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
- 감독
- 안주영
- 제작년도
- 2011
‘B무비’라 불릴 만한 한국영화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1990년대 후반부터일 것이다. 이전에도 소위 ‘기괴한 영화’가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즈음에 감독의 자의식 아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B무비들이 하나둘씩 선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박찬욱 과 이무영 이다. 각본과 기획을 함께 진행하기도 하던 이들은 각자 메가폰을 잡아 이전에 보지 못한 한국영화를 만들어냈다. 박찬욱이 < 3인조 >(1997)를, 이무영은 < 휴머니스트 >(2001)를 내놓았고, 그 시기에 이훈 의 < 마스카라 >(1995), 김용태 의 < 미지왕 >(1996), 박헌수 의 < 진짜 사나이 >(1996) 같은 영화가 나왔다. 물론 이들 영화는 B무비의 숙명처럼 대중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단, 일국의 영화산업이나 시장이 발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영화의 풍성함’이다. B무비가 만들어지고 시장에 나온다는 상황 자체가 이후 한국영화의 지형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질 거라는 예감을 낳았다. 그리고 변화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B무비는 저주의 이름이다. 한 번 정도 시도하면 몰라도 계속 그 땅에 머물렀다간 대중들의 미움을 사거나 잊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B무비의 영혼은 비대중, 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반대중의 정서를 지녔기에 다수의 사랑을 받기가 힘들다. 그런 영혼의 작업은, 메이저의 감성에서 멀리 떨어져 반역의 행동을 벌일 수 있는 자만이 지속 가능한 일이다. 이후 방향을 튼 박찬욱이 대중과 친숙해진 반면, 지금까지 B무비의 영혼을 버리지 않은 이무영이 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2), < 아버지와 마리와 나 >(2008), < 한강블루스 >(2016)를 발표할 동안 그는 고독한 작가로 남았다. 이무영은, 그처럼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는 어떤 전범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영혼을 지닌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났다. 2019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그런 이름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정원 의 < 시실리 2km >(2004), 원신연 의 < 구타유발자들 >(2006), 이하 의 <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2006), 오기현 의 < 손님은 왕이다 >(2006), 박명랑 의 < 분노의 윤리학 >(2012), 우선호 의 < 시체가 돌아왔다 >(2012) 같은 영화들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좀비처럼 스크린 위로 계속 찾아왔다. 올해에도 그런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작품은 지난 2월 13일에 개봉한 이민재 의 < 기묘한 가족 >(2018)이다. 이런 영화를 욕하기란, 한편으로 쉽다. 얼핏 보아 못 만든 것 같고, 뒤뚱거리는 전개 방식은 매끈한 내러티브를 찾는 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 내린 평자들의 점수는 가혹했다. 그런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가는 십중팔구 영화와 함께 처형당한다. 곧바로 ‘영화 못 보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나는 욕 먹을 각오로 ‘지금까지 이런 좀비영화는 없었다. 단, 취향을 아주 많이 탈 듯’이란 평가와 함께 별 4개를 주었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다. 다시 보아도 <기묘한 가족>은 올해 본 영화 가운데 몇 안 되는 재미있는 영화다. 그 재미를 여기서 풀어놓을 재간은 없다. 재미를 설명하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용케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으나 <기묘한 가족>은 순진한 청소년들이 보기에 질이 그리 좋지 않은 자들이 나오는 영화다. 10년 전, 주유소를 열었다 망한 박씨네 가족은 초라한 행색으로 변했다. 하와이에 가보는 게 꿈인 아버지 만덕은 화투판에서 성질이나 부리고, 큰아들 준걸은 유사 범죄 행위로 근근이 카센터를 운영하고, 며느리 남주는 돈만 밝히는 아낙으로 살고, 딸 해걸은 토끼에 연연하는 우울한 아이로 자랐다. 둘째 아들 민걸이 해고당해 충청도 시골집으로 돌아오던 날, 대기업 제약사의 실험 도중 목숨을 잃은 남자가 죽음에서 깨어나 한마을로 걸어 들어온다. <기묘한 가족>의 전반부는 우울한 가족이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박씨 가족은 좀비에게 ‘쫑비’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회춘의 묘약’을 팔아 재산을 끌어모은다. 만덕은 하와이로 떠나고, 10년 만에 주유소를 다시 오픈한 가족은 행복한 불빛 아래 저녁을 먹으며 웃는다. 기존의 좀비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반부를 마친 영화는 정확하게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완전히 튼다. 행복의 정점을 상징하는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좀비의 창궐은 전반부의 나른한 기억을 박살 낸다. 결혼식장과 시골 장터 배경의 소규모 스펙터클 뒤로 주유소의 클라이맥스가 폭발을 준비한다.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 좀비로부터 안전했던 박씨 가족은 졸지에 마지막 대피처가 된 주유소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인다. 