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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달에 부는 바람
< 달에 부는 바람 >은 주인공 예지의 엄마, 미영 씨가 쓰는 일기로 시작한다. 이 일기는 예지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꼼꼼하게 기록된 글이다. 예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예지의 엄마는 예지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기록하고, 그걸 바탕으로 혹시나 눈치채지 못했을 예지의 언어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예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낀다. 선풍기 바람에서 느껴지는 촉감만으로 몇 바퀴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꼭 넘어질 것만 같은데 넘어지지 않는다. 이 모습이 익숙한 일상인 듯, 춤을 추는 예지의 옆에서 미영 씨는 화분을 돌본다. 예지는 엄마의 화장품 냄새가 나면 외출준비를 한다. 예지를 데리고 나갈 때 미리 준비를 다 하는 엄마의 습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말을, 가만히 손을 대고 있는 목울대의 떨림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예지가 정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들을 느끼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승준 감독의 전작 < 달팽이의 별 >에는 예지와 마찬가지로 시청각중복장애를 가진 영찬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영찬 씨가 느낄 수 없는 시청각으로 이루어진 매체지만, 감독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영찬 씨가 겪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효과적인 화면과 사운드를 통해 비장애인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영찬 씨의 시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였다. 예지는 그런 교집합이 없다. 점자도 수화도 없다. 자신이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았던 세상을 기억하는 영찬 씨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는 예지는 또 다르다. 그런 예지와 세상의 교집합은 엄마다. 관객들은 엄마의 감정을 통해 예지를 바라본다. 한 인터뷰에서 미영 씨는, 세월이 정체된 것 같은 시간을 살았다고 했다. 아이들이 학생이 되고 성년으로 자라나는데 예지는 멈춰 서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다고. 곧 성년이 되는 예지의 몸은 이제 엄마보다 커졌는데도, 예지는 여전히 아기처럼 엄마에게 폭 안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찾은 구청에서 지문을 찍을 수가 없어서 지문채취용 용지를 잔뜩 받아와 예지가 잠든 틈에 지문을 찍어야만 하고,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모른 채 생리통에 괴로워하는 예지를 그저 안아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인물들에 집중한다. 지문채취의 목표를 달성하고 한참을 웃는 예지의 부모님의 모습,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언니, 같이 모여 앉은 밥상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당신 그릇의 만두를 모두 예지에게 넘기고 만 아빠... 그리고 예지는 그런 따뜻한 일상의 공기를 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았던 장면은 미영 씨가 집안의 화분을 돌보고 정성스레 잎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봄이 되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에게 하룻밤이었던 어떤 시간 사이에, 꽃을 피우고 훌쩍 자라버리는 식물들. 나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자신들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많은 존재들. 이 영화는 어쩌면 지나쳤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다른 언어를 가진 예지의 세상이 더 궁금해진다.
[한국영화걸작선]구타유발자들
< 구타유발자들 >이란 제목을 다시 생각해본다. 구타를 유발하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뮤지컬 오디션을 본 인정( 차예련 )은 교수 영선( 이병준 )의 차에 타고 한적한 강변에 내리게 된다. 목적이 뻔한 교수에게서 도망친 인정은 순박한 얼굴을 한 봉연( 이문식 )의 오토바이에 타게 된다. 그런데 봉연은 동네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 양아치들은 고등학생인 현재( 김시후 )를 목만 남기고 땅에 파묻는 등 학대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재는 고등학교 시절 봉연을 괴롭히던 문재( 한석규 )의 동생이다. 봉연은 경찰이 된 문재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들의 폭력은 서로 얽혀 있다. 과거의 폭력이 현재의 폭력을 유발하고, 지금 권력을 쥔 쪽이 약한 자를 끝없이 괴롭힌다. 원신연 의 두번째 장편 < 구타유발자들 >은 지금 봐도 불편하다. 그들의 폭력에는 도대체 이유가 없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 괴롭히고 싶으니까, 내가 힘이 있으니까. 현재를 괴롭히는 이유가 정말 그의 형 때문인 것일까? 봉연의 부하들은 과연 그런 과거를 알고 있을까? 그냥 괴롭힐 대상이 있으니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게 즐거우니까. 폭력이 그들의 놀이이니까. 마찬가지다. 교수가 인정을 강간하려 한 것은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판단한 아랫사람이니까. 누가 강하고 약한지 잘 알고 있는 교수는 시골 양아치들을 만나는 순간 고개를 숙인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육체적인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는 도시에서 온 중년 남자일 뿐이니까. 시골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시골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인정이 남아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그런 인식을 부정하는 영화들은 차고도 넘친다. < 안개마을 >은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폭력을 그린다. < 김복남 살인사건 >은 마을 전체가 폭력을 용인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이용하는 실태를 보여준다. 샘 페킨파의 < 어둠의 표적 >과 존 부어맨의 <딜리버런스>를 보면 시골이 오히려 더 끔찍한 폭력의 도가니다. <브레이크 다운>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시골의 농부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다. 살아가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은, 자연에게 잘못 배운 생존법이다. 도시에서 온 중산층 남자들은 시골 사람들의 폭력에 당하다가 마침내 저항하면서 광기를 드러낸다. 그들에 맞서 폭력을 휘두르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그것은 단지 광기일까? 