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여 총을 잡아라
- 감독
- 조지 시드니
- 제작년도
- 1950
- 출연
- 베티 휴튼, 하워드 킬, 루이 칼헌
1. 시네마테크 파사주 여정의 시작: 영화관의 문 시네마테크 여행기 프로젝트의 제목을 ‘시네마테크로 가는 통로(길목)’라는 의미를 담아 ‘시네마테크 파사주(Cinematheque Passage)’로 결정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늦은 새벽 시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Prenzlauer Berg),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Kastanienallee 77, Berlin)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의 정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 (사진: LICHTBLICK KINO ) 나는 분명 이 영화관의 출입문에 매료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관을 세상과 연결하는 문은 영화를 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문은 접촉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복합상영관, 영화를 소비문화로 바꾼 이곳에는 문이 없기도 하다. 보통 쇼핑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드넓게 매표소와 팝콘과 음료 판매대가 보인다. 영화관 입장 시간이 되면 입구는 이미 열려 있다. 건물 입구부터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문은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수많은 유동 인구를 위해 모든 통로는 최대한 개방되고, 자동으로 여닫힌다. 하지만 ‘희망의 빛 영화관’의 문은 영화만을 위한 통로를 지키듯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를 고수하는 파수꾼과도 같이 서 있다. 문 옆 창문에는 아마도 현재 상영 중인 듯 보이는 장-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60),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가 떠오르는 퍼시 아들론의 < 바그다드 카페 >(1987),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 (1979)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다음 사진에서는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극장 내부가 보였다. 한 열에 2~4석 정도밖에 없는 좁고 길쭉한 아주 작은 영화관이다. 내부는 흰색 벽에 몬드리안풍의 단색의 장식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이 화려하지 않은 영화관 내부는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배우의 얼굴과 같이 보였지만, 어떤 소박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건 내 시선을 빼앗긴 스크린 앞에 놓인 참나무색 피아노 때문이었다.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성영화 반주용으로 사용되리라 생각했다. 2. 시네마의 유토피아 파리 드골 공항에서 파리 13구에 있는 오스떼를리츠(Gare d’Austerlitz)역으로 이동해 첫 번째 시네마테크 파사주 목적지이자, NECS(European Network for Cinema and Media Studies, 유럽 영화미디어학 네트워크) 학회가 열리는 몽펠리에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출발이 지연되어 열차는 11시 가까이 되어 출발했다. 열차 출발과 동시에 거의 잠이 들었다. 시차로 인해 잠에서 깼을 때 새벽 4시가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다. 열차 침대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 창밖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 어느 역에 정차했다. 내리는 이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기차역. 아마 기차도 잠들 시간이었나 보다. 다시 잠들 수도 있는, 잠의 통로에서 난 이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는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등 이 영화관 기행문을 구상하면서, 찾았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이미지를 역사 개입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영화관의 설립 취지에 넣은 시애틀 컬럼비아 시티(Columbia City, Seattle)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비콘 시네마(the Beacon Cinema)’를 알게 되었을 때 다른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상 아카이브와 같은 곳은 야누스 얼굴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난 한 곳에 있으면서 다르게 존재할 수가 있지.’ 여러분들이 요청하는 좀 더 다른, 아카이브에는 없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은 몽타주 철학이어야 합니다. 몽타주는 재개입의 가능성과 새롭게 재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즉 다른 야망을 지니고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1] 그렇다. 영화관은 이미지의 낙원이어야 한다. 처음 나의 계획은 각 국가의 대표적 시네마테크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히트블릭크 키노와 비콘 시네마(모두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자생하는 보통 아트하우스 시네마라 불리는, 예술영화 전용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이렇게 무작정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관은 찾을수록 나왔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범위를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 유럽 전역의 예술영화관으로 넓혀야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시네마(cinéma)와 도서관(bibliothèque)의 합성어인 시네마테크는 영화와 영화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상영하는 장소다. 