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시선, 감각의 정원
© CoMix Wave Film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카메라와 렌즈의 광학적 특성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가져와 정교하게 구사한다. 신주쿠 공간의 실사 이미지를 작화의 배경으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 언어의 정원 >(2013)은 이러한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실사와 달리 현실의 재현으로부터 자유롭다. 작화와 배경, 캐릭터와 서사의 개연성까지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만큼은 의외로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시선을 반영한 리얼리티 속에서 샷을 구성한다. <언어의 정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특하다. 인간의 시선을 넘어 비인간의 시선과 높이에서 바라보며 사물과 사물 사이의 시선을 연결한다. 그 사이에 인간이 놓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수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심원을 만든다. 카메라는 천천히 틸업한다. 일반적으로 팬이나 틸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운동을 완성하지만, 이 첫 컷의 틸업은 끝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컷은 광각 렌즈로 전철에 밀착한 채 함께 달리는 바퀴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선로보다 낮은 위치, 인간의 신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에 놓여 있다.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실사영화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시점이다. 카메라가 마치 땅속에서 전철에 붙어 함께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컷은 고정된 카메라가 화면 가득 수면을 응시하고, 두 번째 컷은 전철과 함께 바닥을 질주한다. 이 두 컷은 시선의 높이뿐 아니라 대상과의 거리, 피사체의 속도감, 운동까지 극단적으로 벌려 놓는다. 쉽게 연결될 수 없는 두 개의 시선을 과감하게 이어 붙이며 영화는 처음부터 가장 먼 간격을 만들어낸다.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정원의 빗소리는 전철 바퀴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기계음과 충돌한다. 두 번째 컷의 마지막에는 반대편 선로를 달리는 전철이 교차하고, 그 순간 선로는 진동으로 흔들린다. 전철에 밀착된 카메라는 그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선로의 떨림은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감각으로 전환된다. 비인간의 위치에 있던 카메라는 진동을 통해 하나의 신체를 획득한다. 세 번째 컷은 다시 정원으로 돌아온다. 마치 첫 번째 컷의 틸업이 끝났다면 도달했을 풍경처럼, 물 위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화면을 채운다. 빗방울은 잦아들며 동심원도 적아진다. 빗소리 역시 작아지며 전철과 선로가 만들어낸 거친 진동과 대조를 이루며, 정원의 고요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사진: IMDb( 1 , 2 , 3 , 4 ) / © CoMix Wave Film 이때부터 타카오의 1인칭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레이션 위로 이어지는 쇼트들은 그의 시선을 따르지 않는다. 전철 내부 천장 시점, 선로 바닥에서 플랫폼을 올려다보는 시점, 전철역 플랫폼 바닥과 전철 외관에 밀착한 시점 등은 어느 인물의 시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타카오가 전철에서 내린 뒤 바라보는 도쿄 시청 역시 그의 시점과는 어긋난 구도로 제시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의 시선을 재현하기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위치, 혹은 사물들의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언어의 정원>은 처음부터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사물의 시선으로 세계를 조직한다. 사진: IMDb / © CoMix Wave Film 타카오가 비 내리는 정원으로 들어선다.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착한 첫 샷은 초점이 먼저 뒤편의 배경에 놓여 있다. 타카오의 얼굴은 잠시 흐릿하게 뭉개져 있다가 뒤늦게 초점이 맞는다. 렌즈 초점 이동으로 화면 전체가 숨쉬는 듯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드문 선택이다. 카메라가 단순히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렌즈의 광학적 움직임 자체를 이미지의 리듬으로 만든다. 