이민재는 그런 와중에 폭죽이 터지고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오는 발칙한 상상을 한다. 좀비 댄서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는 파티가 외딴 주유소에서 펼쳐진다. 좀비가 들끓는데도 뉴스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시골 마을은 그렇게 해서 그들만의 축제를 알린다. 평온한 전반부를 보다 이게 과연 좀비영화가 맞는지 의문을 품었던 차에, <기묘한 가족>은 생존과 멜로와 댄스가 결합된 전대미문의 장관을 연출한다. <기묘한 가족>은 제목에서부터 김지운 의 < 조용한 가족 >(1998)과 은근히 교류하는 작품이다. 한적한 곳에서 산장을 운영해 돈을 벌어보려던 가족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죽음의 행렬로 인해 곤혹스러워진다는 <조용한 가족>의 기괴한 이야기는 <기묘한 가족>에 길을 터준 격이다. <조용한 가족>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박인환 과 당시 단역으로 나온 정재영 이 나란히 출연해 어떤 기시감을 주기도 한다. 두 영화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한국인이 행복을 기원하는 방식을 희화화한다. 두 영화의 가족 구성원은 돈을 버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가치를 지키고자 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면서 웃음과 통증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자칫 잘못하면 인물을 조롱하는 인상을 안길 수 있을 터, 두 영화는 투쟁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존재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 두 영화는 그것을 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가 그러하듯, <기묘한 가족>은 제작 당시 정치 상황의 은유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 죽음에서의 회복을 보여주는 엔딩은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나다. 윤종신의 <환생>이 괜히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
그때가 아마 6-7년 전쯤이던가, 단편영화를 많이 봤다. 장편의 긴 시간을 버틸 만큼의 정신적 체력이 부족한 때였다. 단편 영화제에 가서 보고, 영상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고, 단편 모음 DVD도 사고 그랬다. 세상도 단편영화에 주목하던 시절이다. 어떤 영화 잡지에선 따로 그해의 단편을 뽑기도 했다. 2010년, 2011년 즈음에 조현철 감독의 < 척추측만 >과 함께 이 영화를 뽑는 사람이 많았던 거로 기억한다. 허정 감독의 < 저주의 기간 >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암전이다. 불길한 음악 위로,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불길하게도 한다. 화면 열리면,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광경. 전단지 좀 돌린다고, 뭐가 그렇게 죄송할까? 중학생 남동생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2년 전에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고 있다는 누나의 뒷모습은 기묘하다. 한 어른이 묻는다. 2년이나 지난 걸 지금 와서 그걸 어떻게 찾냐? 누나는 울먹인다. 그래도 우리 쫑쫑이, 꼭 찾아야 한다고. 지난 2년을 돌아본다. 이 기간에 동생은 키가 자라지 않았고, 누나는 성적이 떨어졌다. 키가 자라지 않는 동생은 그렇다 치자. 책을 아무리 외워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누나의 사연은 기구해 보인다. 병원도 다녀봤다. 종교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저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땅값이 떨어지는 등, 이 집 안 전체가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아빠는 마지막 수단을 내려고 무당을 찾아간다. 무당이 말한다. “녹색을 가까이하라.” 이제 영화는 소품, 배경, 미술, 의상 모든 것을 총동원해 초록의 세계를 보여준다. 온통 초록이 가득한 세상에서 길을 잃은 채 남매가 떠돈다. 초록은 수술실의 수술복처럼 불길하다. 그건 메스를 들이대 마구잡이로 인체를 헤집어 놓은 다음 다 고쳤으니 돌아가라고 미소를 짓는 사이코패스 의사의 수술복이다. 그 세계 깊은 곳까지 나아가던 남매는 불현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에게 묻는다. “개들도 원망 같은 거 하나요?” 그런 다음, 남매는 지금까지 중 가장 초록인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다리 밑을 지나면 새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초록색 공사 구조물로 덕지덕지. 그 아파트를 지나니 드디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과거의 집이 나온다. 낡은… 지나간…. 허물어진 세계… 거기서 남매는 쫑쫑이를 발견한다. 그건 그때의 쫑쫑이는 아니다. 쫑쫑이에겐 너무너무 녹색 같은, 괴상한 비밀이 있다.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지금의 세상을 떠올리게 됐다. 예언 같다. 아무래도 저주에 걸린 것 같다.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치던 소녀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맴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그래서 온통 녹색이다. 작은 녹색에서 큰 녹색까지 나아간다. 녹색 옷을 입고 녹색 가방을 멘 남매가 녹색의 공간으로 떠나는 여정 속에 우리의 얼굴이 보인다. 결국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무엇을 돌아봐야 할까. 죄송할 만한 나의 과거, 그걸 풀어줄 나의 초록은 어디에 있을까.