나는 이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의 의미를 더 확대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서점이 문을 닫듯이 영화관도 그럴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야 보존과 수집도 의미가 있고, 그 반대로 계속해서 상영되기 위해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존하는 등의 수고롭고, 때로는 시간을 다투는 영화적 실천을 누군가는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시네마테크에 수집될 영화들이 이 수많은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시네마테크에 보관된 영화들은 이 영화관들에서 빛의 이미지가 되어 새로운 관객을 만난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예술영화 전용관 키노 쿨트(Kult Kino)로 가는 길에 놓인, ‘THEATERPASSAGE’라는 이름의 굴다리. AI를 이용해 ‘CINEMATHEQUE PASSAGE’로 수정. ‘시네마테크 파사주’ 프로젝트를 떠올렸던 시점에 내게 많은 예술영화관 정보의 원천이 되었던 곳은 유럽의 예술영화 전용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Europa Cinemas)에서 구축한 ‘유로파 시네마 지도’였다. 이 온라인 지도 에는 소속 예술영화관들의 좌표가 붉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지구본 형태의 유럽 대륙 지도에 붉은 점으로 환원된 예술영화관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서, 한 나라의 영화문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구상했다. 프랑스에는 총 107개 지역에, 208개의 예술영화관이 곳곳에 퍼져있다. 총 스크린은 440개이다. 아마 유로파 시네마에 속하지 않은 예술영화관을 포함하면 그 이상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보기 어려운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금의 영화들을 만날 수가 있다. 이탈리아에는 208개의 영화관이 있고, 스크린 수는 254개이며, 총 116개 지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다. 이들 예술영화 전용관은 모두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체로 그해의 대표적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상영하지만, 각 영화만의 고유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영화관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프랑스에는 영화 종주국답게 감독의 이름을 딴 영화관이 많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감독은 대체로 있다. ‘시네마 장 비고’, ‘자크 타티 시네마’, ‘시네 막스 린더’, ‘마르셀 파뇰 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을 딴 극장도 물론 있다(‘시네 앙리 랑글루아즈’). 배우의 이름을 딴 ‘장-폴 벨몽도 시네마’, 그리고 아마 이즈음에 여러분들이 기대할 장-뤽 고다르의 이름을 딴 영화관은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어 아쉽지만, 누벨바그를 함께 이끌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이름을 딴 영화관(Cinéma François Truffaut)과 그의 영화 제목을 딴 ‘400번의 구타 영화관’이 있다. 이탈리아에는 당연하게도 문학가의 이름을 딴 ‘시네마 단테’가 있다. 특히 문학 또는 예술 사조를 딴 영화관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작은 도시 카스텔 볼로네제에 있는 ‘시네마 모데르노(Cinema Moderno)’와,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PostModernissimo Cinema)’다. 아마도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곳, 가장 출입구가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로 들어가는 문. (사진: POSTMODERNISSIMO ) 유럽 전역에는 총 779개 지역에 1,246개의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 총 스크린은 2,921개다.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예술영화관을 모아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이룬다면 그것은 아마 오직 ‘세계의 영화관’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영화(시네마)의 유토피아이지 않을까? 어쩌면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 전용관은 하나의 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보관된 필름과 자료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다시 상영되고, 누군가는 작은 극장의 문을 열고, 다른 누군가는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 모든 장소와 시간과 영화가 연결될 때,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걷고 이어서, 지도책을 만들고 싶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 영화관을 찾아가는 길. 영화관의 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3. 6월 20일 밤의 기억: 시네마 유토피아 나는 오늘, 시네마 유토피아(Cinema Utopia) 체인 중 하나인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Cinema Utopia Montpellier) 문 앞에 서 있다. 문은 닫혀있다. 몽펠리에를 떠나기 전날 밤, 난 시네마 유토피아로 갔다. 마지막 상영작 중 하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류소에서 몽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Université Paul-Valéry Montpellier)으로 가는 5번 트램을 탔다. 지난 18일부터 오늘 20일 오후까지 내가 참석했던 NECS 학회가 이 대학에서 열렸다. 