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그, 저 귓것
- 감독
- 오멸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오영순, 문석범, 양정원, 이경준, 김대영, 장정인, 조이준, 양웅선, 전옥순, 김항례, 안민희, 양윤호, 현애란, 변향자, 조은, 최은미, 문재연, 김재현, 강진혁, 김진훈, 강순자, 애월순
제주 4.3. 사건을 다루고 있는 두 편의 영화 < 지슬 >(2012)과 < 비념 >(2012)이 화제를 몰고 있다. 올레길 개발과 저가 항공 노선의 활성화, 도시로부터의 탈출과도 같은 제주로의 이주, 자본과 국가의 개발 논리 앞에 날것으로 놓인 `세계 7대 자연경관`. 타자화된 공간으로서 제주도에 대한 이런 (육지에서의) 유행들 속에서 제주 4.3 사건의 소환이 또 다른 타자화나 역사를 통한 억지스러운 통합을 불러오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는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외부와 같은 내부로서 최근 육지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제주를 이국적인 상품이 아닌 온전한 존재로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수작들이다. <지슬>에 대한 평론가 김혜리의 말처럼 이 두 작품은 '관광지와 무덤 사이'라는 간극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어쩌면 육지인인 `우리`에게 제주는 그 간극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국인의 문화적 상상력 속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게 된 제주에 대해 생각할 때에 < 지슬 >을 감독한 오멸 감독의 작품 리스트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가 꾸준히 제주에 대한 작업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 어이그, 저 귓것 >(2009)은 제주의 뮤지션이라고 할 만한 양정원의 음악과 제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귓것(귀신/바보)`들의 삶을 그의 독특한 영화언어 안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울에서 사고를 당한 용필( 양정원 분)은 목에 깁스를 한 채 빈손으로 고향 제주로 돌아온다. 어머니의 산소가 흉측하게 파헤쳐져 있는 것을 발견한 용필은 제주의 바람이 제주의 돌 위로 몰아치는 언덕 위에서 목 놓아 운다. 그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휘감아 도는 웅장한 배경음악 덕분에 관객들은 그의 공허와 슬픔 속으로 함께 빠져 들어간다. 동네 삼촌(어르신)이 나타나 '남의 묘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묻기 전까진 말이다. 순간적 침묵, 엄습하는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토속적인 느낌의 통통 튀는 배경음악. 이렇게 < 어이그, 저 귓것 >은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우리들의 귓것 같은 삶`이라는 주제를 오프닝 시퀀스의 짧은 지속 안에서 잘 보여준다. 우리는 < 지슬 >에서 만났던 오감으로 가득 찬 스크린을 이 영화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에서 유머는 일종의 미학인데, 이런 명백한 개성이 오멸 감독의 (역사의 무게를 넘어선) 또 다른 소품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오멸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딸을 낳으면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고 사내를 낳으면 엉덩이를 발로 찬다'는 제주의 속담이 떠오른다. 낄낄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숙연해지는 것은 제주의 생명과 삶을 유지해 온 여성들에 대해 그가 지닌 존경 탓일 것이다. `귓것 같은 삶`에서 세속적 생산성과 대비되는 새로운 가치를 찾고 싶은 필자의 개인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럴 수 없는 것은, 그가 귓것들의 유유자적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제주 여성의 노동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12번의 사회를 보는 동안 검은 머리 청년에서 반백이 됐다'는 권해효 씨도, '소통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개막작 <거대한 대화>의 박세호 감독도 반가웠지만, 내 눈길을 잡아끈 건 단연 김의석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독립영화제는 2년 간 영진위로부터 지원이 끊긴 채 영화제를 치러야 했다. 개막전에 만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어느 면에선 비참하고 힘들더라'고 했다. 법적인 검토를 받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영진위 내부의 과도한 평가가 원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원 중단에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 '창피했다'고도 했다. 사실 돈이란 게 그렇다. 아끼면 아끼는 대로 꾸리고 지탱해나갈 순 있지만 규모의 축소보다 심리적 위축과 스트레스가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한 위기를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심기일전하면서 후원도 많아졌고, 영화제를 지지하는 흐름을 새롭게 인식하게'됐단다. 지원 중단이란 경제적 타격을 심기일전의 계기로 삼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떤 단단함이 느껴졌다. 개막식 무대에선 김의석 위원장이 영화제 식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 이유도 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독제 전후로 독립영화와 안팎의 몇몇 영화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대화의 끝은 2012년 한 해를 돌아보고 결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 중 역시나 ''기자정신''을 발동시키는 화두들은 ''지원''과 ''배급환경''이었다. 어느 영화감독은 2008년 장편독립영화를 촬영하던 당시보다 ''지원''을 받기가 몇 배는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만큼 외적으로 비춰지기로는 독립영화의 개봉 편수가 늘어난 것 같지만 그 수치와는 별개로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는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이었다. 최근 신작을 개봉시킨 다른 감독은 독립영화의 배급과 상영환경이 점점 ''게토화''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멀티플렉스 위주로 상영환경이 돌아가다 보니 작은 영화들은 설 곳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물론 발품을 파는 적극적인 관객들 아니고서는 독립영화를 만날 수조차 없게 됐다는 한탄이었다. 