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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판 위의 여인
# 구로사와 기요시는 걸작을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명장면을 만드는 감독이다. 물론 이건 다소 과잉된 진술이다. 하지만 < 은판위의 여인 >을 보고 나면 과도함을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했고 기요시의 작품들 중에서는 하위에 속할 만한 <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조차 몇몇의 밀도 높은 명장면을 보유한다. 특히 살인마가 피해자들을 가둬 놓은 감금실 장면은 보는 이의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한다. 분위기와 결이 현격하게 다르지만 <은판위의 여인>에는 명장면들이 훨씬 더 많고 무엇보다도 이 점이 이 영화의 마력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부정확하거나 싱거운 표현이 될 것 같다. <은판 위의 여인>은 명장면들의 영화다. # 따라서 다음은 해당 장면들에 관련된 몇 가지 메모다. 하지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미개봉작이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최소한이나마 정리해야한다는 필요를 느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식으로 쓰고 싶어졌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걸맞게 사사로운 형식으로 써보는 것이 좋겠다고 구실로 삼았다. 영화를 보고 떠올린 단상 몇 가지를 거칠지만 짧게 적었다. < 은판위의 여인 >을 관람한 이들에게는 해당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소 난감하더라도 도리어 이 영화의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저 카메라는 왜 저렇게 큰 것일까. 실제로 저렇게 큰 카메라가 있었다는 말일까. 있다고 해도 저 대형 카메라의 존재는 내게 지금, 실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스테판(올리비에 구르메)의 사진 작업 조수로 온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장(타하르 라힘)조차 스테판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이게 뭔가요?”라고. 스테판은 무뚝뚝하게 말해준다. “카메라야”라고. 그러니 이것은 촬영 장비에 관한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을 법한 사진 조수조차도 못 알아보는 카메라가 아닌가. 영화 속 스테판의 대형 카메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스테판은 19세기 은판 사진술인 ‘다게로타입’을 현대에 와서도 고수하는 사진작가다. 그런데 그의 카메라의 몸체는 성인 남자 키에 맞먹을 정도로 높고 길이는 훨씬 더 길다. 이런 카메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했는지) 아닌지, 그 실존 유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나는 이 비상식적으로 큰 카메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 크기 때문이고, 크기 때문에 강조된 형상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화에 음산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건 대저택이라는 흔한 공포영화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 구형의 대형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카메라라고 말했지만 이건 카메라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차라리 괴수(괴물)가 아닐까. 기요시는 구식으로 오랫동안 찍어야 하는 은판 사진술과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유사성을 시사했는데,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괜찮다. 이 카메라가 외눈박이에 주글주글한 검은 거죽의 형상을 지닌 대형 괴수처럼 느껴진다는 게 더 중요하다. 스테판은 이 괴수-카메라 앞에 딸 마리(콘스탄스 루소)를 모델로 세워 자신의 예술을 실현한다. 스테판이 마리의 몸을 고정기에 묶고(그 고정기란 중세 시대의 고문 기계를 또한 연상시킨다) 장시간 노출로 사진을 찍을 때, 마치 괴수가 재물의 육체와 영혼을 서서히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나의 상상이기만 한 것일까. # 어떻게 된 일이었던가. 이상하게 기억이 명확하질 않다. 아버지가 실수로 밀었던가. 마리가 실수로 미끄러졌던가. 이유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기요시의 영화답게 사건은 화면 바깥에서 벌어지고 그 사건의 결과는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카메라는 계단을 정면으로 잡고 있다. 그런 뒤에 계단 주위를 천천히 얼마간 가로 지르며 서성인다. 이 카메라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해질 무렵, 갑자기 와르르 무언가 쏟아져 내린다. 마리의 몸이 계단을 따라 굴러 내려온다. 화면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쏟아지듯이 혹은 던져지듯이 추락한다. 기요시는 이 장면에서 드라마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 그 추락의 급작스러운 물리적인 충격이 더 강력하다. 물론 이 상황은 기요시의 다른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 도쿄소나타 >에서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이층에서 혼내고 있었고 카메라는 1층에 있었다. 그 때 계단을 따라 어린 아들의 몸이 갑자기 거꾸로 추락한다. 하지만 < 은판 위의 여인 >에 이르러서야 계단-추락의 장면은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이것과 유사한, 즉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내리 꽂히는 기요시의 운동적 충격은 여러 영화에 다양하게 배치, 전개되어 왔을 것이다. 예컨대 < 회로 >를 다시 보다가 이런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다. 허공, 즉 프레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수직강하 하면서 한 남자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붉은 옷의 유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 기요시가 갑작스런 물리적 충격 뿐 아니라 은근한 심리적 표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장과 마리가 함께 살기로 한 뒤의 일이다. 하지만 마리가 사람인지 유령인지 장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관객은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는 없다. 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강가의 수색 작업을 목격하고는 그곳에서 서성거린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마리의 시체가 떠오르지나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때다. 물속에서 서서히 잠수부가 떠오른다. 마리의 시체 대신 혹은 그 누구의 시체 대신 잠수부의 떠오른 상체를 장은 잠시 공허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에는 사실상 아무런 설명이 없다. 물속에서 떠오른 잠수부와 그를 바라보는 장의 시선 밖에는 없다. 그 둘 사이의 뚜렷한 관계도 없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며 심리적 목소리가 만연하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녀가 혹시 유령은 아닌가 하는 장의 두려운 심리를 이 장면은 간결하고도 특별하게 외재화 해낸다. # 장과 마리가 떠나고 스테판은 혼자 남겨진다. 아니 사실은 죽은 아내의 유령과 둘이 남겨진다. 그리고는 그가 화원에 머무를 때 아내-유령이 마침내 스테판을 덮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의 기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요시 영화의 유령의 형상과 운동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명확하고 빠르기도 하고 흐리고 왜곡되고 느리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령(성)은 처음 본 것 같다. 이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괴이한 정지 쇼트들이 몇 개 연이어졌던 것 같고 아내-유령은 각 쇼트마다 정지된 포즈로 박혀있었던 것 같다. 정지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 정지된 채 팔을 뻗은 그녀의 몸,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스테판에게 달려든다. 그 때 이런 질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왜 그녀의 모든 몸짓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아내-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는, 아내-유령이라는 사진들이 달려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 사진이 달려든다는 인상이 더 확실하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 유령의 형상은 마치 빛 번짐 현상이 일어나 망쳐진 사진 혹은 하얗게 화이트 아웃 되어 버린 사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스테판의 사진술 혹은 재현에의 집착이 낳은 부작용이 이런 유령의 형상과 운동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우린 짐작하게 된다. # 스테판이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면 장은 마리-유령 이라는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아침인 것 같다. 장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런데 곁에는 있어야 할 마리가 없다. 장이 시선을 돌리면 카메라는 서서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하고 방의 저 구석 문 뒤에 마리가 하얀 속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 간단한 패닝은 간단한데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우아함과 불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것이 < 회로 >에서 시도되었던 한 장면을 질적으로 집중 도약시켜 이뤄낸 장면이라는 것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유령과 벽이라는 기요시 영화의 유령성에 대한 우아한 터치임은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느꼈던 것 같다. 기요시의 유령들은 종종 벽에서 출현하여 벽으로 사라져간다. 그 벽에 마리가 몸을 바짝 붙이고 얼어붙은 채로 서 있을 때 거기에서는 기이한 슬픔이 느껴진다. 화면 바깥의 저 비가시적 무언가에 이르는 그 힘의 방향과 세기가 우아하고 불길하다. 혹은 장의 두려움과 의심의 지점으로부터 마리의 불안정하면서도 위축된 몸이라는 지점으로 공기를 몰아가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해가는 카메라의 그 움직임이 일으키는 힘의 방향과 세기만으로도 이 장면은 더 없이 아름답다. 이런 장면은 쉬운 것 같지만 흔치 않다. # 써놓고 보니 < 은판위의 여인 >은 기요시 영화의 명장면들 모음집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재활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제약된 조건 때문에 시도는 했으나 집중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금 여기서 마음껏 힘주어 세공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최근의 기요시는 인간과 유령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유령의 공존의 세상을 자주 그린다. 그럼에도 대립의 세계에서 공포를 극화할 때 사용했던 미학을 이 공존의 장 안에서도 재등장시킨다. 공존이라는 주제와 공포를 극화했던 미학적 효과 사이에 원활한 접점이 찾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실은 기요시의 길에 대해서는 언제나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는 차라리 그의 영화 < 회로 >의 그 유명한 유령처럼 멈추지 않고 걸을 뿐이다.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한 번 크게 휘청 거려 넘어질 뻔 하다가도 또 다시 일어나 걸으면서 끈질기게 영화를 만든다. 때문에 그에게는 걸작의 행진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필모그래피가 휘청거린다 해도 각 영화에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은판위의 여인>은 가장 중요한 일례 중 하나다.