몽펠리에 도착 후 학회 일정과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저녁 시간에 이곳에 가는 것을 연일 놓쳤기에,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학회장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쳤던 곳이기에 익숙한 발걸음으로, 이미 마지막 영화가 시작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1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 마호가니색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가와세 나오미(Kawase Naomi) 감독의 <야큐시마의 환상>은 시작한지 40분이 지났고, 히치콕이 아닌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 감독의 공상과학 미스터리 코미디 애니메이션 <현기증(Le Vertige)>은 곧 있으면 끌날 시간이었다. 내가 희망을 품고 뛰어온 영화인 마르코 응웬(Marco Nguyen)과 니콜 아타네(Nicolas Athané) 감독의 애니메이션 <짐 퀸(Jim Queen)>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매표소 직원이 먼저 눈짓과 손짓과 말로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마치 오늘의 막차를 놓친 마음으로 난 포스터가 걸린 벽에 놓인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의자 옆으로 영화관 1, 2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물론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단기 앞으로 지나가는 열차의 속도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너편 내가 가야 할 곳의 풍경의 빛줄기처럼, 영화관의 닫힌 문 틈새로 이미지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돌아서 떠나야지만 사라지는 빛의 소리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일종의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으로, 프랑스 남부 및 북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 흩어져 공동의 영화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펠리에에서 동쪽으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Avignon)’에,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는 ‘툴루즈(Toulouse)’에, 그리고 거기서 북서부 방향으로 더 2시간 30분을 기차로 가면 도착하는 ‘보르도(Bordeaux)’에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북쪽 지역에는 트루와(Troyes)에서 멀지 않은 마을인 ‘퐁생트마리(Pont-Saint-Marie)’와 파리 북서부 발도와즈 주 생투앙라우몬(Saint-Ouen l’Aumône)에 다른 2곳의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모두 유럽 예술영화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 회원관이다. 특히 시네마 유토피아의 독특함은 자체 프로그램에도 있지만, 이 영화관이 추구하는 영화를 알리기 위해 사용한 광고 문구에서 드러난다. “Cinéma garanti sans 3D.” 직역하자면, “3D가 없는 영화임을 보장합니다.” 다소 프랑스식 또는 시네마 유토피아식의 유머로 이해하자면, ‘겉모습만 화려하거나 속임수 같은 효과가 가미된 영화가 아님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식품이나 농산물에 유전자 조작이 아님을 알리는 ‘GMO-Free’ 표시와 같은 것이다. 오로지 조작되지 않은 현실의 기록으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이 영화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시네마 유토피아를 수호하는 존재는 그래서 천사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 ‘시네마 유토피아’의 로고. (사진: Utopia Montpellier ) 나에게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수신호를 알린 점원이 물과 음료는 원하는 금액을 내고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갑에 있던 1유로를 음료 테이블에 놓인 돼지 저금통에 넣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따랐다. 매표소와 관객 대기 장소는 마치 가정집 응접실처럼 아담했고, 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고풍스러운 의자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우아하게 놓여있었다. 매표소 옆 계단을 통해 3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현기증>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왔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살짝 영화관 내부로 들어갔다. 마치 예배당과 같이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분위의 영화관이었다. 스크린 오른쪽에 걸린 회화 때문에 더 그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회화 속에는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여인의 고요하고 평온한 몸짓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경책이 놓여있을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스탠드 위에, 이달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영화 프로그램 책자가 놓여있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 떠난, 아니면 영화의 본질을 찾아 떠난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놓여있다. 에필로그: 밤이 오면,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간다. 세실리아: “오늘 밤에 새 영화를 개봉한대” - <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1985) © Orion Pictures Corporation 여러분은 어떤 날에 시네마테크에 가시나요? ‘시네마테크 파사주, Episode 2&3’부터 뤼미에르 영화박물관, 판테온 시네마, 로잔 시네마테크, 그리고 룩셈부르크 시네마테크 방문기가 펼쳐집니다. *** [1] Haley Weiss, “ John Akomfrah and the Image as Intervention ,” Interview Magazine , June 27, 2016. (접속일: 2026. 8. 2) 정찬철(영화미디어학 연구자) l 국립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영화와 미디어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쓴다.