타카오와 유키노가 공원에서 만나는 정자 안 초반 투샷들은 대부분 바닥 가까운 낮은 위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앞서 전철 바퀴를 따라 달리던 카메라와 플랫폼을 올려다보던 선로의 시점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하다. 때로는 나무나 흔들리는 풀 너머 두 사람을 바라본다. 첫 투샷에서는 흔들리는 풀이 유키노의 얼굴을 가리며 그녀의 감정을 대신한다. 두 사람을 함께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는 인간의 눈높이가 아니다. 카메라는 사물의 자리에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언어의 정원>에서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난 또 다른 이미지는 색수차의 빛이다. 색수차는 렌즈 안에서 빛이 분산되며 부서진 무지개 빛처럼 나타난다. 렌즈의 광학적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인간의 수정체가 발견할 수 없는 빛이다. 타카오가 집 안에서 구두를 만들 때 방안을 밝히는 광원들에서 색수차의 빛 플레어가 빛난다. 오래된 집의 불안정한 전기구조를 반영하듯 이 색수차 플레어가 미세하게 떨린다. 이 색수차의 빛은 유키노의 집 안에서도 등장한다. 장마가 끝난 뒤 뜨거운 여름의 강렬한 햇빛 아래 도쿄의 풍경 위로, 비 내리지 않는 정원에서도 이 빛은 흔들리며 나타난다. 서로 다른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두 인물의 감정은 카메라만이 포착할 수 있는 분산된 빛으로 화면 안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렌즈 안에서 갈라진 색수차의 빛은 만나지 못하고 말 못하며 머뭇거리는 두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떨리는 빛으로 표현한다. <언어의 정원>은 렌즈의 불완전성과 결함의 흔적을 이미지 안으로 가져온다. 완벽한 인간들의 사랑이 아니라, 불안하고 외로운 인간의 감정을 흔들리고 부서진 빛을 통해 연결한다. 렌즈 안에서 발생한 광학적 흔적은 인물들의 감정적 흔들림과 겹쳐진다. 사진: IMDb( 1 , 2 ) / © CoMix Wave Film 오랜만에 정원 정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비에 옷을 말리러 유키노 집으로 간다. 타카오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유키노는 선생님이라 부르라 하며 다음 주 이사를 간다고 말한다. 그 말에 타카오는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입은 채 집을 나간다. 이 순간 영화의 인트로에 등장했던 카메라의 지각이 다시 소환된다. 타카오가 문을 열고 나간 뒤 이어지는 컷은 그가 마시던 컵이다. 처음에는 초점이 배경에 머물러 컵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뒤늦게 컵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영화 인트로였던 타카오의 정면샷 이후 처음 등장하는 초점이동 컷이다. 다음 컷에서는 카메라가 벽을 따라 왼쪽으로 트랙킹하며 초점이 나간 상태로 울고 있는 유키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유키노의 버스트샷이 보여지는데, 한 번 더 초점이 나간 상태의 유키노를 먼저 보여준 후 뒤늦게 초점이 맞는다. 그리고 그녀는 타카오를 쫓아 밖으로 뛰어나간다. 영화 초반 타카오에게 적용했던 초점이동은 후반에 유키노에게 반복된다. 렌즈의 광학적 움직임은 두 사람을 같은 리듬 안에 놓으며,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감정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한다. 이때 영화 내내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분산된 무지개 빛 색수차도 화면의 중앙으로 들어온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은 아파트 외부 계단에서 위아래로 마주보고 선다. 타카오가 울음을 떠뜨리며 유키노에게 감정을 쏟아낸다. 두 사람의 감정이 가장 격정적으로 치닫는 순간,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닌 계단 난간 밖에 위치하고 모서리에 초점을 놓는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넓은 OS샷에서도 초점은 둘 중 누구에게도 머물지 못한 채 둘 사이를 오간다. 유키노가 타카오에게 뛰어가 끌어안는다. 내리는 비 사이로 강렬하고 따뜻한 햇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감싼다. 색수차도 두 사람을 감싸고 완벽한 원의 색수차가 도쿄 풍경 위로 떠오른다. 사진: IMDb( 1 , 2 , 3 , 4 ) / © CoMix Wave Film 언어의 정원은 카메라의 지각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풀어낸 애니메이션이다. 감각은 인간의 지각보다 카메라의 지각 위에서 생성된다, 렌즈의 광학적 흔적과 사물의 위치에서 언어 이전의 감각을 포착하고, 언어가 이미지로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각은 언어화 될 수 없다. <언어의 정원>은 결국 언어의 정원이 아니라 감각의 정원이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