어쩌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의 유전자가 아닐까?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크로마뇽인의 후손인 인간은 살인의 역사를 거듭해왔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이라는 발명품으로 덮어씌웠지만 우리의 본성은 결국 폭력일지도 모른다. 시골은 포장이 허술하기에 인간의 본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 일라이 로스의 < 그린 인페르노 >가 보여주듯, 식인종은 아주 순진하고 평온하다.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고 죽이고 먹는 것을 뺀다면. 원신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 구타유발자들 >을 구상하게 된 경위를 말했다. 단편 촬영 로케를 위해 인적이 드문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깊은 숲속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청년들과 만났다. 보는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함께 먹자고 권했다. 다 구워지지도 않은 빨간 고기를 쌈 싸서 먹으라고 건네주는 것을 다 받아먹었다.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거절한다면,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죽이고 내버리면 시체조차 찾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산속이었다. 그 경험이 <구타유발자들>로 확장되었다. 시골에서 만난 양아치들. 그들의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외부의 이방인들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온다. 영선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인정은 시골 양아치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그들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다시 영선의 차를 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사는 도시인이 보기에 시골 양아치들은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 구타유발자들 >은 무척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인정이 교수를 따라 드라이브를 나선 이유는 오디션에 힘을 써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권력에 타협한 것 역시 죄다. 폭력의 희생자였던 현재는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동일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 순간 그들은 결국 구타를 유발하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폭력의 자장 안에 기꺼이 들어갔으니까. < 구타유발자들 >은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끝난다. 육체적인 폭력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괴롭힌다. 어쩔 수가 없다. 폭력으로 망가져버린 봉연은 다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당한 만큼 어딘가에 풀어내야 한다. 과거를 용서하고 새로운 문명인으로 살아가기에 그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는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의 치졸한 양아치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패자이고,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악인은 권력을 가진 경찰이 되었다. 두들겨 맞고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악인들은 권력을 찾아 도시로 가거나 마을의 강자가 되었다. <구타유발자들>은 닫힌 공간 안에 그들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모두 몰아넣고 끝없이 폭력을 보여준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한참이 지나고도 기억이 난다. 봉연의 순박한 얼굴이 악마로 변하는 순간과 문재의 야비한 웃음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저 멀리 시골 어딘가에 그런 악인들이 있다고 <구타유발자들>은 말하지만, 정작 폭력의 발원지는 도시 아니 문명 자체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목만 남기고 우리를 땅에 묻어버리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존재하고 있다.
[신판주말의명화]디어리스트
2011년 10월 중국의 TV 뉴스를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유괴 사건이 있었다. 중국 광둥성에 있는 신흥 공업 도시인 선전(우리가 흔히 심천이라고 부르는, 홍콩 바로 위에 있는 도시). 시골에서 그곳으로 온 어느 건축 노동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다. 그와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데려간 남자아이는 길을 잃고 떠도는 듯 보였고, 두 번째 데려간 여자아이는 건축 현장에 누가 버린 듯했다. 그렇게 그 부부는 두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반면 아이를 잃은 부모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남자아이의 부모는 잃은 지 2년 만에 제보를 받고 찾아간 안후이성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아들을 되찾는다. 이 극적인 실화는 피터 챈(진가신) 감독에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 디어리스트 >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드물게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인 ‘고발’에 있지 않다. <디어리스트>에서 그는 유괴를 다루는 범죄 영화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듯하면서 위반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놓는다. 아이들의 실종이나 유괴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엔딩 부분에 가서야, 아이를 찾든 못 찾든 사건의 결말을 맞이한다. <디어리스트>는 다르다. 러닝타임의 중간쯤 왔을 때 우린 사라졌던 아이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된다. 조금은 황당하다. 진가신 감독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전반부의 뜨거웠던 드라마의 온도를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나머지 절반을 채워나가려는 걸까? 놀라지 마시라. 이 영화는 아이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전반부보다. 찾은 후의 이야기를 담은 후반부가 더 뜨겁고 흥미진진하다. 티안펭(주지오)이 사라진 날은 2009년 7월 18일이다. 아이의 아버지인 티안웬준(후앙보)과 어머니인 루시아오주안(하오레이)은 이혼한 사이다. 양육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PC방 주인. 손님들 사이에 싸움이 붙자 티안웬준은 아들에게 다른 데 가서 놀라고 하고, 아이들과 놀던 티안펭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후 스토리는 예상대로다. 