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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중고, 폴
재작년인가,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이사 준비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자고 하던 친구였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미술 작업을 그만두고 본가로 들어간다고 했다. 엄마 캥거루가 어쩌고, 주머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가 저쩌고,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는데 나는 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다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의 작업을 늘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 너의 결정이 슬프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이 무척 속상하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삿짐 차에 주로 실릴 물건들은 그동안 작업한 캔버스 그림들과 자질구레한 미술용품들뿐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 이걸 그냥 버릴지, 아니면 팔아서 짜장면이라도 사 먹을지 고민했던 물건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그건 자취방에 흔히 볼 수 있는 50리터짜리 소형 냉장고였는데, 내가 알기론, 그 냉장고에겐 이름이 있었다. ‘폴 앤 니나 (Paul & Nina)’라고... 그러니까 그 친구의 애칭이 ‘폴’인데, (당시) 그의 여자 친구의 애칭은 ‘니나’였고, 그 두 사람이 작업실 겸 자취방으로 함께 쓸 원룸을 계약하던 날, 그 냉장고도 구입하여, ‘폴 앤 니나’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숨) 암튼, 뻔하기 짝이 없지만 닭살 돋게 소중한 히스토리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활용품센터나 중고물품 가게에 들고 가서 짜장면값이라도 받고 팔려고 했는데 막상 천 원짜리 몇 장 받아서 오자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하긴, ‘폴 앤 니나’라는 이름까지 붙어있는 냉장고니까... 그래서 그냥 들고 나왔는데 막상 뜨거운 한여름 낮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자니 그만 짜증이 확, 치솟아서 당시 걷고 있던 다리 밑 하천으로 냉장고를 ‘풍덩!’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광경이 지나가던 경찰의 시야에 고스란히 잡혔고 친구는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던 냉장고를 ‘직접’ 건져서 파출소로 끌려갔다. 지금부터 나는 이 친구가 그 후 파출소 테이블에 앉아서 경찰들의 눈총을 받으며 써내려간 반성문을 ‘약간만’ 옮겨보려고 한다, 파출소에서 나올 때 담당 경찰에게 복사를 부탁해 갖고 왔다고 했다. 힘들 때 가끔씩 읽어보고 싶었다나? (예술가들이란~~) 그가 나에게 보여준 이 글을 읽으면서 난 이 반성문을 트리트먼트 삼아 단편영화를 하나 만들어보라고 친구의 예술가적 허세를 부추겼다. “반성문. 안녕하세요. 저는 아침만 해도 이사를 가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쓸 만한 냉장고를 버려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센터 사장님으로부터 그냥 버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서부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어서 좀 더 시원하게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무작정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고 반쯤 둥둥 떠 있는 냉장고를 보면서 그제야 제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근래 집주인 아주머니께서도 그런 제가 못 미더워 몇 달째 했던 말을 반복하고 계시는데, 밀린 월세를 내라고 하며, 환경을 바꿔보는 게 좋을 거라고도 하고, 제가 너무 게으르다고도 했습니다. 냉장고만 잘 처리하고 나면 이사를 갈 것입니다. 50리터 냉장고... 완벽한 냉동실도, 완벽한 냉장실도 아닌 이 애매함은 그저 예전 여자친구가 남겨놓고 간 것입니다. 또 남은 것들 중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선물했던 비싼 색연필과, 한 여자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는데... 그녀는 늘 사는 게 헤엄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희는 이 동네 미대를 나왔습니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직업은 없고, 종종 벽화로 돈을 벌었습니다.... (하략)” 자, 여기까지가, 중고 냉장고를 무단투기하는 현장이 경찰에 적발되었지만 다행히 전후사정이 참작되어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훈방 조처된 ‘내 친구’의 이야기로 ‘포장’한 단편영화 <중고, 폴>의 소개 글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이 반성문을 보고 들으면서, 주인공 남자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 것인지, 어떤 이유로 냉장고를 버리려고 했으나 결국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취방과 작업실을 공유하며 미술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 커플이 이 영화의 제작과 연출을 맡았는데, ‘애지중지 키우던 고추 모종을 몰래 훔쳐간 범인을 찾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고추가 사라졌다!>가 이들의 첫 영화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들은 진짜로 자신들에게 벌어졌거나/벌어졌던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거의 아름다울 정도로 단편스러운 러닝타임에 맞춰서 생각해내는 단단한 아티스트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영화가, 비록 영화적인 센스는 위의 소개 글이 주는 기대치만큼 재치가 넘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실제로 그들에게 벌어졌던 진실한(authentic) 에피소드처럼 ‘보인다’는 것에 나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낀다. “진짜로 있었던 일 맞지?” 친분을 이용해 고집스레 물어봐도 이들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지난밤의 숙취로 어질어질하면서도 도둑맞은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이 여성감독의 귀여운 경험이고, ‘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하고 성실한 미술작가들’은 이들 커플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이지만, 높은 건물에서 벽화 작업을 하다가 크레인이 추락해 사망한, 가난한 미대생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쩌면 순수한 픽션이라서 할 말이 없었거나, 그 세계 속에 살아보았던 사람들끼리만이 짐작하고 숨길 수 있는 비밀이자 상처라서 꼭꼭 숨겨야 했기에 차마 말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내가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나오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가난하고 어두우며 무서운 세계에 대한 이들만의 코멘트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연출자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러더라. 못한 말이 있으면 다음 작업에서 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이들 커플이 내놓을 세 번째 영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요즘 이들은 장편 그래픽 노블 작업에 열심이라고 한다. 암튼, 최근 애니메이션 작업이 추가되어 완성된 < 중고, 폴 >이 첫 번째 영화 보다는 좀 더 많은 상영기회를 얻게 되어 이들 커플에게 기분 좋은 차기 작업의 동기가 되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추천사를 참 길게도 써보았다.