© 나비클럽 마스터플롯, 공통언어로서의 서사 『마스터플롯』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H. 포터 애벗(H. Porter Abbott)의 『서사학 강의(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Narrative)』(2002)에서 정식화한 마스터플롯(masterplot) 개념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플롯이란 사건의 배열과 연쇄를 결정하는 구성적 논리를 의미하지만, ‘플롯’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이 개념을 서사 구성의 내적 논리 정도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마스터플롯은 작품과 병행하고 교차하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큰 틀의 이야기 골격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때의 골격이 그저 작품 내적인 서사의 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서사학을 주된 이론적 도구로 삼아 소설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주로 해왔던 나에게 마스터플롯은 그 자체로 과잉 개념처럼 보였다. 일개 연구자의 주관적 접근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실제 독자를 반영하는 수용자 이론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득한 기분이 들었는데, 하물며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방식의 접근법이라니(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플롯에 대하여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은, 이 개념이 가진 넓은 적용력과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매력이 실제 집필로 이어진 데에는 뜻밖의 지면이 계기가 되었다. 전작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를 함께 만들었던 나비클럽에서 펴내는 《 계간 미스터리 》에 2025년 한 해 동안 마스터플롯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학술 논문의 틀 안에서 몇 차례 다뤄온 개념이었지만, 계간지의 지면은 전혀 다른 요구를 해왔다. 각주와 선행 연구 뒤에 숨을 수 없는 자리, 개념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첫 문장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자리였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쓰는 일 못지않게, 유연한 흐름 속에서 마스터플롯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고 또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그 연재 글들과 기존의 연구들을 한 권의 흐름으로 다시 엮고 고쳐 쓴 결과물이다. 연재 당시의 원고는 2장‧3장‧5장‧7장에 배치되어 있으나, 추가적으로 전체적인 톤의 일관성과 구성의 명확성을 위해서 많은 내용을 고치거나 다시 썼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 텍스트는 대부분 10년 이내의 작품들이면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매체에서 대중적인 선호가 높았던 작품들이다. 물론 이러한 선별은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실천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대중의 수용과 시장의 흥행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를 굳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흔히 ‘걸작’이나 ‘명작’이라 불리는 정전화된 작품에 대한 접근과는 차별화되면서도, 대중적 작품에 대하여 으레 따라붙는 평가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태도이자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끌려간다면 대중성 기반의 작품을 살펴보기 어렵고, 반대로 흥행 수치만으로는 대중성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보정이 필요하다. 마스터플롯을 포괄적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마스터플롯의 사례 역시 무수히 많아진다. 따라서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장르성’+‘로컬리티’에 기반한 마스터플롯으로 추려냄으로써, 흥행이라는 일차원적인 접근을 벗어나 개념화에 적합한 작품들을 추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소토자키 하루오, 2020) © Netflix / ufotable, 워터홀콤퍼니㈜, ㈜NEW, 에스엠지홀딩스㈜ 피할 수 없는 조건 중에 하나는 소위 ‘천만 관객’ 영화들이다. 우리는 대중적 성공의 높은 지표처럼 여겨지는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하여, 그 영화적 완성도를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화들의 특정한 감정적 과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여러 연구가 강조하듯이, 특정한 서사적 패턴이 구성해 내는 감정주의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수용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적 사회와 로컬리티를 벗어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한국에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흥행의 숫자로 번역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나의 이론적인 틀은 로컬리티를 포괄하는 사회적 구조가 좀 더 패턴화된 감정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구조가 그러한 사회적 구조와 병행하는 일련의 서사적 구조에서도 동형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마스터플롯은 서사적 구조와 감정적 구조의 교차적 양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회적 구조를 일정 부분 암시한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은 작품 내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 내외를 오가는 상호적 개념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마스터플롯과 비슷한 자리를 겨냥하는 다른 개념들도 있었다. 