차이는 탐구되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프리 래디컬스>를 볼 때에는 가능한 작은 스크린을 통해서 먼저 본 이후(만약 스마트폰에서 본다면 가급적 세로로), 최대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렌 라이에 관한 사실들은 로저 호록스(Roger Horrocks)가 2001년에 펴낸 「렌 라이: 자서전 Len Lye: A Biography」과 2010년에 출간한 「움직이는 예술: 렌 라이의 작품 Art that Moves: The Work of Len Lye」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렌 라이에 관한 문헌 목록은 http://sensesofcinema.com/2007/great-directors/lye/#film에 잘 정리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 스탠 밴더빅은 ‘확장영화’(expanded cinema)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구상한 확장영화란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비디오테이프 등 당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시청각 장치들을 통합한 ‘비(非)음성적이고 국제적인 그림-언어’로 다분히 테크노-유토피아적인 전망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다. 더불어 그는 자료들을 기록, 저장, 위성으로 전송 및 수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양상들을 담은 수천 개의 이미지들을 내부 벽면에 동시에 영사할 수 있는 반구(半球)형의 건축물을 고안하고 이를 ‘무비-드롬’(movie-drome)이라 불렀다. 밴더빅의 확장영화 개념은 오늘날로 치면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의 결합을 건축적 공간에 옮겨놓은 것으로, 그의 ‘인터미디어’(intermedia)적 지향은 진 영블러드가 1970년에 출간한 저서 「확장영화 Expanded Cinema」에서 보다 체계화되었다. 영블러드의 관심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실험한 휘트니 형제나 백남준 같은 예술가들에게 향해 있었다. 영화적 제도 일반(제작, 배급, 상영, 관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영화장치를 구성하는 요소들(필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및 영화관이라는 환경)의 구조와 물질성 자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1970년대 영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말콤 르 그라이스, 윌리엄 라반, 아나벨 니콜슨 등 ‘Filmaktion’ 그룹과 런던영화작가조합(London Filmmakers’ Co-Operative)의 작가들)은 그러한 요소들의 관습적 결합을 교란하거나 해체하고 또 재정의하는 고도로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확장영화를 다시 정의했다. 확장영화 실천에서 퍼포먼스가 필수적인 것은 아님에도 멀티스크린과 더불어 가장 두드러진 기법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이들의 작업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시기 영국 확장영화의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인 말콤 르 그라이스의 <호러필름 1번 Horror Film No.1>(1971)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영상 1] <호러필름 1번 Horror Film No.1>(말콤 르 그라이스, 1971) 2010년 11월 11일 호주 브리즈번의 현대미술협회 공연 기록영상 역사적으로 볼 때 영화적 실천이 멀티스크린이나 퍼포먼스와 결합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0년 경 라울 그리무앙-상송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10대의 동기화된 영사기로 360도 스크린에 투사하고 이를 열기구에 올라타 관람하게끔 하는 ‘시네오라마’(Cinéorama)라는 장치를 고안했고, 1927년 아벨 강스는 < 나폴레옹 Napoleon >에서 나란히 놓인 3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영사하는 대형화면 포맷을 실험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글루모프의 일기 Glumov’s Diary>(1923)와 르네 클레르의 <막간 Entr’acte>(1924)은 무대 공연 도중 상영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1960~70년대 영미권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일련의 확장영화적 실천에 몰두하기 전, 1950년대 초에 등장한 프랑스의 레트리스트들(이시도르 이주, 모리스 르메트르, 질 J. 울망 등)이 보다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상했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울망은 <반개념 L’ anticoncept>(1952) 상영 시 기상관측용 기구를 스크린으로 활용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을 만지거나 올라타거나 심지어 자르고 지나가도록 했는데, 이는 영화관 매니저와 스태프, 그리고 실제의 배우 등이 벌이는 라이브 퍼포먼스(주로 관객으로 가장해 소동을 벌이는 것)와 영화상영의 결합을 구상하고 이를 통해 보는 행위와 보이는 대상의 분리를 폐지하고자 했던 르메트르의 ‘종합영화’(syncinéma)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전통적 영화개념에 도전하는 확장영화 실천과 퍼포먼스의 도입이 1960~70년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관심사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당대 아방가르드 영화 전반과 관련된 것으로, 특정한 예술적 매체의 속성을 그 매체 자체를 통해 탐구하고 비판한다는 모더니즘의 방법론에 입각해, 영화라는 매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와 기본 조건들(르 그라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질적 조건들’)을 영화 자체를 통해 