불과 5년 전 수 만 명의 관객들과 행복한 만남을 가졌던 그 감독은 더 열악해진 배급환경에 대한 체감지수가 더 높은 것처럼 보였다. 개인적으로 창작과 완성까지와 연결되는 지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배급환경''이라고 믿는 쪽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영화제라는 축제의 공간에서 상영되고 마는 것 만큼이나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디스페이스와 인디플러스가 버팀목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멀티플렉스들의 횡포와 생색내기는 극에 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민병훈 감독의 < 터치 > 논란은 곪은 대로 곪은 이 배급환경과 극장상황에 대한 창작자들의 뼈아픈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 터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고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 지슬 >의 오멸 감독이 지방 독립영화협회들과 대안상영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새로운 시도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어쩌면 당할 수밖에 없는 멀티플렉스의 횡포를 미리 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서글퍼진다. 그런 점에서 지난 9일 민주통합당에서 발의한 ''피에타법''의 향방에 주목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발전 기금으로 저예산 독립예술 상영관의 설립 및 운영을 지원하고 영화진흥 기본계획에 ''저예산 독립·예술영화의 육성 및 지원''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과연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느냐도 관건이지만 ''슈퍼갑''으로 부상한 극장들의 협조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실효성을 거둘지도 의심이 된다. 대선이 코앞이다. 이래저래 독립영화인들을 힘들게 했던 현 정권의 유통기한도 만료를 맞았다. 부디 내년엔 이 ''배급환경''에 대해 진지한 논의와 실천적이니 법안을 내놓는 정권이 탄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피에타법''이 그 출발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멸 감독의 (혹은 자파리 필름의) 새로운 영화 < 지슬 >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보았다. 영화제가 시작되고, 주말을 넘기면서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이 영화에 대해서 말했다. 한 지인은 후반부 내내 우느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극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사람은, <지슬>을 보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자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어떤 영화일까. 영화를 통해 어떻게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을지 무척 궁금했다. 이번 영화 역시도 감독의 전작들(< 어이그 저 귓것 >(2009)과 < 뽕똘 >(2009))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심플한 어감의 제목이 달렸다. 영화는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자행된 양민학살의 사건을 배경으로 다룬다. 민중항쟁의 배경에는 일본 패망 후 남한을 통치했던 미군정 체제의 사회문제와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좌익세력의 활동과 군정경찰,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 제주 4·3사건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지슬 >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없이 죽어간,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스크린으로 불러와, 단순히 선과 악의 편을 나눠 기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시 희생된 주민들 개개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전쟁에 희생된 대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그러했듯, 영화 속의 사람들도 세상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흉흉한 소문을 피해 산 속으로 피신할 뿐이다. 집에 남아있겠다는 노모와 키우던 돼지를 뒤로 한 채… 그리고 그들을 뒤쫓는 군인들이 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징집돼 당신의 부모와 형제에게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 결국 그 둘은 만나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오멸 감독의 카메라는 대학살의 참상을 전시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 과정을 마치 씻김굿을 하듯 건조하고 비장한 톤의 흑백화면으로 담아낸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장엄한 진혼곡을 경험하는 느낌이다. 주민들은 스멀스멀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시종일관 낙관적인 태도로, 서로에게 온기를 전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의 동굴 속에서 긴 시간을 버틴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 청년은, 잿더미로 변한 집터에서 끝까지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품에 지키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자. 마을 사람들은 그 사연을 모른 채 청년이 들고 온 잘 익은 감자를 맛있게 나눠 먹는다. 제를 치루고 음복을 하듯. 영화는 이렇듯 제의의 형식(1장 신위(神位), 2장 신묘(神廟), 3장 음복(飮福), 4장 소지(燒紙)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 묻고 선동하기보다는, 죽은 사람들을 먼저 위로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나 다를까, 비밀스런 영화의 제목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를 뜻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