[신판주말의명화]건 우먼
일본에는 B급 영화의 전통이 선명하다. 메이저영화사가 아닌 소규모의 영화사에서 만들어낸 영화들을 주로 칭하지만 불황이었던 1970년대에는 도에이, 니카츠, 신도호 등의 메이저에서도 기묘한 영화들을 양산했다. 이시이 테루오의 <공포기형인간> <망팔무사도>와 스즈키 노미후리의 <도쿠가와 섹스 금지령> <성수 학원> 같은 ‘불량성감도’영화를 만든 도에이가 선두였다. 그중에서도 도에이의 여반장 시리즈와 공포여자고교 시리즈, 사소리 시리즈 등은 ‘핑키 바이올런스’라고 불렀다. ‘불량’ 여자들의 세계를 그린 야하고 폭력적인 영화들이었다. 80년대에 V시네마로 이어진 B급영화의 전통은 지금도 <라이브>와 <데드스시>의 이구치 노보루, <헬 드라이버>와 < V 소녀 대 F 소녀 >의 니시무라 요시히로 등의 감독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미츠다케 쿠란도의 < 건 우먼 >은 일본 B급 영화의 흐름에 놓인 영화다. 벌거벗은 여인이 등장하여 잔인한 살육을 벌인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여성의 팔에 총을 장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이블 데드 > 시리즈의 애쉬처럼 팔에 전기톱을 단 소녀가 등장하는 <머신 걸>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팔에 사이코건을 달고 싸우는 우주해적 코브라도 있다. <건 우먼>의 일본 제목은 ‘여체총(女?銃)’이었다. 그런데 여체가 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체에 총을 집어넣는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에서 제임스 우즈가 배에 총을 집어넣는 장면이 있다. 그 몽환적인 장면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상한 몽상처럼 흘러가는 괴이한 영화가 <건우먼>이다. 재벌의 아들인 하마자키는 수많은 여성을 강간, 살해했다. 그에게 아내를 잃은 의사 마스터마인드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인신매매 조직에서 마유미를 데려온다. 마약중독에서 벗어난 마유미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사격과 격투술을 배운다. 미국으로 도망 온 하마자키는 늘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있다. 유일한 기회는 더 룸이라 불리는 곳이다. < 호스텔 >의 그곳처럼, 부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파라다이스 혹은 지옥. 시체애호증인 하마자키는 더 룸에서 변태적 욕망을 해소한다. 보디가드가 따라가지 못하지만 마유미도 무기를 가져갈 수 없고, 경비에게 무기를 빼앗아도 지문 인식이기에 사용이 불가능하다. 벌거벗은 채 시체로 위장해 들어가야 하는 마유미가 총을 가져갈 방법은 단 하나다. 몸을 갈라 총을 집어넣고는 다시 꿰매는 것이다. < 건 우먼 >은 시종일관 비장하다.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하는 행동 모두가 처절하다. 그러나 현실을 연상시키는 리얼리티는 없다. 지극히 과장된 상황과 연기만이 있다. 마유미의 스토리를 들은 킬러가 말한다. “그거 일본 만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뤽 베송 영화나.”영화 속 캐릭터조차도 딱히 현실이라고 믿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마유미가 자신의 몸을 갈라 총을 꺼낸 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22분이다. 그 이상이면 출혈 과다로 죽게 된다. 점점 몽롱해져 가는 상황에서, 온몸을 적신 피가 유니폼이 된 마유미가 악당들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적을 바라볼 때의 마유미의 눈은 강렬하게 불타오른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지만 마유미가 펼치는 액션은 에너지가 넘쳐 보는 사람을 들끓게 한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만 마유미도, 마스터마인드도 모든 것을 걸었다. 마스터마인드는 마유미를 각성시키기 위해 많은 이를 죽였다. 때로 무고한 이도. 하지만 마스터마인드는 말한다. ‘복수를 끝내고 나면 나는 지옥으로 갈 거야.’자신이 나락으로 빠질 것을 알면서도 복수를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마유미는 그의 도구로 시작했지만, 기꺼이 자신의 의지로 킬러가 된다. < 건 우먼 >의 영상도, 음악도, 마유미를 연기하는 아사미도 모두 70년대의 ‘핑키 바이올런스’를 연상시킨다. ‘핑키 바이올런스’는 단지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남자를 압도하면서 그녀들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건 우먼>의 마스터마인드도 그런 말을 한다. “남자는 피의 1/3만 흘려도 죽지. 여자는 2/3을 잃어도 아직 살아 있어. 신은 남자보다 여자를 정교하게 만들었어.” 마유미를 보고 있으면 <여수 701호 사소리>를 비롯해 ‘핑키 바이올런스’의 그녀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드모델로 시작한 아사미는 AV 배우와 영화배우를 겸업했다. 그러다 만난 이구치 노보루 감독에게 ‘핑크 바이올런스’의 여배우들을 닮은 마스크라는 말을 들었고, 주로 미소녀 스타일을 보여줬던 아사미는 점차 액션계열 배우로 이미지를 바꾸게 된다. 2009년에는 AV를 은퇴했고 <고스 로리 처형인> <헬 드라이버> <데드 스시> < 아이언 걸 > 등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 건 우먼 >을 만든 1973년생인 미츠다케 쿠란도 감독은 고등학교 때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방송과 영화판에서 일하다가 2004년 <몬스터즈Monsters Do not Get to Cry>로 감독 데뷔를 한다. 영화에 뛰어든 계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격돌Dual>과 미스미 겐지의 < 아들을 동반한 검객 >였다고 한다. 2008년에는 스승으로 여기는 오카모토 키하치에게 바치는 <사무라이 어벤져>의 주연, 각본, 연출, 제작을 했다. 2013년 작인 <건 우먼>은 유바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2015년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사무라이 어벤져>에서 검, <건 우먼>에서 총을 다룬 미츠다케 쿠란도는 신작인 < 가라데 킬 >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무기로 쓰고 있다. 미츠다케 쿠란도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인 영화를 만든다. 그것도 B급의 잔혹하고 뒤틀린 영화를. 그걸 일본에서는 ‘에로 그로 넌센스 & 바이올런스’라고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조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는 1930년대 일본에 형성된 오랜 전통이다.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를 쓴 미리엄 실버버그의 말에 따르면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말은, 정당 정치에 대한 고발이나 거리에 팽배한 호전적 분위기를 무시한 채 감각적 쾌락이 빚어내는 퇴폐에 심취한 것처럼 보였던 데카당트로 표현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건 우먼 >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전통이 100여 년 가까이 흐르면서 ‘저패니즘 익스트림’으로 변형되었고 확장되었다. <건 우먼>은 그런 전통의 연장선에 놓인 기묘한 영화다.