워치(James Wertsch)의 도식적 서사 템플릿(schematic narrative template)을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도식’이라는 말이 지워버리는 역동성이 아쉬워 플롯을 택했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사회극(social drama) 이론에서는 사회극과 무대극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구성하며 순환한다는 발상을, 웨인 부스의 규범(norm) 개념에서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서사 참여자들이 도덕적 감수성을 주고받는 호혜적 매개라는 발상을 빌려 왔다. 이 책의 마스터플롯에 대한 논의 역시 이야기의 주제와 규범으로 대변되는 공통언어로서의 서사라는 위상을, 문학 이상의 다매체적 현실에서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스터플롯을 우리 시대의 공통언어로 발견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스터플롯은 단순한 창작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다매체 환경에 노출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형성되는 허구적-대화적 플랫폼이 된다. 이때 마지막으로 조정해야 했던 것이 허구성 개념이다. 장르로서의 픽션(fiction)과 수사적 양태로서의 허구성(fictionality)을 분리하면, 허구성은 허구 서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픽션에도 존재한다. 이 책이 경계하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믿는 이들에게 음모론은 명백한 논픽션이므로, 그것은 허구성을 가진 논픽션이다. 이러한 허구 개념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스터플롯은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다양한 서사 구성을 연결하는 중간적 위상을 획득한다. 이것은 마스터플롯 개념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동체적 상상력을 수렴하는 공통언어의 문법에 다가가는 일이다. 수치의 강가에서 존엄을 수습하기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 마스터플롯 』 을 출간하고 나서, 2장에서 다루었던 명예와 존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많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이러한 마스터플롯에 명백하고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책에서 다루지 못했으나 정확하게 이 마스터플롯에 해당하는 장항준 감독의 < 왕과 사는 남자 >(2025)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했다. 국내 상영 영화 중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1457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임금 이홍위( 박지훈 )와 그를 맞이하는 촌장 엄흥도( 유해진 )의 이야기. 이 영화를 두고 어김없이 감정적 과잉과 신파의 혐의가 거론되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흥행의 수치는 완성도의 지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용의 지표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세련되었는가가 아니라, 1457년의 이야기가 2026년의 관객들과 어떤 공통언어로 접속했는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공통언어의 문법은 명예와 존엄과 수치심의 논리로 풀이된다. 이 영화의 권력은 수치심의 기술자다. 수양대군의 권력은 조카를 죽이는 대신 강등한다. 왕을 상왕으로, 상왕을 노산군으로, 군을 서인의 처지로 끌어내리는 이 단계적 격하는 물리적 제거보다 정교한 통치술인데,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회수하는 것이야말로 찬탈한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명회( 유지태 )는 이러한 통치술의 집행자다. 요컨대 이 영화의 악은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수치를 배분하는 권력이며, 이것은 오늘의 관객을 공통의 언어로 묶는 문법이다. 계유정난의 정치와 우리 시대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 정치는 유사한 골격을 공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치의 정치에 맞서는 마을의 논리가 처음에는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엄흥도는 의인이 아니라 계산가로 등장한다. 이웃 마을이 유배 온 양반 덕에 번성한 것을 보고, 더 높은 신분의 유배자를 유치해 마을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유배지 유치 경쟁이라니, 이것은 명예가 곧 경제인 세계, 명예 경제의 노골적인 희극이다. 폐위된 왕은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거지 취급을 받는다. 명예의 후광이 사라진 존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이 도입부가 있기에, 이후의 전개가 힘을 얻는다. 소년이 마을의 존경을 얻는 것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 앞에서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고, 그가 마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진상품 덕분이 아니라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회수한 존엄을, 공동체가 국가 바깥의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것. 조정의 문서에서 그는 노산군이지만 광천골의 마당에서 그는 다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예와 존엄의 관계에 대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결말부에 있다. 탈출 시도가 한명회의 함정으로 무너졌을 때, 소년은 엄흥도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거짓 연기를 펼쳐 그를 살리고 홀로 붙잡힌다. 명예의 문법으로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당한 자로, 상대를 배신자로 만듦으로써 상대의 목숨을 구한다. 명예를 버리는 방식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그리고 저 유명한 마지막 장면. 소년은 활줄에 목을 맡기고, 문밖에서 그 줄을 당기는 것은 엄흥도다. 사약도 자객도 아닌 이 기이한 연출은 자살과 타살을 겹쳐놓음으로써 역사 기록의 모호함을 끌어안는 동시에, 이 영화 전체의 논리를 완성한다. 