[실험영화]프리 레디컬스 (렌 라이, 1958)
1980년에 출판된 미국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 인 아메리카 Marquis Who’s Who in America」에는 렌 라이(1901-1980)가 ‘모션 컴포저(Motion Composer)’로 등재되어 있다. 직역하면 ‘동작(움직임) 작곡가’가 될 이 합성어는 드로잉, 회화, 직물염색(납염, Batik), 사진, 영화, 키네틱 조각, 시와 산문 등의 매체로 작업해왔던 라이가 본인의 작업을 ‘움직임의 형상(figure of motion)’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를 대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모션 컴포저’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운동의 리듬을 탐구했던 라이를 대변한다면, 1958년에 첫 상영되었던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는 그의 작업 이력 전체를 함축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는 화학용어로서 유리기라고 번역되는데, 홀전자(unpaired electron)를 갖는 원자나 분자를 의미한다. 보통의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는 회전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빛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가 가해져서 전자의 결합이 끊어지면 홀전자가 되고, 이는 다른 원소들과의 반응을 촉진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한다. 라이는 전 작업을 걸쳐서 신체와 물질을 탐구했었고, 자신의 창작이론을 진화론, 신경과학, 양자역학, 유전학에서의 발견들을 통해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는 신체와 물질 각각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환 역시 에너지로 생각했고 안무를 에너지에 헌정된 예술로 간주했다. 그가 자주 썼던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오래된 뇌(old brain, 이성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깊숙한 곳)’와 유전자(태고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활동들이 각인된 저장소)는 사물의 운동(에너지)와 공감각적으로 공감(empathy)한다. 라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색채, 댄스, 리듬 등의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은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 래디컬스>에서는 제목이 뜻하듯, 하나의 형상이 전개되고 다른 형상으로 변주되는 과정이 화학적인 촉발과 반응처럼 구성되었고, 아프리카 바기르미족(Bagirmi)의 드럼 음악(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에 맞춰 안무 되었다는 점에서 라이의 관심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 별표 시퀀스의 일부 출처: http://thethird-eye.co.uk/free-radicals-by-len-lye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다소 결연한 의지로 만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라이의 영화들은 제작비의 출처에 따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the London Film Society, 1925년에 설립되어 1939년까지 지속되었던 영국 최초의 영화 협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캐럴 리드와 같은 감독들도 회원이었다)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던 1929-34년, (2) 영국 중앙우체국(GPO, the General Post Office)의 영화과 등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던 1935-40년, (3) 영국 정보부(MOI, the Ministry of Information)의 사실주의자 영화과(Realist Film Unit)에 소속되어 나치에 대항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던 1941-43년(공교롭게도 MOI는 라이의 영화를 보고 선전영화는 더 직설적이고 덜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에 뉴욕으로 옮겨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 (타임 사에서 제작했던 단편 뉴스릴 영화 시리즈로 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상영되었다) 시리즈의 연출가로 뉴스릴 영화를 만들었던 1944-51년, (5) 제작비 대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던 1952-59년, (6) 키네틱 조각을 만들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그의 고국 뉴질랜드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던 1979-80년이다. (지면의 한계로 작품의 상세한 목록을 생략한다. http://sensesofcinema.com/2002/feature-articles/lye-2/#filmo을 참고하기 바란다.) 1945년 경 <마치 오브 타임>의 사무실에 있는 렌 라이 사진의 왼쪽은 라이가 디자인한 시리즈의 로고 출처: http://www.art-newzealand.com/Issue101/lye.htm <마치 오브 타임> 시리즈의 일부를 연출했던 시기까지 라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존 그리어슨이 이끌던 GPO의 영화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 년에 두 편 정도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장르를 엄밀히 따지자면 광고에 해당한다. 작품 제작을 지원했던 단체 혹은 회사들(예를 들면, 임페리얼 Imperial 항공사)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작품 제작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달았을 뿐, 라이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라이의 대표작을 색채의 관점에서 꼽아야 한다면, 단연코 <컬러 박스 Colour Box>(193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거의’ 처음으로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록상으로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아르날도 지나(Arnaldo Ginna)와 브루노 코라(Bruno Corra)가 1908년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착상을 했고, 1910년에 네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 한스 스톨텐베르그(Hans Stoltenberg)나 앙리 스토크(Henri Storck)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는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이렉트(direct) 필름’이라고 불렀다. 이를 지칭하는 유사한 용어로는 ‘카메라 없는 영화(Cameraless film)’나 ‘필름 위에 그린 애니메이션(Drawn-on-film animation)’이 있고, 좀 더 폭넓게는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도 해당된다. <컬러 박스>는 영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에게 보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다이렉트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컬러 박스>는 1935년 브뤼셀 국제영화제의 판타지 영화 부문에서 명예상(Medal of Honor)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나치 관객들은 오스카 피싱거의 추상영화에 비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형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즈 음악이 흑인적(negroid)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에 영국에서 이 작품을 본 노만 맥라렌(1936년부터 1939년까지 GPO에서 일했다)은 “여기 손으로 그린(handpainted) 영화의 개척자가 있다...