[한국영화걸작선]최후의 증인
“굉장한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몰입해서 봤다. 이두용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다 챙겨볼 생각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 최후의 증인 >을 처음 본 베를린영화제 포럼 위원장 크리스토프 테레히테는 이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올해 이두용 감독의 회고전을 준비한 입장에서 해외 영화제의 이런 반응은 일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영상자료원에서 때마침 디지털 복원한 <최후의 증인>을 완성, 부산에서 선보인 것도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이 영화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이두용 감독 본인은 이렇게 <최후의 증인>이 다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데 큰 기쁨을 표했다. 그가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1980년 제작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검열 문제 때문에 40분 이상이 삭제된 채 개봉했고 완전히 잊힌 영화가 됐다. 2006년 삭제 이전 원본이 공개되자 비로소 이두용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얻게 됐고,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올해 화면과 음질이 개선된 복원판을 선보인 것이다. 국내외 영화인 가운데 많은 이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후의 증인>에 출연했던 배우 최불암, 동시녹음을 담당했던 배우 양택조 씨도 완성된 지 36년 만에 처음 <최후의 증인>을 봤다며 감격했다. 영화 외적인 화제가 많지만 < 최후의 증인 >은 작품 자체로 더 많이 논의돼야 할 영화다. 한국전쟁에 기원을 둔 비극의 사슬을 그리는 이 영화에는 2명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등장한다.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대변하는 듯한 이 두 사람은 손지혜( 정윤희 )와 황바우( 최불암 )이다.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의 딸인 손지혜는 토벌작전을 피해 숨어있던 곳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황바우 덕에 간신히 살아나지만 다시 몸을 빼앗기고 원치 않는 사람과 20년을 살아야 하는 고통을 당한다. 순박한 남자 황바우는 손지혜를 지키려 무던히 애쓰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출옥을 한 뒤에도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2명 모두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이건만 그들은 철저히 짓밟힌다. 전쟁의 그림자 아래 숨어 있던 인간들의 욕심이 괴물 같은 형체를 드러내고 약자들의 몸과 마음을 찢어놓는다. 이들의 한 많은 사연을 파헤치는 인물로 형사 오병호( 하명중 )가 등장한다. 영화는 오병호 형사가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수십 년에 걸친 기막힌 사연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이두용 감독의 대담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능력이 십분 발휘된다.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힘과 무게가 대단한 영화인데, 그중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오병호 형사의 캐릭터이다. 차디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낡은 코트를 입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시골 마을을 누비며 사건을 추적하는 이 남자는 처음부터 대단한 정의감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때로 야비한 느낌마저 준다. 그가 지리산 빨치산 부사령관이었던 강만호를 만나 그의 증언을 듣고 취하는 태도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곧 죽을 것 같은 노인 강만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줄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태도로 강만호의 집을 나서던 오병호 형사는 강만호의 죽음을 목격한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말로 사람이 죽었다. 오병호 형사가 나중에 손지혜와 황바우의 사연에 감정이입을 하며 그들 편에 설 수 있던 것은 자신이 강만호를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두용 감독은 오병호 형사를 정의감 투철한 영웅이라는 일차원적 캐릭터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어둠에 다가가며 결국 스스로 감당 못 할 진실에 도달한다. 역사의 진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역사의 희생자가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졌는지를 오병호 형사는 최후의 증인이 되어 목격한다. 분단의 아픔을 다룬 수많은 영화 가운데 < 최후의 증인 >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직접 전쟁을 다루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그리지 않고서도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여준다. 가해자들은 단죄되지 않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더해만 간다. 영화는 이 비통한 사연이 대를 이어 유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후의 증인>이 제작된 1980년 광주에서 억울한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영화 속 비극은 다시 현실이 되고 세월호의 침몰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 사리사욕이 빚어낸 한국 현대사를 <최후의 증인>은 증언할 뿐 아니라 예언하고 있다.
아쿠아리우스
< 아쿠아리우스 >의 주인공은 은퇴한 음악평론가인 노년의 여성 클라라(소니아 브라가)다. 그녀는 브라질 해변 도시 헤시피(Recife)의 1940년대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 아쿠아리우스에 산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말아 올리고 바다로 나가 해수욕을 즐긴다. 방대한 LP 컬렉션에서 음반 하나를 꺼내어 즐기며 평화롭게 낮잠을 즐긴다. 가정부 라드자니와 수다도 떨고 그녀를 마치 박물관의 밀랍인형같이 바라보는 젊은 기자와 인터뷰도 한다. 주말이면 남동생 부부와 조카가 방문하기도 하고 가끔 이혼한 딸이 손자를 맡기면 할머니 역할도 곧잘 해낸다. 그렇다고 그냥 하릴없는 뒷방 할머니인 것만도 아니다. 로맨스에 대한 열망도 갖고 있고, 훌륭한 섹스를 위해 기꺼이 남창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런 클라라의 일상은 대형 건설회사가 아쿠아리우스의 재개발을 시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건설사는 클라라의 이웃과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접근, 자신의 모든 역사를 담은 집을 포기하지 않는 클라라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쿠아리우스에는 불편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빈 윗집에서는 밤새 요란한 섹스파티가 벌어지고 수백 명이 모이는 종교집회가 열리기도 하며 복도와 계단이 배설물 천지가 되기도 한다. 클라라는 이 모든 상황들이 그녀를 퇴거시키기 위한 건설사의 계략임을 깨닫지만, 정계와 언론까지 장악한 건설사에 대항하기란 바위로 계란치기일 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침입’의 증거를 확보한 순간, 클라라는 당당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부숴버리기로 작정한다. 