자신의 명예를 박탈한 수양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는 것, 자기 죽음의 형식만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은 존엄의 마지막 주권이다. 그리고 그 주권의 집행을 소년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을 거지 취급했다가 벗이 된 사내에게 맡긴다. 왕과 ‘사는’ 남자였던 엄흥도는 왕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는 남자가 됨으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 품은 동거의 의미를 끝까지 밀고 간다. 『 마스터플롯 』 2장에서 나는 미국의 자경단 서사가 개척민 신화 속에서 ‘애국자라는 명예’를 보상으로 받아온 것과 달리, 한국에는 서사적 보상으로서의 명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고 적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는 자리를 대신 감당한 이들은 보상은커녕 명예 회복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라고. 엄흥도는 정확히 그 계보에 위치한다. 역사의 엄흥도는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하던 때에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라는 말과 함께 왕의 주검을 수습하고 사라졌으며,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형 마스터플롯에서 명예는 언제나 후불이며, 그 지불을 보증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역사가 언젠가 갚아줄 것이라는 서사적 후불제. 이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그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보상 없이 존엄을 수습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보상 없는 감당에 익숙한 공동체가 반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논점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 두자. 관객은 단종과 엄흥도가 역사임을 알고, 그들의 우정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알면서도 운다. 같은 ‘역사의 빈칸 채우기’라도 음모론과 사극을 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 신호의 유무다. 음모론이 허구를 논픽션으로 위장해 공동체를 닫힌 확신으로 몰아넣는다면, 이 영화의 허구성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존엄의 가능성을 공동체의 상상 속에 열어 놓는다. 마스터플롯이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중간적 위상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1457년의 강가에서 수습된 것은 한 소년의 주검이지만, 2026년의 극장에서 수습되고 있는 것은 수치의 시대를 건너는 공동체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다. 그 수습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언어이고, 그것을 읽고 다시 쓰는 일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작업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박인성(문학평론가) |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 영화, 드라마, 웹소설, 만화, 게임, 인터넷 밈까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서사를 읽어내는 비평을 쓴다. 저서로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 『마스터플롯』(2026)이 있고, 피터 브룩스의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2017)를 번역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기억에 남는 불안이 있다. < 1917 >(샘 맨데스, 2019)에서 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막아낸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영화가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막사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카메라가 거의 유일하게 인물을 놓아두고 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그 나무 아래서 이야기의 문을 닫는다. 눈을 뜬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다시 나무 아래서 눈을 감는 이야기. 헛웃음이 나올 만큼 도식적인 수미쌍관 구성은 경탄스러운 카메라 무빙을 한 편의 허탈한 동화로 바꿔놓았다.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무용(無用)한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다. <1917>은 카메라의 쓸모, 자신의 효용을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것 같아 왠지 안쓰러웠다. 문득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 당시 편협한 판단을 요약하면 이렇다. <1917>은 촬영 방식이 제일 앞자리에 놓인 영화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스스로 밝혔듯 이 영화에서 물리적인 아날로그 롱테이크는 최장 7분 남짓, 나머지는 교묘한 트릭으로 이어 붙인 착시다.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위해 서사가 설계됐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 구성은 기이하리만치 게임에 가까워졌다. 참호에서 트럭으로, 불타는 마을에서 강물로 이어지는 여정마다 이름난 배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배치되어 병사를 다음 구간으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서사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한 서사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1917>의 연결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유려한 롱 컨티뉴이티 숏은 전장을 재현하는 대신 관객을 안전한 가상현실로 소환해 버린다. 영화적인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까지 추구한 결과가 역설적으로 영화로부터 멀어지는 기이한 종착지에 다다른 셈이다. 2020년 무렵의 나는 그 어긋남을 두고 ‘영화를 향한 향수병’이란 딱지를 붙였다.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앓는 병. 