루시아오주안은 아들을 잃어버린 전남편을 탓하고, 두 사람은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나선다. 아버지의 삶은 피폐해지고, 어머니(재혼한 상태)는 매일 고통 속에서 지낸다. 같은 처지에 있는 부모들의 모임에 나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슬픔은 잦아들지 않는다. 현상금을 노린 사기꾼들에게 속기도 하고, 아주 작은 단서만 있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지만 번번이 허탕 친다. 멘탈은 점점 약해져 때론 포기하려고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이때 전화 한 통이 온다. 발신지는 선전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중국 중부의 안후이성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이다. 그곳에 사는 한 사람이 우연히 전단지를 보았고, 마을에 매우 흡사하게 생긴 꼬마 하나가 살고 있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곳에 도착한 티안과 루는 2년 만에 아들을 되찾는다. 2년 동안 아들을 키워 온 사람은 리홍친(자오웨이). 남편 양밍푸는 1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서에서 털어놓는 그녀의 말은 기막히다.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는데, 2년 전에 남편이 티안펭을 데려오면서 도시에서 만난 여자를 통해 낳은 아이라고 했다는 것. 여자아이 양지팡(리지칭)은 누군가 버린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홍친은 남의 아이를 훔쳐 기른 악녀일까? 여기서 피터 챈 감독은 일종의 ‘이중성’을 통해 이야기를 뒤틀고 역설을 만들어낸다. 그는 티안과 루 부부의 아이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리홍친의 모성애가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범죄자가 아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지만 그럴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비련의 여인이며, 남편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믿었던 순진한 여자이며, 아이들을 진정 사랑으로 돌보았던 좋은 엄마이다. 티안펭은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거부하고 “엄마가 보고 싶다”며 리홍친을 찾는다. 티안과 루가 리홍친의 집에서 아들을 데리고 가는 장면은, 그들이 진짜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괴를 하는 듯하다. 티안은 아들을 둘러메고 미친 듯이 달리고, 리홍친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추격한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는 아이를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 디어리스트 >의 후반부는, 선전으로 온 리홍친의 이야기다. 어린 딸 양지팡은 복지 시설로 갔고, 리홍친은 되찾으려 한다. 시설에선 유괴범에게 다시 아이를 돌려주는 법은 없다고 일언지하로 거절하고, 리홍친은 남편이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오는 걸 본 증인이 있다고 한다. 죽은 남편의 동료인 탕칭샨(리우 디)이다. 아이를 되찾으려면 증인과 함께 변호사가 필요했고, 천신만고 끝에 가오시아(통다웨이)를 설득해 법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흥미진진한 건, 주변 인물에 대한 피터 챈 감독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플롯 구조는 독특한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주인공이 다르기에 메인 플롯의 관점이 영화 중간에 한 번 바뀌게 되며, 조연들과 관련된 서브 플롯은 이야기 전개를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곁가지가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와 테마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실종 부모 모임의 회장인 한더종(장이)는 6년째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포기하고 둘째를 낳으려 한다. 중국은 가구당 1명만 출산할 수 있기 때문에 당국의 출산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첫째 아이의 사망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가오시아는 전형적인 속물 변호사처럼 보이지만, 그에겐 아픈 가족사가 있다. 티안웬준이 아들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한 남자는, 자기의 아들을 대신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가난해서 키우기 힘들다는 것이다. < 디어리스트 >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그 전후 맥락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겐 말 못 할 사연과 자신들만의 고통과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범죄의 난무, 도시와 시골의 격차, 빈부 문제 등 현대 중국 사회의 환부를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좀 더 큰 관점에서 삶이라는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 금지옥엽 >(1994)이나 < 첨밀밀 >(1996) 등 피터 챈 감독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작품들이 지녔던 강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 디어리스트 >가 인상적인 건, 이 드라마엔 가해자는 없이 피해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홍친의 남편은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 않고, 영화에서 실제적으로 벌어지는 건 예상치 못했던 비극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애통함이다. 티안과 루는 그렇게 갑자기 아들을 잃을지 몰랐고, 리홍친은 두 아이를 하루 아침에 빼앗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실종 부모 모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고, 정신적 문제로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가오시아도 마찬가지다. 유괴 사건에서 시작한 영화는 자칫 범죄 영화의 관습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피터 챈 감독의 관심사는 사건보다는 사람이었던 셈. 여기서 감독은 삶의 여러 아이러니를 만들어나간다. 되찾은 아이는 오히려 리홍친을 그리워하고, 이혼한 부부는 사건을 통해 가까워지며, 루는 재혼한 남편과 이혼하려 한다. 가오시아는 맡지 않으려 했던 리홍친의 사건을 통해 휴머니티를 되찾고, 새 아이를 가지려는 한더종은 또 다른 죄책감에 빠져야 한다. 마지막 신은,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아이러니다. 너무 강력한 스포일러이기에 차마 밝힐 수 없지만, 리홍친은 엄청난 진실 앞에서 주저 앉게 된다.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랬다면 그 모든 고통과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피터 챈 감독의 드라마틱한 세계관이며,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기도 하다.