다수의 평론가들이 ‘캐릭터 연구의 훌륭한 판본’이라고 지적했듯이, 클레베르 멘돈사 필루는 러닝타임 내내 마치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클라라를 관찰한다. ‘자본의 폭압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라는 영화의 시놉시스가 제공하는 어떤 기대에 비추어본다면, 이 연구는 짐짓 장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중반부터 속도를 내는 흡사 스릴러적인 전개나 < 에린 브로코비치 >의 줄리아 로버츠스러운 클라라의 회심의 반격으로 끝나는 짧은 엔딩에 비하면, 클라라의 과거와 현재, 기억과 일상, 사물과 주변을 두 시간 반가량 내내 차분하고 꼼꼼하게 관찰하는 영화의 대부분은 의아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클라라의 재구성’이야말로 이야기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주체의 현시에 가장 중요한 원리다. 멘돈사 필루는 고전적인 영웅 서사는 개인의 투쟁과 정의의 구현을 담아낼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그가 궁금한 것은 개인은 어떤 질료들로 삶을 구성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삶은 어떻게 개인의 감정과 행동을 견인하는 준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멘돈사 필루가 관찰하는 클라라의 삶,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과 사람들 같은 삶의 질료들은 클라라라는 하나의 일관된 캐릭터를 목적으로 하는 인과율에서 자유롭다. 마치 격자를 짜듯, 그 질료들은 클라라의 상이한 욕망, 욕구, 불안, 당당함, 허전함을 영화 안에 배치한다. 그 격자 안에서 그녀는 당차고 고집 세지만 외로운 노인이고 유방암으로 가슴 하나를 도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성적 매력을 소유한 여성이며 모든 이에게 너그러워 보이지만 결국 계층의 도덕률과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산계급 중산층이다. 이러한 캐릭터 연구는 멘돈사 필루가 믿는 어떤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보인다. 기실, 개인의 역사를 구성하는 수많은 감정과 행동, 태도는 하나의 유형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종종 각각은 서로 대항하거나 모순된다. 영화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클라라의 입체적인 면들을 쌓아나간다. 그러나 영화가 차이와 모순으로 구성된 개인으로서의 클라라를 관객과 조우하게 하는 보다 흥미로운 방식은 다른 데 있다. < 아쿠아리우스 >를 언급하는 모든 평문이 빼놓지 않는 클라라의 이모 루시아의 서랍장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젊은 시절 유부남 애인과의 열정적인 섹스라는 루시아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품고 있는 서랍장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클라라의 현재에 머무르면서 과거의 현재의 공존함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사물이다. 영화 내내 감독은 마치 장난하듯 무심하게 이 서랍장을 힐끗힐끗 보여주면서 현재와 기억이 맺는 찰나적이지만 강렬한 순간들을 제공한다.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에 등장하는 브라질 가수 타이구아라의 노래 ‘오늘 hoje’의 첫 소절이 들려주듯이(“오늘, 나는 내 시간들의 흔적들을 내 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네”), 사물과 몸, 표정과 행동에 깃들어 있는 어떤 기억과 의지를 쳐다보는 방식이야말로 <아쿠아리우스>가 관객으로 하여금 클라라라는 한 개인을 경험케 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인 셈이다. 과거와 현재, 정신과 몸, 그것을 품고 있는 사물들과 사람들, 그것들이 채우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그것이 한 개인의 역사성을 구성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인 양, 멘돈사 필루는 수 천장의 LP 컬렉션을 보유한 클라라와 똑같은 수집가(archivist)마냥 차곡차곡 그 질료들을 모아 쌓아나간다. ‘어떤 영화적/윤리적 방식을 통해 개인과 세계의 관계 맺음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힘 관계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해석과 입장을 정립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영화의 정치성 논의에 있어 핵심적인 테제라면, <아쿠아리우스>는 분명 주체-영화-정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서사 영화다. 평론가 출신으로 늦깎이 데뷔를 한 멘돈사 필루의 첫 장편 극영화인 < 네이버링 사운드Neighboring Sounds >(2012)와 마찬가지로 < 아쿠아리우스 >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감독의 고향이기도 한 브라질 해변 도시 헤시피다. 영화는 흑백 사진에 담긴 헤시피의 과거 모습과 파노라믹한 현재의 풍경 등으로 이 중요한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헤시피 내부로 줌인(zoom-in)하듯이 들여다보자면, 두 작품 모두에서 헤시피는 과거와 현재, 보존과 개발, 유산자와 하층민이 파이프 하나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기이한 구획의 도시다. 시간이 기입된 클라라의 몸과 그 주변의 사물이 그녀의 역사를 구성하듯 헤시피 역시 낙후된 건물과 반짝이는 초고층 콘도가 공존하며 그 역사를 현시한다. 아쿠아리우스가 개인-시간-공간의 관계맺음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적인 공간이라면, 헤시피는 ‘클라라의 암’의 세 번째 파트의 제목이 암시하듯 마치 암세포와 같은 대형 자본과 권력의 욕망이라는 위협이 그 질서를 재배치하는 위기의 공간이다. 고향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 멘돈사 필루의 카메라는 헤시피의 다양한 구석들을 비추면서 클라라-아쿠아리우스-헤시피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온고적인 수집광이자 시네필인 감독의 취향을 분명하게 영화에서 드러낸다. 그러나 클라라의 수집가적 면모나 영화를 가득 메우는 레트로 이미지들 혹은 감독 본인의 시네필적 흔적들(멘돈사 필루는 브라이언 드 팔마나 샘 페킨파, 로버트 알트만 등 70년대 미국영화로부터 받은 영향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은 단순한 복고취나 노스탤지아의 취향 이상의 위상을 갖는다. 특히 영화의 공간적 교통과 그 경험은 줌이나 트래킹 같은 카메라 움직임이나 2.39:1 와이드스크린에 대한 미학적 고집, 70년대풍의 스프릿 디옵터 쇼트(특수 필터나 렌즈를 사용하여 전경의 피사체와 원경의 피사체 모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딥 포커스 화면) 등을 통해 스크린 위에 세밀하게 재현되는데, 이는 안과 밖, 정신과 몸, 개인과 사회의 관계 맺음과 그 인식이라는 정치적인 토픽을 관객-공간의 시각적 관계로 표상하는 영화적 원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속에서 미디어는 보존과 수집의 물질적 근거이자 관찰/청취라는 인지의 매개로서 사려 깊게 언급된다. MP3 등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클라라와 젊은 기자가 나누는 대화나 보존상태가 엉망인 문서보관소의 광경은 현재를 구성하는 준거로서의 과거, 기억이나 인식 같은 정신적 작용을 가능케 하는 사물과 공간이라는 토픽에 대해 멘돈사 필루가 던지는 농담이자 비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관심과 미학적 원리 안에서 소니아 브라가는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존재다. 걸크러쉬의 할머니 버전으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브라가는 전무후무한 브라질 최고의 섹시스타지만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스타 혹은 역할을 잘 소화하는 베테랑 여배우라는 의미 그 이상을 갖는다(원래 멘돈사 필루는 클라라 역의 배우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얼굴을 찾고자 했다). 트레이드마크인 풍성한 검은 머리와 당장이라도 < 거미 여인의 키스 >를 다시 찍을 수 있을법하게 나이가 무색한 몸매, 특유의 강인한 표정과 유방 하나를 절제한 가슴 등 소니아 브라가라는 한 여성 스타를 구성하는 과거, 현재, 신체, 표정, 카리스마는 스크린 위에서 매 순간 클라라라는 캐릭터와 마주하며 관객의 기억과 반응에 즉물적으로(viscerally) 접속한다. 영화의 유물론적 입장과 원리를 담아내는 또 다른 장으로서의 소니아 브라가의 현전은 ‘배우’라는 스크린 존재-공간이 가진 잠재적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예다.