< 시간을 달리는 소녀 > < 하나와 앨리스 > < 클래식 > < 건축학개론 >....익히 보아 온 그 무수한 첫사랑의 멜로들을 대입시키고, 떠올린다 해도 좋다. < 5월 1일 >은 너무도 명백히 그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영화다. 그리하여 지레짐작으로 이 영화를 그렇게/진부한/클리셰/덩어리 코너로 제쳐놓고 안 본다면 조금 손해다. 그러기엔 좀 아까운 구석이 많다. <5월 1일>을 제대로 보려면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무수한 첫사랑 영화를 ‘제 맘대로’ 마구 가져와서 온전히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을까. <5월 1일>은 멋진 주연배우와 촬영, 음악,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 편지와 레코드라는 소품이라는 뻔한 요소가 기념할 만한 멜로의 장면으로 구현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2세대에 걸친 사랑의 이야기라 헷갈리지 않도록 멜로가 향하는 화살표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 부분에서 1차 혼돈이 온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연주를 듣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마찬가지 감상에 빠진 남자, 그리고 그 옆의 여자가 등장한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로 나온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고 부르려 하지만, 예의 그 여자가 팔짱을 껴서 포기하고 돌아선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교복을 입은 소녀 둘과, 이들을 지켜보는 남학생이 있는 지상철 장면이 나온다. 싱그러운 여름, 짧은 교복 치마. 단짝 친구, 등하굣길에 늘 만나는 남학생. 벚꽃이 푸른 수목으로 바뀐 걸 제외하고는 모두 < 하나와 앨리스 >의 도입부와 꼭 같아 걸리지만,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공연 장면에 등장했던 남녀의 과거 속으로 온 것 같은 플래시백 장면처럼 연결되지만, 이 소녀는 공연장에서 눈물 흘리던 여자의 딸 바이(정여희)다. 하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되는데, 현재의 중심축은 바이다. 그녀는 자꾸 관심을 보이고 쫓아오는 숫기 없지만 잘생긴 소년 예쫑수가 싫지 않은 눈치다. 바이의 단짝 친구의 생각은 좀 다르다. 실은 자신도 예쫑수에게 관심이 있으니, 바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예쫑수에게만 잔뜩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바이의 하루도 바쁘다. 친구랑 놀기도 바쁘고, 바람피운 아빠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상담도 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중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엄마 왕레이(가정문)가 그만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다. 평탄했던 바이의 학창시절도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엄마의 과거. 17살 소녀 왕레이(정여희)의 일상을 소환해 낸다. 교복 치마 길이는 딸 바이의 것보다 길어졌고, 발랄한 바이보다 수줍음도 많고 얌전한 소녀 왕레이. 그녀는 자꾸 못살게 구는 또래 남학생 린커밍(석지전)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 경쟁심이 센 린커밍은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도, 자전거 질주에서도 자꾸 자신을 앞지르는 왕레이를 향해 “다음엔 이기게 안 둬”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관심과 사랑을 그렇게 괴롭힘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연애. 린커밍과 왕레이가 펼치는 티격태격하고 풋풋한 과거를 회상하는 건 물론 식물인간이 된 왕레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그녀가 연주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른이 된 린커밍(임현제)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건축설계사가 된 린커밍은 그 사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사랑을 믿지 못해 헤어졌으며, 친구와는 나날이 늘어가는 나이에 대한 상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어른이 돼 버렸다.(이건 또 변명이 불가능할 만큼 너무 < 건축학개론 >과 닮았다.) 어쨌든 식물인간이 된 여자와 무료하고 허한 중년의 남자를 과거 햇빛 찬란했던 첫사랑의 한때로 착지시켜줄 ‘교통수단’은 여자의 딸 바이다. 엄마의 컴퓨터를 정리하던 소녀는 ‘보내지 않은 이메일’ 함에서 (연주회에서 그녀가 린커밍을 만난 후 쓴) 메일을 발견하고, 엄마 대신 그걸 전달하기로 한다. 마치 자신이 엄마인 냥.