[칼럼]그 아름다웠던 농성장 - 밀양 다큐멘터리 <즐거운 나의 집 101>을 만든 이유
< 즐거운 나의 집 101 >은 밀양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비교적 둘로 나뉘었는데, ‘불호’ 쪽에 선 사람들은 대체로 땅과 자연에 대한 할매들의 애착, 국가폭력 앞에 내던져진 그들의 한(恨)과 의식의 각성, 그리고 몸을 던져 막아내는 격렬한 투쟁 이야기를 밀양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캠핑 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산속 농성장의 즐거운 농성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립된 농성장을 기본적으로 휘감고 있는 긴장과 불안을 어느 정도 균형감 있게 담았더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 영화는 밀양 투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투쟁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밀양에는 ‘할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부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말이 왜 쉽게 타파되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영화는 밀양 주민만이 아니라 연대자들도 밀양 싸움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밀양 싸움은 다양하게 말해져야 한다. 나는 적어도 < 즐거운 나의 집 101 >이 ‘밀양 투쟁’의 ‘다양성 영화’의 테이프를 끊었다고 생각한다. 갖다 붙이자면 말이다. 이 영화 제목에 나오는 ‘101’은 송전탑 번호이자, 그 송전탑이 세워질 자리에 들어선 농성장 이름이기도 하다. 다 알다시피, 밀양에는 총 69기의 765kV 송전탑이 세워졌는데, 송전탑 번호로 치면 82~150번까지이다. 이 중 단장면 용회동 뒷산에 세워질(지금은 다 세워진) 101번 송전탑 부지가 이 영화의 중심 무대이고, 이 부지에 농성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기를 지켰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101번에 농성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농성에 합류하러 처음으로 101번에 오르던 그 날 밤이 생각난다. 저녁 7시쯤이었지만, 초봄의 산속은 7시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랜턴을 들고 발밑만 겨우 비추면서 깜깜한 산을 혼자 오르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내 딴에는 농성장을 지켜야 한다는 ‘투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투지는 얼마 안 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싸울 의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런 전투적 자세는 농성에 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전투적 자세가 별 도움이 안 되다니? 영화 < 즐거운 나의 집 101 >은 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당시에 나는 고립된 산속에서 농성을 하면서 잘 해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투지’로 똘똘 뭉친 농성은 밥이나 겨우 지어서 밑반찬 두세 개로 끼니를 때우며 견디는 것이었다. 전쟁터이지 않은가? 더구나 물도 전기도 없는 고립된 산속이다. 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일일이 등짐을 져서 날라야 했으므로, 양치질이나 세수는 물론 설거지도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주민과 연대자들은 개미처럼 등짐을 지고 나르면서 끊임없이 전을 부치고 과일을 깎고 산 아래서 순대를 쪄오고 닭발을 삶아 왔다. 고등어와 석쇠를 사 와서 불을 피워 고등어 장작 구이를 해먹었고, 오리 백숙을 끓여 먹었다. 산에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안정이 있었고, 같이 밥해 먹으며 연대가 무르익었다. 누군가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 우리는 밤마다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농성장 주변에 널린 벌목한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 멋진 카페를 만들었다. 날이 좋은 밤이면 이 카페는 훌륭한 야외무대가 되어주었고, 낮에는 차 마시고 수다 떠는 장소가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농성 중임에도 우리는 문화생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101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 묵을 수 있게 끊임없이 움막을 손보고 화장실을 만들고 난로를 청소하는 등의 부지런함과 함께, 그늘에 모여앉아 기타를 딩동 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낮잠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이다. 아무도 이거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고, 왜 거기 있냐고 여기 있으라고 구속하지 않았다.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나서서 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각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 취향대로 시간을 보냈다. 주로 밥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남자보다는 여자가, 출퇴근하는 연대자보다는 상근하는 주민과 연대자가) 일도 안 하고 밥만 먹고 술만 마신다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다들 무언가는 하고 있었기에. 재밌는 얘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거나,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거나, 아니면 썰렁한 개그로 사람들을 웃겨주려 하거나. 이렇게 101번은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피가 마르는 긴장과 무료함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고 끝까지 잘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지는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은 알아갔던 것이다. 송전탑은 밀양을 넘어서는 탈핵의 문제이며, 탈핵은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싸움이란 것을. 송전탑은 반드시 세워질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싸움은 사람과 더불어 즐겁게, 잘 먹고 잘살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행정대집행으로 인해 강제로 산을 내려온 밀양 주민들은, 이제 곧 송전탑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임에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이 말은 당시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웠으나, 행정대집행 이후 1년 동안 내가 본 밀양은 과연 무엇이 승리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101번을 지켰던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을에 바느질 방을 열고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여전히 산에서처럼 수다를 떨고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으며 예쁜 수예품들을 만들어냈다. 마을 뒷산에 101번 송전탑이 쑥쑥 올라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민들은 (주문량을 채우기 너무 바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탈핵탈송전탑 원정대’를 꾸려서 전국 각지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을 다니며 실상을 파악하고 투쟁 경험을 나누었다. 밀양 주민들은 탈핵의 아이콘이 되었다. 밀양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싸움에 승패를 나눌 수는 없지만, 101번 사람들은, 밀양은, 투쟁으로 얻으려 한 것을 이미 투쟁 과정에서 이루었다. 국가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않고 그저 놀러 가는 아이들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듯이, 송전탑 반대 투쟁의 목적도 결국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투쟁의 한가운데서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밀양 주민과 연대자들이 있었다. 나의 영화는, 거대하게 치솟은 69기의 철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밀양 싸움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알리는 영화이다.