[실험영화]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영화란 지진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크고 작은 요동을 일으키는 불가시적 힘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힘의 근원을 찾아 지각 밑을 답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필경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이런저런 관측과 경험을 통해 그 힘의 운용 원리를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보다 정교한 추론을 위해서는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의 요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며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따금 여행을 떠나거나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 불가시적 힘의 효과가 지진계(seismograph)에 기록된 그래픽적 형상과 수치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상과 수치가 그 힘과 모종의 지표적 관계, 혹은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만, 곧바로 힘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에 대한 유일한 기호표현이라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우리는 요동을 청각기호로 나타내는 지진계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와 그 변형들이 영화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영화적인(cinemat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역사 속에서, 지진계가 지진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지진적인(seism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식의 전도를 본다. 하지만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시청각적 지진계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고,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그것과 관련된 구성물들 상당수가 ‘영화적 인터페이스’를 위한 강력한 은유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가 영화라는 지진을 감지하기 위한 유일한 장치는 아니라는 점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나 슈클라다노프스키 형제의 비오스코프 같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 장치의 사용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들은 바야흐로 인위적인 요동을 가미해 그래프의 형상을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시네마토그래프의 특권에 일찌감치 의문을 품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돌이켜보면 놀랄 만큼 현명하게도, 섣불리 대안적인 장치에 눈을 돌리거나 지진과 유사한 인공적 요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고안하기보다는 지진의 역량을 다시 살피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가령 1930년대의 르느와르는 지진계를 활성화된 지진대로 다시 가져다 놓고 인공적 요동과 본래의 지진이 함께 빚어내는 그래프의 형상을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영화라는 지진과 맺고 있던 비인격적 자동주의(impersonal automatism)의 관계를 다시 살피려는 시도(앙드레 바쟁)가 나올 무렵, 지진은 이미 지진대를 넘어 확산되어 지각의 곳곳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른바 ‘모던 시네마’란 가공할 대지진의 충격파에 맞서 지진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빚어낸 매혹적인 그래프이다. 그런데 만일 대지진의 충격파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의 임계값을 넘어선 것이라면 이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지진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오작동하는 지진계가 그려내는 혼란스러운 그래프 또한 지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었다. 이러한 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과격한 방식으로 지진계의 ‘다른’ 사용법을 한꺼번에 제시한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레트리스트(Lettrist)들이었다. 이지도르 이주의 <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Traité de bave et d’éternité >(1951) 및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 Hurlements en faveur de Sade>(1952) 등과 더불어 레트리즘 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모리스 르메트르의 <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1951)를 우리 리스트의 첫머리에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요하는(unquiet) 영화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레트리즘은 누벨바그와 더불어 “실험영화의 두 커다란 라이벌 분파”(니콜 브레네즈)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찌감치 영화의 전당에 그만의 자리를 잡은 후자와는 달리 오래도록 망각 속에 파묻혀 있다 비교적 최근에야 다시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영화라는 지진의 역량을 더듬을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이 제기된 이후, 이를 전적으로 수긍하거나 반신반의하거나 거부한 여러 작가들이 자기만의 길을 따라 흔들리는 대지 위를 방랑했지만, 이들이 영토와 영토를 가로지르는 방랑의 과정에서 산출된 기기묘묘한 그래프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공식적인 영화사(史)의 가장자리나 여백에 묻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실험영화’나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다분히 부적절한 명명으로 인해 오해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매 작품이 그 자체로 온전히 하나의 창조여야 할 예술에서 실험이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타르코프스키 식의 비판은, 그저 특정한 종을 명명하는 이름을 그 종의 속성과 동일시해 버리는 오류에 입각해 있다. 즉, 바다표범이란 바다에 서식하는 표범이라고 간주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적절한 명명을 바로잡기보다는 실제 그 이름이 사용되는 맥락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이라는 제목의 본 코너는 한국의 영화애호가들에게 그러한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017년 1월부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의 본 코너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편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각각의 영화를 둘러싼 영화사적 정황, 영화집단 그리고 사조와 경향에 대한 가이드를 3주 간격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그러니 여기서 당장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의 역사를 무리하게 요약하려 들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선정 과정과 기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밝혀두어야 할 듯싶다. 본 리스트는 서울국제실험영화제 프로그래머 이행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오준호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3인이 각각 20편씩을 추천한 후에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35편으로 압축해 얻은 것이다. 우리는 초기 아방가르드, 즉 무성영화 시기의 추상영화, 절대영화, 다다와 초현실주의영화를 비롯해 1940년대에 마야 데런과 케네스 앵거 등의 작가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싹튼 미국 아방가르드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데런의 < 오후의 올가미 >(1943) 등은 이제는 예술영화의 정전이 되어 세계영화사 강의에서도 흔히 다루어지곤 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실험영화, 보다 폭넓게는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과 공연 등 여러 예술영역들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오디오비주얼 실천들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할 수 있는 역사적 작업들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과 영국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영화의 구조적(structural)이고 물질적(material)인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레트리즘 운동을 비롯해 이후의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실천을 가로지르는 퍼포먼스적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35편 가운데 22편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아시아 및 한국의 선구적인 작가들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했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여전히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접하기 쉽지 않은 것들도 꽤 있고 영화관에서의 관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추후 한국영상자료원과의 논의를 거쳐 비정기적으로 상영 프로그램을 꾸려 관객들에게 소개할 계획도 있다. ※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리스트 (리뷰 연재는 본 리스트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질 예정임)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모리스 르메트르 Maurice Lemaitre / 1951년 / 프랑스 요정의 빛 Nymphlight 조셉 코넬 Joseph Cornell / 1957년 / 미국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 렌 라이 Len Lye / 1958~1979 / 미국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피터 쿠벨카 Peter Kubelka / 1960년 / 오스트리아 천상과 지상의 마법 Heaven and Earth Magic 해리 스미스 Harry Smith / 1962년 / 미국 노트북 Notebook 마리 멘켄 Marie Menken / 1940~1962년 / 미국 영화를 위한 선 Zen for Film 백남준 Nam June Paik / 1964년 / 미국 순열 Permutations 존 휘트니 John Whitney / 1966년 / 미국 찢어진 오른쪽 눈을 위하여 For the Damaged Right Eye 마츠모토 도시오 Matsumoto Toshio / 1968년 / 일본 생필름 Rohfilm 비르기트 하인 Birgit Hein & 빌헬름 하인 Wilhelm Hein / 1968년 / 독일 손 Hand 유현목 Yoo Hyun Mok / 1967년 / 한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 Tom, Tom, the