탐구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러한 탐구와 비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몇몇 작가들은 영화라는 장치가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임을 폭로하는 해체적 실천(필름, 영사기, 스크린의 조합을 기존의 방식과 달리하는 상영이나 퍼포먼스)이나, 특정한 영화적 구성요소의 물성(物性)에 대한 ‘외과의학적’ 집착(필름의 감광유제 층이나 영사기에서 방사되는 빛 자체에 대한 탐구)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더불어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더니스트적 개념 또한 영화작가들이 퍼포먼스적 요소를 작업에 도입하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확장영화 가운데 하나인 안소니 맥콜의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1973)에서 관람객에게 볼거리로 제공되는 것은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영사기에서 방출된 빛이 전시공간에 조각 같은 형상을 생성해내는 과정이다. [영상 2]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안소니 맥콜, 1973) 2011년 25FPS 국제실험영화제 공연 기록영상 다른 하나는 영화 이외의 오디오비주얼 매체, 특히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과 1960년대 중반에 출시된 소니 포타팩과 같은 비디오카메라로 인해 필름, 프로젝션, 영화관,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는 영화장치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필름은 자기테이프로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며, 프로젝션은 디스플레이로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며, 영화관 또한 통상의 연극적 건축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60~70년대 영미권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이 텔레비전과 비디오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당대의 ‘뉴미디어’가 그들로 하여금 영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지닌 독자적 매체라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앞서 언급한 해체적 혹은 ‘외과의학적’ 방향의 작업을 자극했으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한국에 확장영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4년에 개최된 제1회 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현재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통해서다. 말콤 르 그라이스, 윌리엄 라반, 질 이덜리, 리스 로즈, 안소니 맥콜, 크리스 웰스비 등의 1960~70년대 작업들이 소개되었는데, 멀티스크린을 활용하거나 상영 환경을 독특하게 구성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작품들, 그리고 영화제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르 그라이스의 열정적인 강의는 나로 하여금 영화라는 불안정한 대상에 대해 다시 숙고하게끔 만들었다.) 영화적 퍼포먼스 작업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문화예술 기획자 및 창작자들의 네트워크인 ‘무잔향’(無殘響)이 기획해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실험영상 및 실험음악 공연을 통해서다.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필름 퍼포먼스인 가이 셔윈의 <거울을 든 남자 Man With Mirror>(1976)와 여러 대의 영사기, 거울, 필터 및 전자음향을 활용해 극도로 사이키델릭한 환경을 창출해내는 프랑스 그룹 메탐킨(Metamkine, 1987년에 결성)의 <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었다. [영상 3]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메탐킨 그룹) 2011년 8월 28일 독일 함부르크 공연 기록영상 영상매체를 활용한 공연이나 전시는 이제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지만, 1960~70년대 영미권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정립된 확장영화와 필름 퍼포먼스 실천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이의 현재적 의의를 타진하는 한국 작가들은 한 손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다. 필름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형, 파운드푸티지의 활용, 멀티스크린 영사를 실험하면서 홍철기, 이옥경 등의 즉흥음악가들과 협업하고 있는 이행준(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프로그래머)과 안무가 나연우와의 협업으로 <대화 Conversation>(2013)를 연출하는 한편 다른 작가들의 ‘댄스 필름’들을 기획하기도 한 이장욱(핸드메이드 필름 랩 스페이스 셀 대표)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이들이 내놓은 작업 가운데 이행준 의 <필름 워크 Film Walk>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11년 문래예술공장에서 초연된 이후 국내외 곳곳에서 공연되어 온 <필름 워크>는 영사기에 걸린 16mm 필름의 한쪽 끝을 작가가 손으로 잡고 길게 이어 뽑으면서 공연 장소에서 이리저리 거니는 간단한 퍼포먼스다. 이 퍼포먼스의 기술적 원리는 간단하다. 영사기의 옵티컬 사운드헤드에 필름의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퍼포레이션(perforation: 필름 가장자리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뚫린 구멍)이 물리게끔 해서 퍼포레이션 자체가 일종의 광학 사운드트랙으로 기능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영사기를 ‘디제잉’(DJing)하는 공연자인 이행준은 배우이자, 감독이며, (아무 것도 영사하지 않는) 영사기사이고, 동시에 후반작업실의 기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상 4] <필름 워크 Film Walk>( 이행준 , 2011) 2014년 2월 22일 프랑스 낭트 공연 기록영상 (즉흥연주: 홍철기) 이상 (너무) 간략하게 확장영화와 필름 퍼포먼스에 대해 개괄해 보았다.