[영화현장]그 아름다웠던 농성장 - 밀양 다큐멘터리 <즐거운 나의 집 101>을 만든 이유
<즐거운 나의 집 101>은 밀양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비교적 둘로 나뉘었는데, ‘불호’ 쪽에 선 사람들은 대체로 땅과 자연에 대한 할매들의 애착, 국가폭력 앞에 내던져진 그들의 한(恨)과 의식의 각성, 그리고 몸을 던져 막아내는 격렬한 투쟁 이야기를 밀양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캠핑 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산속 농성장의 즐거운 농성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립된 농성장을 기본적으로 휘감고 있는 긴장과 불안을 어느 정도 균형감 있게 담았더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 영화는 밀양 투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투쟁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밀양에는 ‘할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부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말이 왜 쉽게 타파되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영화는 밀양 주민만이 아니라 연대자들도 밀양 싸움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밀양 싸움은 다양하게 말해져야 한다. 나는 적어도 <즐거운 나의 집 101>이 ‘밀양 투쟁’의 ‘다양성 영화’의 테이프를 끊었다고 생각한다. 갖다 붙이자면 말이다. 이 영화 제목에 나오는 ‘101’은 송전탑 번호이자, 그 송전탑이 세워질 자리에 들어선 농성장 이름이기도 하다. 다 알다시피, 밀양에는 총 69기의 765kV 송전탑이 세워졌는데, 송전탑 번호로 치면 82~150번까지이다. 이 중 단장면 용회동 뒷산에 세워질(지금은 다 세워진) 101번 송전탑 부지가 이 영화의 중심 무대이고, 이 부지에 농성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기를 지켰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101번에 농성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농성에 합류하러 처음으로 101번에 오르던 그 날 밤이 생각난다. 저녁 7시쯤이었지만, 초봄의 산속은 7시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랜턴을 들고 발밑만 겨우 비추면서 깜깜한 산을 혼자 오르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내 딴에는 농성장을 지켜야 한다는 ‘투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투지는 얼마 안 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싸울 의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런 전투적 자세는 농성에 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전투적 자세가 별 도움이 안 되다니? 영화 <즐거운 나의 집 101>은 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당시에 나는 고립된 산속에서 농성을 하면서 잘 해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투지’로 똘똘 뭉친 농성은 밥이나 겨우 지어서 밑반찬 두세 개로 끼니를 때우며 견디는 것이었다. 전쟁터이지 않은가? 더구나 물도 전기도 없는 고립된 산속이다. 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일일이 등짐을 져서 날라야 했으므로, 양치질이나 세수는 물론 설거지도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주민과 연대자들은 개미처럼 등짐을 지고 나르면서 끊임없이 전을 부치고 과일을 깎고 산 아래서 순대를 쪄오고 닭발을 삶아 왔다. 고등어와 석쇠를 사 와서 불을 피워 고등어 장작 구이를 해먹었고, 오리 백숙을 끓여 먹었다. 산에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안정이 있었고, 같이 밥해 먹으며 연대가 무르익었다. 누군가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 우리는 밤마다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농성장 주변에 널린 벌목한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 멋진 카페를 만들었다. 날이 좋은 밤이면 이 카페는 훌륭한 야외무대가 되어주었고, 낮에는 차 마시고 수다 떠는 장소가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농성 중임에도 우리는 문화생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101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 묵을 수 있게 끊임없이 움막을 손보고 화장실을 만들고 난로를 청소하는 등의 부지런함과 함께, 그늘에 모여앉아 기타를 딩동 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낮잠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이다. 아무도 이거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고, 왜 거기 있냐고 여기 있으라고 구속하지 않았다.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나서서 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각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 취향대로 시간을 보냈다. 주로 밥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남자보다는 여자가, 출퇴근하는 연대자보다는 상근하는 주민과 연대자가) 일도 안 하고 밥만 먹고 술만 마신다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다들 무언가는 하고 있었기에. 재밌는 얘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거나,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거나, 아니면 썰렁한 개그로 사람들을 웃겨주려 하거나. 이렇게 101번은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피가 마르는 긴장과 무료함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고 끝까지 잘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지는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은 알아갔던 것이다. 송전탑은 밀양을 넘어서는 탈핵의 문제이며, 탈핵은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싸움이란 것을. 송전탑은 반드시 세워질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싸움은 사람과 더불어 즐겁게, 잘 먹고 잘살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행정대집행으로 인해 강제로 산을 내려온 밀양 주민들은, 이제 곧 송전탑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임에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이 말은 당시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웠으나, 행정대집행 이후 1년 동안 내가 본 밀양은 과연 무엇이 승리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101번을 지켰던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을에 바느질 방을 열고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여전히 산에서처럼 수다를 떨고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으며 예쁜 수예품들을 만들어냈다. 마을 뒷산에 101번 송전탑이 쑥쑥 올라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민들은 (주문량을 채우기 너무 바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탈핵탈송전탑 원정대’를 꾸려서 전국 각지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을 다니며 실상을 파악하고 투쟁 경험을 나누었다. 밀양 주민들은 탈핵의 아이콘이 되었다. 밀양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싸움에 승패를 나눌 수는 없지만, 101번 사람들은, 밀양은, 투쟁으로 얻으려 한 것을 이미 투쟁 과정에서 이루었다. 국가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않고 그저 놀러 가는 아이들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듯이, 송전탑 반대 투쟁의 목적도 결국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투쟁의 한가운데서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밀양 주민과 연대자들이 있었다. 나의 영화는, 거대하게 치솟은 69기의 철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밀양 싸움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알리는 영화이다.