Piper’s Son 켄 제이콥스 Ken Jacobs / 1969년 / 미국 24분의 1초의 의미 The Meaning of 1/24' 김구림 Kim Ku-lim / 1969년 / 한국 한글 Korean Alphabet 김인태 Kim In Tae / 1967년 / 캐나다 도색영화 Blue Movie 앤디 워홀 Andy Warhol / 1969년 / 미국 월든 Walden 조나스 메카스 Jonas Mekas / 1969년 / 미국 초른의 보조정리 Zorns Lemma 홀리스 프램튼 Hollis Frampton / 1970년 / 미국 자신의 눈으로 보는 행위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 스탠 브래키지 Stan Brakhage / 1971년 / 미국 퀵 빌리 Quick Billy 브루스 베일리 Bruce Baillie / 1971년 / 미국 중심구역 La Region Centrale 마이클 스노우 Michale Snow / 1971년 / 캐나다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 안소니 맥콜 Anthony McCall / 1973년 / 영국 룸 필름 Room Film 피터 기달 Peter Gidal / 1973년 / 영국 거울을 든 사람 Man with Mirror 가이 셔윈 Guy Sherwin / 1976년 / 영국 드림랜드로 향하는 5분 10초 Take the 5:10 to Dreamland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 1976년 / 미국 원 웨이 부기 우기 / 27년 후 One Way Boogie Woogie / 27 Years Later 제임스 베닝 James Benning / 1977년/2005년 / 미국 천사 L’ange 파트릭 보카노프스키 Patrick Bokanowski / 1982년 / 프랑스 ABCD 록스리 Roxlee / 1985년 / 필리핀 화염 속의 도시 City in Flames 슈멜츠다힌 Schmelzdahin (요헨 뮐러 Jochen Muller, 요헨 렘페르트 Jochen Lempert, 위르겐 레블레 Jurgen Reble) / 1984년 / 독일 극지에서 적도까지 From the Pole to the Equator 안젤라 리치 루키 Angela Ricci Lucchi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Yervant Gianikian / 1986년 / 이탈리아 30 X 30 장 페이리 Zhang Peili / 1988년 / 중국 미디어 매지카 Media Magica 베르너 네케스 Werner Nekes / 1986년 / 독일 외부공간 Outer Space 피터 체르카스키 Peter Tscherkassky / 1999년 / 오스트리아 더블 타이드 Double Tide 샤론 록하르트 Sharon Lockhart / 2009년 / 미국 데카지아 Decasia 빌 모리슨 Bill Morrison / 2002년 / 미국 안더스, 몰루시아 Differently, Molousia 니콜라 레 Nicholas Rey / 2012년 / 프랑스
우리 손자 베스트
< 우리 손자 베스트 >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평단에서 나온 호평들은 그간 한국영화가 깊게 들여다본 적 없던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반면 일부 SNS를 통해 짐작되는 일반 관객들의 혹평은 주로 이 영화의 거친 만듦새와 다루는 대상들, 특히 여성 인물들에 대한 남성 인물들의, 나아가 영화의 왜곡된 시선을 문제 삼는다. 한쪽은 영화 안의 폭력적 상황들을 ‘헬조선’의 괴물성에 대한 구체적 진단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영화 자체의 위험한 태도와 등치 시키고 있다. 전자는 이 영화의 내용적 시의성을, 후자는 형식적 결함을 지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러한 두 개의 주장들 중 어느 하나에 찬성하고 다른 하나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게 이 둘은 상이한 맥락과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모두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소화하고 있고, <우리 손자 베스트>가 우리에게 안기는 일련의 당혹감을 단순화된 논리로 압축해버린다는 의미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반문을 안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토를 초과하는 곳에서 활동하는 세계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괴이한 혼종성과 불균질한 층위들과 위태로운 리듬에 닿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위와는 좀 다른 길을 상상해보려고 한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보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혼란하게 만드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서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해자의 서사를 구축하면서 영화가 그것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할까. 그 거리는 어떻게 생길까. 그 거리는 착각일까. 더욱이 가해자의 행위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 안에서 설명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와 같은 영화 앞에서라면 더욱 난감해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도하게 할 만한 일관된 가치판단의 기준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요컨대, 영화의 시선은 인물들을 체제의 피해자로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운가, 공모자로 공격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가). 시선은 모호하고 서사에는 도덕의 자리가 없다. <우리 손자 베스트>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영화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추하고 부패한 세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추하고 부패한 세계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화의 몸을 맡기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대상과의 유희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이상하고 당황스러우며 종종 불쾌한 기분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인 셈이다. 혐오의 언어들, 혐오의 행위들과 유희라니, 이 영화는 결국 혐오의 운동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인가.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반문이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유희의 활동은 그런 반문에 무너질 만큼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의 관심은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두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세계와 충돌하는 병적인 인간존재를 궁금해하거나 그들의 비뚤어진 행위를 관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말’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혼종성은 인물들의 신념을 체화한 말의 내용이 그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거름 장치 없이 영화적으로 나열되는 데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수많은 층위에 놓인 말들의 비일관되고 교란된 움직임들이 물질화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아니라, 말의 움직임과 도발적이고 공격적으로 유희한다. 영화의 도입부,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구교환)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주시하던 동영상을 훔쳐본다. 그것은 경찰이 물대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영상인데, 교환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자신이 하던 게임 속 성우의 목소리를 조작해서 그 영상에 입힌다. 영화는 단지 교환의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희화화된 영상을 우리로 하여금 큰 화면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장면은 불편하다. 처절한 시위의 현장을 간교한 편집으로 농락한 교환의 행동을 보는 일도 힘들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영상이 우리에게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실제의 기록이라는 점, 무엇보다 가공된 게임의 세계를 지배하던 전능한 목소리가 그 참혹한 기록을 한순간 인공적인 이미지로 돌변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 아니, 사실 자체에 완전히 무감한 텅 빈말의 선정적인 힘이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논쟁적인 질문이 있고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사실(교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팩트’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팩트’라는 단어는 팩트와 가장 먼 자리에 있다)의 진위를 탐구하고 밝히려는 영화가 아니라 말의 저 위태로운 활동을 보려는 영화다. 팩트에 조응하거나 팩트를 지시하고 설명하는 말의 기능이 아니라, 팩트를 진공상태에 두고서도 전혀 균열되지 않는 말의 뻔뻔한 표면, 말의 경박한 생동감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 생동감은 어떤 이성이나 논리도 없이 오직 경박한 차원의 감정으로만 지탱된다.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입에서 나오는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의 말들뿐만 아니라, 교환과 영어 선생님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전화로 나누는 대화를 보라. 사실 영어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말들은 언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암묵적인 규칙조차 사라진 일차원적인 감정의 잔여물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롱과 혐오의 발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저급하기 짝이 없다. 한 장면이 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해병대 전우회 소속의 한 남자와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사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고작 육개장이나 얻어먹으러 온 듯한 모양새지만, 겉으로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말이라기보다는 무질서한 소란에 가깝다. 그때, 그들 사이를 오가던 영화는 갑자기 모든 소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침묵 속에서 잠시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간교한 힘을 내용적인 교정 등으로 순화시키거나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힘을 그저 죽이는 것만이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이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면서도 이 영화가 그처럼 무식하고 폭력적인 말들의 집요한 활동에 ‘영화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진짜 팩트를 제시하거나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그 말들의 활동에 자신의 몸 전체로 휩쓸려보고 반응하며 치열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패러디나 풍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도 세우지 않은 채로 무모하고 위험하게 돌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 자신이 부서질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말들에 오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걸 겁내지 않는다. < 우리 손자 베스트 >가 ‘말의 영화’라고 할 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성우로 등장하는 한 여인(김상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에는 그들과 싸우는 반대진영이 등장하지 않는데,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그들과 충돌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여인이다. 