향수병은 애초에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로 성립하는 상태이므로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고백한다. 그땐 일말의 허세와 더불어 형식주의자를 향한 결벽 비슷한 감정이 작동했던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 유난히 위화감을 느끼는 편이다. 스타일에는 목적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결과물로 이어진 형태가 곧 형식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방향과 결과, 의지와 형태가 어긋난 순간들을 만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뭘까. 시간이 흘러, 정확히는 새로운 세대의 물결을 겪으며 질문의 방향이 슬며시 바뀌는 중이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입에 올리던 ‘영화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 고정불변의 대상이 있긴 한 걸까.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것만큼 본질적이고 동시에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그건 목적지라기보단 그저 지향에 불과하다. 본래 큰 질문에서는 답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현 시점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영화적인 것’이란 지표에 절대성 따윈 없다는 믿음이다. 아주 협소한 경험에 근거하여, 영화적인 것의 실체는 ‘경험에 근거한 익숙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 시절의 관습이다. 심지어 이 관습의 수명은 길어야 20~30년, 대체로 한 세대보다 짧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완성된 몇몇 형식들을 ‘시네마틱’이라 일컫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칠게 말해 오늘날 영화적인 것이라며 유통되는 상당수의 기법은 1950년대 이후, 좁게 잡으면 1970~80년대에 유행하거나 영향을 미친 스타일에 가깝다. 이를테면 슬로우 시네마가 롱테이크를 거쳐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1917>의 롱 컨티뉴이티 숏이 증명하고자 한 ‘영화적인 접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도 그저 본인이 만들어온(그리고 지나온) 영화라는 영토에 대한 향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은 의심. <1917> 중 (사진: IMDb / © Amblin Entertainment, ㈜스마일이엔티, ㈜씨제이이엔엠) 의심을 심화시킨 건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이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윤단비 감독의 심경을 상상했다. 이 젊은 창작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윤단비 감독의 영화에는 지난 세기의 끝자락, 그 언저리의 여름이 고여 있다. 2층 양옥집과 낡은 선풍기, 대야에 담긴 수박, 한없이 늘어지는 오후.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재현한 그리움에 정확한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시네필들이 직접 살아보거나 겪어본 적 없는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골목을 그리워한다. 요컨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추억하기, 원본 없는 노스텔지어라고 해도 좋겠다. 엉뚱한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헤어진 적 없는 연인을 그리는 노래들을 떠올렸다. 최신 K팝, J팝을 들으며 애틋한 이별을 앓는 요즘 세대와 마찬가지로 돌이켜보면 나 역시 신승훈의 노래를 들으며 아직 겪은 적 없는 사랑을 먼저 배웠다. 그 감정은 가짜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험의 원본이 없을 뿐, 패턴과 표현 방식을 공유하는 순간 감정은 실제로 발생한다. <남매의 여름밤>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 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처럼. 지정학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리움의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그 여름밤은 감독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지나온 무언가를 자극한다. 직접 겪지 않아도 향수병을 앓을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게는 작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남매의 여름밤> 중 / © 오누필름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유튜버들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 백룸 >(케인 파슨스, 2026)과 < 옵세션 >(커리 바커, 2026)은 흥미롭게도 모두 고전적 문법의 영화다. 10대의 침실에서 태어난 유튜브 영상 <백룸>은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의 이미지를 가운데 두고 해석과 재창작을 댓글창과 위키트리에 맡긴 열린 텍스트다. 반면 영화 <백룸>은 오리지널 각본 위에 배우의 얼굴을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닫힌 이야기다. 배우 중심의 단단한 서사, 처음과 끝이 닫힌 세계. 하지만 정작 케인 파슨스는 <백룸>을 영화화하면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유튜브의 작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럼에도 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고 함께 집단체험을 공유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극장에서 본 인생 공포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소가 주는 경험의 확산은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극장영화로 융합되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변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건 바뀌지 않으며 디졸브 된다. 기성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러하듯 프리 프로덕션 중심의 예술이다. 현장에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포스트 프로덕션 중심이다. 