(엄마의 사랑을 구제해 주려는 노력은 <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나 < 클래식 >마저도 연상케 하니, 원 이거 참...) 5월 1일이 < 러브 어페어 >에서처럼 사고를 당한 날이라거나, 혹은 만나기로, 또 헤어진 날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이 날짜는 이들 사랑의 복선이 되는 비지스의 곡 ‘First of May''''에 해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키보다 컸었고, 다른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그 둘 사이의 사랑을 설명해주는 것 같은 가사를 가진 비지스의 곡은 1990년대 초, 타이베이라는 배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리고 린커밍과 왕레이 사이에서 오가는 레코드판으로 전달되거나, 또 전달되지 않는다.(< 러브 레터 >와 < 건축학개론 >의 사이 어디쯤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같은 설정) 어른이 된 린커밍은 갑자기 떠오른 왕레이를 향해 “5월의 공기는 그때와 같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갈 수 있지만, 그때로 다시 갈 수는 없다”라고 읊조리며,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며 뛰어놀던 농구장에 가서 농구를 하고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다. 린커밍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그때 갑자기 잊고 지냈던 과거와 도킹을 시도한다. < 5월 1일 >은 플래시백이 무수히 등장할 뿐 실제 과거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니, 명백히 판타지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신없이 오가는 과거와 현재를 마치 하나의 시간대처럼 이어줄 여러 장치들을 고민해 내고 적용시킨다. 린커밍과 왕레이, 그리고 딸 바이가 전개하는 사랑의 기억과 공유는, 각각의 내레이션과 편지를 읽는 동안 오버랩 되는 음성 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이 복잡한 오감 때문인지, 왕레이와 바이를 연기하는 1인 2역의 배우 때문인지, 관객은 이 과정에서 현재 시점의 17살 소녀 바이와 엄마 왕레이의 17살 시절이 오롯이 겹쳐지는 ‘판타지’에 빠져든다. 세대는 변했지만, 사랑 때문에 감정이 ‘접질러지는’ 지점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가 없다. 린커밍과 왕레이가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고 그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엔 바이가 친구와의 삼각관계로 예쫑수를 오해하고 힘들어한다. 십 대의 첫사랑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숙하고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풋풋하고 좋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두렵기도 하며, 실패할 경우 방어벽도 너무 낮은 위험한 도전일지니. 그렇게 조심스러운 접근 탓에 첫사랑의 신화는 스크린으로는 도저히 깨지지 않을 무한한 소재다. 자국 대만에서 보자면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 나의 소녀 시대 > 등 대만표 청춘물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영화로,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아시아의 성공적인 첫사랑 소재의 영화를 모두 짜깁기한다. 그럼에도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온 주격태 감독의 영상만큼은 그 중 독보적이다. 뭔가 일일연속극 같은 조악함이 엿보이는 시작 부분의 피아노 연주회 장면만 잘 넘기면 된다. 지상철 밖으로 우거진 푸른 초록,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발랄한 움직임이 시작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아, 이때부터는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르기 힘들다. 도심이지만 초록이 유독 많은 타이베이의 정경과 십대들의 어우러짐은 눈에 담아둘 만큼 아름답다. 막 폭우가 걷히고 난 후, 물웅덩이를 따라 걷던 린커밍이 왕레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순간, 혹은 소년들이 레코드판을 훔쳐내 커버를 벗겨 옥상에 올라가 모두 하늘로 날려버리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90년대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더 오래전 과거처럼 보이는 낯선 90년대가 선사하는 정서도 독특하다. 왕레이의 소녀 시절과 딸 바이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 정여희는 아마 이 영화를 보면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다. (좀 문제적 장면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된 린커밍이 그래서 순간 바이를 왕레이로 착각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