그 존재가 여자라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그녀가 성우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교환에 의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인칭적으로 비열하게 사용됨으로써 처음 나오지만, 그 훼손된 목소리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내 온전한 육신을 회복한다. 여러모로 그녀의 음성은 그 성질상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 혹은 어버이별동대 단장인 정수의 그것과 구별된다. 전자는 논리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타자를 향하며,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나지막하고 품위 있게 명령한다. 반면 후자는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를 향하며, 극단적으로 흔들리고, 시끄럽게 분노한다. 말의 차원에서라면, 성우의 말은 너나나나베스트나 어버이별동대의 말보다 우위에 있다. 그녀의 말이 내용적으로 더 객관적이고, 옳으며, 진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에는 형식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교환이 그녀를 납치한 후,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요상한 상황을 보자. 밧줄에 묶인 그녀는 교환이 시키는 말을 내뱉는다. “김일성 개새끼, 김정은 돼지 새끼.” 그러나 곧 상황은 반전을 맞고 이번에는 교환이 포박된 채, 그녀 앞에서 말한다. “이승만 개새끼, 박정희 삐, 전다크 삐, 이명박 삐, 미스 박 삐, 방 씨 일가 삐..” 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천박한 말장난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교환의 말은 자기 만족적으로 두서없이 상대를 위협하지만, 성우의 말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의 말을 마치 거울로 반사하듯,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어 그 말에 수치심을 안긴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목욕탕 장면에서 그녀는 교환에게 담담히 명령하지 않았는가. ‘내가 저 밖에 나가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의 언어를 크게 말하지 않으면 너를 고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층위의 말이 (내용이 아닌) 성질로 팽팽하게 겨룬 후, 오직 말의 힘으로 그녀는 교환을 이긴다. 말과 관련해서 가장 통쾌한 성우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가장 소화하기 힘든 다른 여성의 장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숙희(박명신)는 노인들에게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기지촌에서 일했던 자신과 같은 여자들이 이 나라를 살린 거라고 거의 매번 같은 내용의 술주정을 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언어로 학대하고 때리는 정수( 동방우 )를 쫓아다닌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교환과 섹스를 하다가 그에게서까지 모멸을 겪는다. 질문은 이것이다. 영화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일까.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그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 또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를 통해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사악함을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여전히 그 장면들 앞에서 고심하는 나는 지금으로서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단 한 장면의 힘을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녀를 천대하지만, 한 남자만큼은 그녀를 아낀다.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정수 무리들에게 늘 얻어터지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온기가 느껴지는 이 남자는 깁스를 한 채, 숙희를 식당으로 데려간다. 남자는 국밥을 시킨 후,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 “그대에게 밥상을 수여함.” 숙희는 자신을 향한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를 수줍게 받아들인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정겹고 평온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영화적 울림은 바로 전에 등장한 장면의 기운과 부딪치며 생성된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밥상’ 수여식을 보기 직전, 나라사랑유공자 보훈처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고 화가 난 채 빈손으로 나오는 정수의 모습을 보았다. 허황되고 속이 빈 이데올로기의 상과 정직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상. 영화는 두 상을 나란히 붙여두고, 상이라는 말이 영화적으로 온전히 물질화된 순간, 말이 하나의 세계가 된 순간의 공기를 ‘밥상’의 장면에서 구현하는 것 같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또다시 술에 취한 숙희가 정수를 찾아오고, 정수가 그녀를 따라온 깁스 한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세계는 불행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를 성우와의 대척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성우의 경우, 우리는 그녀의 사적인 삶이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김상현이 영화 밖에서 실제 성우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성우’라는 직업인으로서만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앞서 언급했듯, 말의 형식(음성과 태도와 논리)으로 남자들의 위협을 제압한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 그녀의 말에는 그러한 권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그녀를 멸시하는 교환과 정우의 말처럼 사실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광기 어린 신념의 언어도 아니다. 말과 삶과 육체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과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이 경계 없이 뒤엉키고 뭉개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숙희에게서 본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인물을 찾기 어렵지만, 정작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가장 알기 어려운 자다. 말의 형식으로도, 말의 내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지만, 그 세계 안에서 가장 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존재. 우리가 그녀의 장면들을 편히 바라보기 어려운 건,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의 폭력적 수위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인지 모른다. 현실의 극단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영화 안으로 불러들일 때, 실재의 외설성과 선정성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좋은 작품들은 자기만의 영화적 방어선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방어선이란 실제 사건이나 현상을 끌고 오되, 그 내용에 기대지 않고서도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나는 현실이다’가 아니라 ‘나는 영화다’라는 점을 내내 각성하게 하는 힘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일베와 어버이연합이라는 우리 현실의 극단적인 얼룩에서 출발했으나 그 얼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교환의 집이 처음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이 한 쇼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아들은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며, 엄마는 집을 나서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를 향해 말을 하지만, 어쩐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이들 사이를 오가는 말의 내용들은 중의적이다. 더욱이 딸이 엄마의 목을 조르던 앞선 장면과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가기 직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모습, 죽음의 기운이 어른대는 대화들은 이 집 장면을 죽음 이후의 시공간으로, 인물들을 유령이나 환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영화의 중반, 집을 두고 편의점에서 괴이하게 재회하는 가족들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행동들은 뜬금없으며 이들의 등 퇴장 방식은 갑작스럽다. 교환이 정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데려온 날, 그가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보며 한 말이 있다. “영정사진 같죠?” 그날 그는 술에 취해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거실에서 엄마가 낯선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문틈으로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엄마 또한 교환을 응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환의 가족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망상 같은 것이다. 이 가족에 얽힌 상처를 추론하고 그에 근거해 교환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비웃는다. 영화는 말 그대로 그의 집(가족)을 텅 비게 만듦으로써, 너나나나베스트에 경도된 자의 근원을 가정적 배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무화시킨다. 