그것은 마치 내게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렌 라이는 그 방식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했었다. 라이는 이 시기에 듀페이컬러(Dufaycolor), 가스파르컬러(Gasparcolor), 테크니컬러(Technicolor)와 같은 컬러 필름들을 실험하는 데 집중했었다.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출처: https://filmcolors.org/2014/04/18/dufaycolor-films-by-len-lye 1951년에 라이가 <마치 오브 타임>을 그만두고, 1952년에 자신과 부인 앤(Ann)만 속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다이렉트 필름으로 정했던 것은 카메라로 찍는 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손으로 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라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영화사 이름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한스 리히터의 초청을 받아서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뒤이어 콜롬비아대학,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을 설립하고 나서 첫 영화로 <컬러 크라이 Color Cry>(1952)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라이의 영화 작품 포맷은 16mm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라이가 틈틈이 해왔던 포토그램(photogram, 필름 위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빛에 잠깐 노출시켜서 상을 맺게 하는 방법) 작품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라이는 모슬린 천에 새겨진 점(dot) 패턴을 마음에 들어 했고, 포토그램 방식으로 필름 위에 점 패턴을 복사했다. 이때 라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춤추는 원자”였다. 원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치 오브 타임>을 연출할 당시에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아인슈타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커져 왔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듬 Rhythm>(1957)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을 찍은 푸티지들을 점프 컷으로 구성해 만든 1분 길이의 파운드푸티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도 점과 선의 패턴이 나온다. <리듬>은 1957년 뉴욕 아트 디렉터스 페스티벌(New York Arts Directors Festival)의 텔레비전 광고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크라이슬러사가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싫어했고 광고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었다. 1957년에 라이가 <프리 래디컬스>를 만들 전의 상황이 이러했다. 그런데 1958년 브뤼셀 엑스포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던 실험영화제 EXPRMNTL로부터 작품을 보내달라는 초청을 1957년에 받았다. (EXPRMNTL은 일명 크노케-르-주트 실험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1958년부터 74년까지 총 다섯 번 개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실험영화작가들이 상호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제가 우리에게 좀 남다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실험영화를 사용한-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했던바 내에서-첫 공식기록으로, 1957년 6월 23일 자 「국제실험영화제」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해당 영화제의 작품 공모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본 연재에서 맡은 유현목의 <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는 초청을 받고 약 8개월간 <프리 래디컬스>에 집중했었다. 이 작품은 라이가 품어왔던 ‘춤추는 원자’의 실현이자, 블랙 리더(leader)로만 만든 첫 영화이다. 라이는 16mm 블랙 리더의 이멀전(emulsion)을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긁어내어 형상을 새겨 넣었다. 필름 이멀전을 벗겨내어 만드는 영화를 ‘스크래치(scratch) 필름’이라고 한다. <프리 래디컬스>는 스크래치 필름이기 때문에, 곧잘 맥라렌의 <블링키티 블랭크 Blinkity Blank>(1955)와 비교되기도 하고 이 작품에 라이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맥라렌의 작품은 검은 배경에 색채가 강조되는 작품이고, 라이의 <프리 래디컬스>는 흑백으로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스크래치는 라이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영향 관계라기보다는 작업 태도를 공유하는 작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사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로 EXPRMNTL의 2등 상을 받았다. 대상은 폴란드의 발레리안 보르보츠크(Walerian Borowczyk)와 얀 레니차(Jan Lenica)의 <돔 Dom>(1958)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은 만 레이, 존 그리어슨, 노만 맥라렌,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에드가 바레즈였다. 라이는 상금으로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성과에 힘입어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가 미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배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공식 상영된 곳은 아모스 보겔이 개최했던 ‘시네마 16’뿐이었고, 상영료로 50달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라이는 제작 후원을 구하고 실험적인 영화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비서로부터 답장을 받긴 했다), 미국 해외공보처, 문화교류재단 등에도 편지를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프리 래디컬스> 프린트 가격으로 4천 달러를 제시했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이는 1959년에 「영화는 예술인가? Is Film Art?」