[2주의시네마테크]윤정희 특별전 - <야행> <화려한 외출> <여섯개의 그림자> <신궁>
돌아오는 한국영상자료원 특별전의 주인공은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배우 윤정희 다. 윤정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이며,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연기로 영화를 빛내는 배우였다. 게다가 작품 선택에도 신중해서 ‘윤정희가 출연하는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성이 한 영역에서 중요한 축으로 잘 회자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배우를 중심으로 영화사의 궤적을 보는 기회란 매우 소중하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의 다양한 여성상과 함께, 우리 영화사에 중요한 작품 및 다양한 민족심리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중 주인공인 윤정희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면서 지금 시점에서도 가깝게 호흡할 법한 영화들을 골라보았다. < 야행 >은 여성의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60년대에 동거 중인 커플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영화에는 결혼관계에 회의적인 남녀의 모습이 등장한다. 알콩달콩과 지리멸렬로 반복되는 가정의 모습이 현실적이고 또 공감된다. 영화의 문제의식은 미스 리( 윤정희 )의 여정을 따라 나아간다. 그녀는 사랑했던 이를 베트남전쟁에서 잃었고, 육체적인 관계에 집착하는 남성들로 넘쳐나는 폭력적 도시와 이와 마찬가지인 동거남에 환멸을 느낀다. 여기서 여성을 통해 보는 한국의 과거는 비극이고, 현재는 공허하다. 여성의 심리적 눈을 통해 구성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흥미롭다. 한국 사회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담은 영화로는 < 화려한 외출 >도 빼놓을 수 없다. 성공 가도의 여성경영인이 갑자기 섬마을의 아낙으로 끌려가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설정은 한국 사회의 불안 그 자체다. 전후에 짧은 시간 동안 이룩한 근대화 과정에서 전근대의 자장을 신경질적으로 두려워하는 사회심리가 한 여성의 이상한 여행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사회진출을 이야기하는 커리어우먼과 남편에게 맞는 시골 아낙으로 동시에 분한 윤정희의 모습은 그녀가 재현하는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한 번에 느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여섯개의 그림자 >에서 현주( 윤정희 )는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가 가장 두려움에 떠는 대상은 그를 스토킹하는 전남편 상국이다. 현주는 재산보다도 자신의 새로운 사랑과 일상을 방해하는 그를 견디지 못하고, 상국이 기차로 이동하는 틈을 타 그를 달리는 기차 밖으로 밀어버린다. 또 그녀는 애초에는 자신의 재산을 보고 접근했던 태일과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그를 용서하고, 복수를 당해 죽을 뻔도 하지만 되려 자신의 범죄 앞에 오열하는 등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행동에 있어 변화무쌍한 여성이다. 돈과 사랑의 스릴러야말로 현대의 드라마가 아닌가. < 신궁 >에서의 무당은 위의 현대 여성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 내내 억척스러운 왕년이( 윤정희 )의 모습이 윤정희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남편을 지키지 못해 굿을 접은 무당 왕년이의 마지막 굿판이 주는 긴장감과 복수에 성공한 후 보이는 왕년이의 신랄한 미소가 극적 반전과 쾌감을 전한다. 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명이었던 윤정희는 주로 요염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고 하는데, 핍박당하는 기층 여성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윤정희의 표정과 미소에는 그녀를 당찬 여성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윤정희 는 한국의 다양한 얼굴과 고민을 성실하게 담아낸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배우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대표작 20편의 목록만 해도 신분의 장벽 앞에 놓인 기생, 부박한 삶의 조건을 이겨내는 민중, 현대사회 욕망의 굴레에 빠져드는 도시인까지 인물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특별전 제목이 말하듯 윤정희의 색채로 물든 영화에는 지적이고 세련되게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는 배우가 깃들어 있다. 윤정희라는 배우가 무수한 영화에 등장하는 일은 그 기록 수치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만큼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렸다는 면에서 중요하고 값진 영화사의 유산이다.