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이러한 반(反. anti-)영화적 혹은 반(半. semi-)영화적 실천들은 미술, 공연, 음악 등의 영역에서 적잖이 수용되고 있다. 그것이 현재적 체험의 강렬함을 더하고자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강조하는 오늘날 예술의 욕망 때문인지, 어느덧 예스러운 풍미를 띠게 된 장치에 그들의 의고(擬古) 취향과 페티시즘이 향한 탓인지, 기록된 것의 재생에서 즉흥적인 것의 작의(作意) 없는 생성으로 향하는 길의 동반자를 얻은 기쁨 때문인지, 혹은 그 반대로 부분적이나마 일시적인 것을 극복케 하는 기계장치의 힘을 필요로 해서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실천에 무관심하고 배타적인 것은 정작 영화계라는 점이다. 객석 한복판에 수동으로 작동되는 영사기를 두고 <벽 허물기 Demolition d’un mur>(1896)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한 편의 짧은 필름을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차례로 돌려 관객을 놀라게 했던 뤼미에르 형제는 어떤 영화적 실천의 기원적 형상일까?
공리혜 감독의 < 수제앨범 >은 지난 서울독립영화제2013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으로 예선심사과정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810편이 몰렸던 영화제에서 선택된 작품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만, 이 작품은 몇몇 작품들과 일종의 경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이 대개 청년, 백수, 잉여의 범주 안에 있는 영화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전개과정엔 유머와 유쾌한 도발이 도사려 있다. 무엇보다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특징인데, 에둘러 자신의 처지를 구조에 대입하지 않는 태도에서, 한편으로 88만 원 세대로 대표되는 시대담론의 그늘을 인식게 한다. 영화과를 졸업한 공문숙은 백수이며 잉여이다. 32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 집에 안 쓰는 청소기와 함께 창피한 딸로 담겨 있다. 오늘도 엄마는 한심스레 “영화 때려 쳐, 빨래 널어~”라며 문숙을 압박한다. 빨래를 하며 영화를 찍어 온 지 어언 3년, 영화는 망했고, 응모한 영화제 마다 낙방이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노래 부르는 송창식을 보고 문숙은 문득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유튜브에서 조언을 구하는가 하면, 카메라를 팔아치우고 당장에 키보드를 구입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는 싱어송라이터가 되었고 ‘수제앨범’을 제작해 간다. 영화는 문숙의 자작곡을 경유하며 잉여의 시간을 대변한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빨래로 표현한 ‘Lonely Laundry’, 청년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관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어쩌다 보니 내 나이 서른둘’, 수제앨범제작발표회에서 가족과 이웃들에게 선보인 신나는 댄스곡 ‘놀자’ 그리고 따사롭고 여유로운 오후의 시간을 돌아보자는 ‘PM 4:00’까지. 영화는 동네꼬마와 같이 집안을 뒹굴며 나른한 듯 빨래 더미에 뭉쳐있는 문숙이 어떻게 잉여의 시간을 통과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않고 뻔뻔스레 자신의 꿈을 실천하는지 보여준다. 사회가 여전히 백수로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고, 영화를 찍어 왔고, 노래를 부르며, 오후 4시의 시간을 즐겨왔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욕먹을 이유가 없다고 그녀의 노래는 말한다. 나의 현실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을 즐겁게 해내자는 가치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오버하지 않으며 동시에 부끄러워하지 않은 시간들. < 수제앨범 >은 취업난에 시들어가는 청년 시대에 빛나는 단면을 영화로서 몸소 실천하고 있다. 공리혜 감독은 극 중에서 공문숙이 ‘수제앨범’을 만들 듯 각본/연출/촬영/편집/음악을 도맡으며 1인 시스템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공문숙은 감독 자신이 연기했고 주인공 외 출연 인물도 실제 엄마와 이웃들이다. 당연히 만듦새가 거칠고 투박하다. 허나 만약 이 영화가 매끈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셀프카메라의 불안한 화면과 노이즈 섞인 사운드, 조악한 CG로 메이크업한 영화는 삐뚤빼뚤한 수제앨범의 이상과 닮은 핸드메이드필름이다. 영화 속 문숙은 갈래 머리에 삐삐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내내 등장한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반문이기도 하다. 불손하고 건방진 삐삐는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서 완전히 일탈한 캐릭터다. 어른들의 가치관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저항하긴 보단, 그냥 제멋대로 살며 자유를 누린다. 모두 다 질서 정연하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할까? 창조의 에너지는 언제나 다양한 균열 가운데서 솟아나지 않는가. 곳곳에 촌철살인에 유머가 슬쩍슬쩍 놓여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 < 수제앨범 >. 피아노곡 ‘스케르쵸’로 시작한 오프닝은 D.C(디카포) 표시와 함께 엔딩에서 반복된다. 달라진 것은 서툴던 문숙의 연주가 제법 능숙해졌다는 것. 일상의 반복이 담고 있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