대신 영화는 인과관계를 이룰만한 요소들의 고리를 끊어 곳곳에 흩뜨려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가 탄생시킨 이 광적인 존재들의 비상식적인 에너지에 오직 영화 내적인 활력만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결론 또한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정수는 교환과 현충원에 간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둘은 무덤을 파고 교환은 정우의 부탁대로 삽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쓰러지기 직전, 정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진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현충원을 나서는 교환이 “자주 올게요”라는 말을 했으니, 그가 죽은 것 같지만, 교환이 그의 얼굴에 흙을 뿌릴 때,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 손자 베스트”라고 중얼댔으니, 그는 죽지 않은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환은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추며 외친다. “내가 찾는 팩트는 바로 나다!” 정수와 교환의 마지막 장면들에는 어떠한 의미작용도 없다. 정수와 교환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들은 그들이 영화 내내 보여준 행각들 중 가장 위악적인 퍼포먼스일 따름이며, 그들이 남긴 문장들은 여전히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수현 이 그들을 퇴장시키며 섣부르게 어떤 견해를 밝히거나 영화적 처벌 혹은 깨달음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대신, 어떻게든 끝까지 그들을 영화적으로 운동하게 하면서 그들을 향한 질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통해 일베와 어버이연합에 대한 영화 나름의 정리된 결론을 기대했다면, 이러한 마지막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집단들과 현상들에 대해 답을 내리는 일이 자신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토록 망가진 사회를 살면서, 자기검열에 경직되지 않고도, 도덕에 짓눌리거나 주눅 들지 않고도, 그 사회의 한가운데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도, 세계의 온갖 비루한 운동들을 향해 과연 영화적 활동만으로 다시 질문할 수 있을까.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질문에 대한 김수현 의 대답이다. 올해 경험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 대해 이보다 더 논쟁적이고 담대하고 치열하게 질문하는 세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초이스]위켄즈
2016년은 균질적이고 매끈해 보이는 다양한 표면들이 울퉁불퉁해진 해다. 정권 퇴진을 말하는 광장에 “나라 구하는 호모”와 “혁명하는 헬페미”가 등장했다. 이들은 30-50대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으로 상상되어 온 ‘시민’의 얼굴을 바꾸고 있다. < 캐롤 >이나 < 아가씨 >, < 연애담 > 같은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호응은 마찬가지로 이성애 비장애인 남성들의 스펙타클로만 짜여졌던 한국의 지루한 스크린에 다채로운 구멍을 뚫었다. 한국 사회는 확실히 형질 전환되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혁명의 완수는 아니지만, 변혁의 시작임은 분명하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20주년 기념 프로젝트이자, ‘친구사이’ 내부 소모임으로 시작해 “인권 운동계의 아이돌”이 된 게이 코러스 ‘지보이스’의 10주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 위켄즈 >. 이 작품은 이런 형질 전환의 시대에 적절하게 찾아온, 그 변화를 견인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놀라운 작업이다. <위켄즈>는 변화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간들 속에서 서서히 다가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친구사이가 버텨낸 20년, 지보이스가 목소리를 키워온 10년.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밀어온 그 시간들이 ‘우리의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위켄즈 >는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래를 못하는” 지보이스 멤버들의 연습실에서 시작된다. 지보이스는 1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모이는 것은 즐겁지만 고역이고, 생계를 위한 노동은 고단하며, 연애는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보이스의 대표곡들이 이런 “우리들의 평범한 게이들”의 삶을 노래하기 때문에, 그 노래들을 연습하는 과정은 단원들의 ‘자기고백’, ‘커밍아웃’, 혹은 ‘수다’와 자연스럽게 엉킨다. 그래서 <위켄즈>를 ‘음악 다큐’가 아니라 ‘뮤지컬 다큐’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다. 그들의 노래, 그 음악이 다큐의 서사이자 곧 형식이기 때문이다. < 위켄즈 >가 따라가는 지보이스의 삶, 그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는 한 명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1인 영웅담으로 이야기되어도 부족함이 없기는 하다.) 그것은 서로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튕겨져 나가거나 지쳐 쓰러지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보이스의 10년을 함께 더듬고 있다 보면 홀로 영웅이 되기는 오히려 얼마나 쉬운지, 함께 ‘우리’가 되어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위켄즈>는 관계를 위한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내부의 관계 혹은 친목에 머물지 않고 외부로 확장된다. 화음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합창’으로 완성되듯이, 지보이스의 활동은 게이인권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운동들 위에 살포시 얹혀진다. 그렇게 지보이스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투쟁의 현장에 함께 했다. 팽목항에도, 쌍차 투쟁 현장에도, 혐오 세력들이 설쳤던 광장에도, 그리고 온전한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서울시민들의 점거투쟁에도, 지보이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노래가 터져 나온 순간 세계의 공기에는 새로운 파동이 섞여 들어가고, 그리하여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공기가 아니듯이. < 위켄즈 >가 섞여들어 간 한국의 스크린은 아마도 더 이상 과거의 스크린과는 같지 않을 터다. 그런 의미에서 <위켄즈>는 진정한 판타지이자 꿈의 장르로서의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판타지는 ‘기만’이 아니라, ‘닥쳐올 미래’를 의미한다.
[초이스]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보통 현실에서 살짝 빠져나와 범상치 않은 어떤 일들을 한도 없이 무책임한 자세로 즐기는 일이기도 하다. 우연치 않게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수민( 이주원 )으로 문을 여는 < 혼자 >는 범죄스릴러 영화로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들게 하다가 목이 없어져 버린 자기 자신을 보거나, 정면으로 비추진 않지만 망치에 머리가 박살 난 것이 분명한데 방금 전과 상관없어 보이는 어느 지점에서 눈을 뜨고 일어난다거나 심지어 발가벗겨진 채라든가 하는 식으로 관객의 얼을 빼놓는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감독의 의도를 생각해본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악몽을 보여주려 한 것인가? 그나저나 테이크는 왜 이렇게 긴 것인가?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혼자>가 어떤 영화인지 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체험은 그렇게 기분 좋지만은 않다. 박홍민 감독은 준비했던 영화가 중단되고 약 2년간 고립되어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고, 그러던 와중에 자괴감도 심해지고 타인들과 교류하는 것이 힘들어질 지경이 되어가는 도중에 < 혼자 >를 기획했다고 한다. 원칙은 최대한 롱테이크를 쓸 것. 매우 적은 예산이라서 한 번이라도 NG가 나면 제작이 거의 빵꾸(?)가 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많은 리허설과 철저한 계산으로 어려움을 돌파했다. 그런데, 왜 꼭 롱테이크여야 했을까? 내가 본 < 혼자 >는 불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하여간 괴로운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상징적인 폭력과 괴로운 기억이 뒤엉킨 폭력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누군가의 상념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아주 간단히 말해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시작점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수민의 여자 친구 지연(송유현)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중간에도 등장하고 마지막에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혼자>는 어떤 계기로 인해 (일종의 버리고 싶은) 의식 속으로 진입해 이루어지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영화 자체가 일종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 관념은 영화의 후반에 등장하는 수민이 지연에게 들려준 꿈 이야기, 그리고 동네와 뇌에 관한 비유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점(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범한 커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시퀀스)이 이른바 리얼리티를 담보한 세계냐? 그것도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토대 위에 서 있는 숏은 바로 마지막의 산동네의 전경을 비추는 숏이다. 불이 하나둘 꺼지면서 암전으로 진입하는 이 장면은 비로소 누군가의 생각이 멈추고 어둠으로 진입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을 수면이라고 부르든 죽음이라고 부르든 자유겠다. 이런 면에서 아마도 롱테이크라는 형식이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어떤 관념을 떠올릴 때 사건, 개념, 에피소드를 명확하게 핵심만 짚으며 찍어나가는 식으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최대한 영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37컷으로 90분을 채우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일컬어 ‘스릴러’라고 표현하는 글들을 본 일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쪽은, < 혼자 >는 ‘스릴러’를 포함한 어떠한 장르의 문법의 틀에도 몸을 구겨 넣을 의사가 전혀 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되레 형식이나 문법에서의 제약을 벗어나면서 힘을 발휘하는 지점도 있다. 다소 거칠거나 지나친 것 아닐까 하는 설정이나 촬영들이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지만 감독의 비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납득이 간다. 맞다고 느끼는 쪽은, 보고 나오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내 기분 탓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데 그것이 오히려 영화를 통해 본 내 머릿속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영화에 표현되는 많은 이야기들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자기혐오와 그것이 기어코 나를 뒤덮는 것에 대해 도망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문득 과거의 상념들을 호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무섭다. 그것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