[초이스]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1. 카프카의 「변신」은 시각 예술로 변환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작품이다. 벌레라는 존재의 구체성이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순간 서사는 평면적이고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를 함의하는 대신 그저 ‘어느 날, 한 불우한 남자가 벌레로 변신해버렸다’는 식의 기이한 이야깃거리에 그치게 된다. 1977년 작 <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The Metamorphosis of Mr Samsa >에서 캐롤라인 리프는 그 난점을 비껴간다. 「변신」의 특정 국면을 소실점 삼아 원작의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재배열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정제해 「변신」을 감정적인 상황 부조리극으로 변주한다. 주어진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고, 그 이후의 여백에 캐롤라인 리프가 채우는 것들이 더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작품은 카프카 적이다. 흑백의 절제된 화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형태감, 바람 한 번 불면 흩날려 사라질 모래라는 재료의 물성은 원작 「변신」의 근간 정서를 자극한다. 눈앞의 현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말이다. 샌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은 카프카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와 일말의 유머를 살려낼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빠른 화면 전환을 용이하게 구사하도록 만들어준다. 도입부에서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뒤뚱거리다가 떨어지자 시점샷이 되었다가 어느새 다시 그레고르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이동한 장면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시점과 소실점이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이탈하거나 부유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2. 인간을 벌레로 비하하는 멸칭은 인류가 벌레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순간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의 한국만큼 유달리 벌레의 비유가 일상화된 현상은 전례가 없는 듯하다. 국내 각계각층에 달라붙은 ‘○○충’이란 단어가 어찌나 자주 쓰이는지 이제는 ‘~충’ 접미사가 낯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벌레로 보는 사회라면 어떤 사회여야 할까. 새삼 벌레에 대해 생각해본다. 벌레는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생물이다. 자극과 신경 반사만으로 구성된 삶이다. 그것은 앞날을 예측하고 과거를 반성해 현재를 조정하는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인간으로 치자면, 고도의 추상적 사고는 고사하고 주어지는 현재만으로도 팍팍한 삶이다. 인간이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 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크게 유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현재 한국에서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얻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헬조선’과 ''○○충''이 비슷한 시기 유행한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두 단어를 통해 어떤 희미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악조건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고통받는 벌레 같은 삶들의 지옥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미덕은 복합적인 인간성보다는 대체 가능한 단순 기능성이다. 원작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바로 그 요구에 적응하는 충실한 일꾼이다. 그의 직업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외판원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대규모로 탄생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그 일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개인의 인간성과 무관하다. 「변신」은 스스로 소모품이 된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실제 벌레와 다를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지금 여기의 우리’ 쪽으로 약간 바꿔보면 어떨까. ‘헬조선’에 사는 우리가 벌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3. 다시 캐롤라인 리프의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속 그레고르는 기본적으로 딱정벌레의 모습이지만, 관객 입장에서 동그란 눈과 부들거리는 다리로 기호화된다. 상대적으로 귀여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외양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그레고르는 실제 벌레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완전히 벌레가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고르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이입할 수 없는 벌레의 그것이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그레고르의 귀가 보인다. 인간의 귀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물성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귀만 유독 유동적인 형태 변화를 보이며 화면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혹을 준다. 그레고르는 미동도 없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간적 신체 기관이 퇴화하고 음악 역시 소음에 불과해진 걸까. 샌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유동성은 모든 장면을 확정되지 않는 판단 유보적 상태로 머무르게 한다. 관객은 확신할 수 없다. 더욱이 원작의 비참한 결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원작에서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를 열렬히 감상하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일벌레였던 그레고르가 진짜 벌레가 되자 오히려 이전에 딱히 챙겨 듣지도 않았을 연주를 갈구하는 역전이다. 예술의 향유를 인간성의 상징으로 그려내는 이 대목에서 감독이 작품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캐롤라인 리프는 인간성에 대한 원작의 고찰을 약간 비틀어서 질문한다. 벌레가 되어도, 혹은 벌레가 된 지금, 연주를 들을 만한 감각 기관이 남아 있을까? 추상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그게 뭐든 간에 어떤 예술을 향유할 여력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일 수도 있다.
[초이스]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 자기만의 방 >(2013)을 통해 자신의 방에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더듬고 방 벽에 프로젝션을 하여 세상과 만나던 고재홍 감독이 <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을 통해 방 밖으로 나왔다. 고정된 채 자신의 방 안을 탐구하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서울의 도심 속을 걸어 다니는 그의 손에 들린 채 세상과 만난다. 취업준비를 하며 오가는 길에 찍은 학원과 지하철의 풍경들, 퀴어페스티벌을 반대하며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의 손에 들린 채증용 카메라. 그 속에 담긴 풍경들은 혼란스럽고 허무하기만 하다. 대학 시절 문학 교수님께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에세이 내레이션에서 감독은 “1920년대에 헤밍웨이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와 인간에 의해 허무를 느꼈다면,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시대에 저는 왜 이렇게 허무한 감정이 드는 걸까요.”라며, 세상과 대면하며 느끼는 자신의 갑갑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1920년대 헤밍웨이의 세대가 느낀 허무와 2010년대 우리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다른 허무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폐허가 된 풍경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 시대의 허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후에 오는 환멸의 감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세계, 21세기 한국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그처럼 뚜렷한 계기가 없는 불명의 허무이다.