렌즈가 포착한 진짜보다 소프트웨어로 빚어낸 진짜를 신뢰한다. <백룸>의 VHS 질감이 아날로그 카메라가 아니라 무료 3D 소프트웨어의 후반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파슨스가 극장에 가져온 것은 유튜브의 문법이 아니라 유튜브의 프로세스였다. 문법이 아니라 프로세스의 융합.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문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움을 향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길을 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소프트웨어로 아날로그의 유령을 위조해낸 이 제작 방식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향수에 대한 완벽한 은유 아닌가. <백룸>의 배경은 1990년, 화면의 질감은 VHS다. 주 관객층인 20~30대는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백룸>의 모방된 질감이 의도와 달리 그들에게 기이한 안락함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룸>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연결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쓸모를 강요받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디지털에는 그리워할 게 참 많다.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꾸는 필터가 유행하고, 멀쩡한 고화질 영상을 VHS 질감으로 되돌리는 레트로 변환이 놀이가 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질감 그 자체가 그리움의 대상이, 마음을 눕힐 안정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대표되는 시네필 세대 창작자들과 본질적인 패턴은 다르지 않다. 사실 이건 봉준호 , 박찬욱 같은 앞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가게와 시네마테크에서 자란 이들에게 영화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까지 소급되는 고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영화라는 고향에서 시간을 초월해 만난다. 심지어 디지털은 이 영토를 무한정 확장해 우리 앞에 소환 중이다. <백룸> 중 / 사진: IMDb( 1 , 2 ) / © A24 <백룸>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시간의 때가 묻은 노란 벽지와 형광등 불빛, 낡은 카펫에서 안식을 찾는 세대가, 인류가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어두운 방에 모여 함께 악몽을 꾸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이야말로 현실에서 두 시간 동안 잠시 미끄러져 나가는 이행의 공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리미널 스페이스다. 그리하여 출구 없는 방은 무섭고, 동시에 그립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공간이 과잉 연결의 시대를 사는 세대에게는 지옥이면서 동시에 도피처가 되는 셈이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한 몸이라는 이 양가성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추억하는 마음과 함께 한 세대를 극장으로 데려온 힘일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고전적인 영화는 그리워할 대상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럼 그 시절의 감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향수병에 빠진다, 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향수에 빠진 사람들은 가만히 병을 앓는 대신 온갖 것을 시도한다. 로저 디킨스는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로, 윤단비는 원본 없는 여름밤으로, 파슨스는 위조된 VHS의 유령으로. 어쩌면 새로움은 바로 그 발버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향할 수밖에 없는 욕망. 일치할 수 없음에도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창작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17>을 향수병이라 명명했을 때 내 감정의 바탕은 안타까움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을 얼마든지 추억할 수 있는 시대라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병의 조건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애잔함보다는 멈추지 않는 도전과 활력을 느낀다. 그 시절 나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도 썼다. 어쩌면 그건 시대를 구분하며 벽을 치는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건, 매체 간 문법이 섞이면서 공유되는 확장의 순간들이다.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그리움은 앓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빚어내는 소리로 들린다. 향수병은 나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불치병은 도리어 불사의 동력이 되기도 하나 보다. 문득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2007)가 떠오른다. 이것이 절멸의 길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인지 아직 단언할 순 없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구 인류의 땅인지, 신 인류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미 무언가 변했고 부지런히 더듬어가며 뒤따르는 중이다.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다시, 비평 과거에 봤던 영화가 요즘은 달라 보인다면, 관점은 언제부터, 어떻게, 어떤 이유로 달라진 걸까. 시간을 따라 서로 다른 형태와 색깔을 남긴 비평의 궤적을, 필자가 직접 뒤따라가 봅니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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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구술 컬렉션(1) 문달부 편 | 12건 | 2025-04-25 | 2025-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