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지 오래인, 이미 폐허가 된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허무. 이러한 감독의 마음은 그의 카메라를 통해서뿐 아니라 그가 꾼 꿈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취업에 실패한 취준생의 자살로 비칠까 걱정이었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월호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자신이 완전히 소멸되는 꿈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 아픈 어머니를 뒤로한 채 불꽃축제를 찍으러 나갔지만 불꽃이 터지지 않은 꿈. 이렇듯 감독은 혼란하고 허무한 세상과 그 풍경이 반영된 자신의 꿈들 사이를 헤맨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독에게 구원, 지도가 되어주는 것은 문학과 빛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빌려온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나이 많은 웨이터는 모든 것이 허무이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아늑하고 환한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라 말한다. 감독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이것들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고립된 개인의 위로나 평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독은 주인공 노인이 청새치, 상어와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며 지지 않겠다는 마음, 아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있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 역시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 속 사랑했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로서의 빛, 꿈속에서와는 달리 팡팡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과 이를 보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어떤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성호경을 긋는 조문객의 뒷모습이다. 취업준비학원이든, 퀴어페스티벌이든 어딘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속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부유하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의 카메라는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현재 청년세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카메라와 내레이션은 상기한 것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허무와 아름다움을 분명히 구별한다. 또한 줌인한 보름달을 스크린에 가득 채움으로써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영화의 엔딩으로 보여주며 무기력과 허무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청년세대에 대하여, 무기력과 허무에 고립되거나 혹은 공허하고 맹목적인 의지만 보여주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대부분인 요즘,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놓지 않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한국영화걸작선]꽃섬
영화 < 꽃섬 >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가 아니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임직함(vraisemblance)의 원칙을 어기는 로마네스크의 진실에 가깝고, 그리하여 내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2001년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작가영화’란 단어를 떠올렸다. 확실히 <꽃섬>은 상업영화의 반대지점에서, 엘리트적이고 까다로운 예술영화의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하지만 15년 후 다시 보니 ‘문학적 해석의 뉘앙스’가 풍부하다는 점이 돋보인다. 두 종류의 화면이 교차되는 까닭에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고, 장르적 기대치는 엇갈린다. 로드무비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자동차’ 혹은 ‘도로’가 상징하는 개인의 자유가 이곳에는 없다. 지도상의 남해는 공식적 지명일 뿐, 그곳에 가는 방법은 소개되지 않는다. 꽃섬 역시 짐작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지형뿐 아니라 개별 요소도 마찬가지다. 마치 호러영화 장면처럼 칼을 꺼내 든 운전사는 극적 소명을 다 하자 북쪽으로 사라지고, 산속에서 만난 노인은 여인을 치료해준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요컨대 이 극에서 악의, 혹은 선의에 대한 되갚음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건이나 목표가 존재하고, 이를 되돌리기보다 ‘운명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꽃섬>은 지독히 금욕적인 영화다. 이 작품이 지닌 고아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실상 이 고행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2000년 초반의 한국영화의 환상성은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자신을 조율했다. 비슷한 시기 나온 < 동감 >(2000)이나 < 시월애 >(2000), < 번지점프를 하다 >(2000)와 < 소름 >(2001) 등과 비교해도 그렇다. < 꽃섬 >의 이야기는 불합리한 상황을 출현시키기 위해 현실적 전제, 또는 비정상적인 것의 토대가 되는 정상적 범주를 소개한다. 공포의 효과를 직접 드러내는 것보다, 이처럼 노스텔지어적 개별 과거가 재현될 때 극은 더 진실해진다. 더불어 의사 현실(pseudoreal)의 경향은 관객에게 실재의 이미지가 아닌,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현실 유리적인 상황이 스크린의 유토피아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바깥 현실이 방해하더라도, 내적 상상력은 커질 것이다. 인물들은 멈추지 않고 꽃섬으로 나아가고,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정말 도달했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된다. 테오도르 모노의 말처럼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하지 않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의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꽃섬에서 인물들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하다. 어쩌면 영화의 감동은 이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 감각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장르 혹은 미학적 측면이 아닌, 내면의 초자연적 경험을 통해 영화는 ‘시간의 일탈’을 완성한다. 결정적 사건의 부재에서 시작된 시간의 상쇄는, 디지털 이미지의 콜라주를 통해 조합된다. 혜나의 손에 들린 디지털카메라가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한때 어느 것보다 무거웠지만 이제는 한 인물의 머리보다 작은 뉴미디어의 등장,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미래가 반사된다. 무언가가 분명히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이 정서를 장악한다. 노스텔지어란 모름지기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을 볼 때 발생하는 감정의 추락이다. 이처럼 불시에 출현하는 디스트락시옹의 테마가 < 꽃섬 >의 패치워크를 완성하는 동력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로드무비적 동력은 자동차의 모터가 아니라, 사라짐의 미학이다. 쇠락의 아름다움을 통해, 35mm 은판 영화술을 대체할 ‘디지털 시네마’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너무 과장된 비유가 될까. 다시 보니 송일곤 의 < 꽃섬 >은 ‘영화감독의 영화’라는 작가적 인상보다, 상징적 뉘앙스가 가득한 시에 더 가깝다. 한때 ‘폐기된 무언가’였던 인물들이 ‘폐기될 무언가’로서 아날로그 필름을 직시하고 있다. 마치 고다르의 현대영화가 지닌 리리시즘을 2000년대 초반의 송일곤은 추종했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과도한 서정성의 위험에서 연출자는 끝내 자신을 보호한다. 현기증의 연속인 내면의 시간은 현실과 어우러진 설득력을 얻고자 타협한다. 극 중반을 스쳐 지나간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결단코 전체의 하모니를 부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다만 더 나은 것을 향한 기다림으로 포장될 뿐이다. 기다림이야 늘 좌절되는 것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과거로의 함정이 <꽃섬>의 성공 전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