라는 글을 쓰고 영화작가로서 파업을 선언한 뒤 키네틱 조각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 피터 쿠벨카는 여러 차례 라이에게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키네틱 예술가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와 같이 <프리 래디컬스>는 일련의 영화작업이 수렴되었던 마침표이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라이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가 라이의 작품 이력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79년에 키네틱 조각에서 영화로 돌아와 다시 대면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리 래디컬스>는 1979년에 라이가 재편집했던 판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이가 키네틱 조각을 경유하면서 받은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의 키네틱 조각 작품들의 제목과 작업 방식을 보면 차라리 <프리 래디컬스>가 이후의 작품들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가 품었던 ‘춤추는 원자’라는 생각은 그의 키네틱 조각들에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라이의 키네틱 조각은 최소한 32개의 작품이 만들어졌거나 고안되었다. 이 작품들의 목록은 새로 발굴되는 자료가 추가되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데, 그중에 작품들의 제목을 일부 나열하면 <원자적 춤 Atomic Dance> <벨 막대기 Bell Wand> <춤추는 원자 Dancing Atom>,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and Two Twisters(일명 삼부작 Trilogy)> <우주 Universe(일명 루프 Loop)> 등이다. 라이는 이 개별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데 모아놓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에서 번개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샹고(Shango)의 신전을 만들려고 했다. 라이는 개별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을 만들었을 때, 같은 스케일로 제작한 적이 없고 늘 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 이상인 경우가 많다. 관람객이 촬영한 <우주> 관람객이 촬영한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라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 때, 그가 낙서(doodling)라고 부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낙서는 재료를 만지고 흔들거나 휘어보면서, 재료에서부터 파생되는 운동(에너지)의 형상을 몸으로 느껴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낙서는 그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도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어였다. 라이는 조그만 필름 표면 위에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로 그리거나 긁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재료를 느끼며 형상을 낙서해나갔다. 낙서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과 유사한 방법인데, 라이가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던 직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영향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이는 초현실주의가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비판했고 언제나 몸을 중심에 놓고자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이의 낙서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라이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금속으로, 가늘고 긴 조각(strip), 막대, 판(sheet), 롤(roll) 등의 기본 형태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필름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키네틱 조각에서도 필름의 물성 자체에 대한 라이의 관심이 연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이는 금속 재료로 기본 형태를 만든 뒤에 모터나 전자석을 붙여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키네틱 작품들은 지속시간이 그의 영화들의 평균과 같이 4분에서 5분 정도였다. 라이는 재료에 열처리를 하거나 표면을 사포로 긁어내서 질감에 변형을 주고, 이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차이들을 실험했다. 재료의 소리도 중요했다. 라이는 키넥틱 조각품에서 나는 소리들을 따로 녹음에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아이튠즈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키네틱 작품을 전시할 때, 각각의 작품들에서 반사되는 빛과 소리가 대위(counterpoint)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들은 아래에 삽입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잘 드러나 있다. [영상 3] <낙서: 렌 라이의 인상들 Doodlin’: Impressions of Len Lye>(1987) [영상 4]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 Two Twisters>(1995)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를 재편집한 이후 <공간 속의 소립자들 Particles in Space>(1979)을 만들었다. 평자들에 따라서 후자를 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스탠 브래키지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다. 물론 <프리 래디컬스>에 대해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걸작”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공간 속의 소립자들>에서 사용된 소리는 라이의 키네틱 조각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된 것이다. <프리 래디컬스>와 <공간 속의 소립자들> 사이에 라이의 키네틱 조각을 놓으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스케일이다. 개인적으로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 답을 스케일에 대한 경이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라이는 소립자의 운동과 태양의 운동은 에너지란 측면에서 같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영화로 번역하면 16mm의 작은 표면 위에 새겨진 미세한 운동은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이미지의 운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같다. 다만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확장되었을 때, 필름 표면 위의 미세한 운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증폭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조각은 삼차원이고 영화 스크린은 평면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라이가 필름 위에 몸으로 새긴, 그래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차이는 필름 이멀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고, 이는 스크린 상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반복해서 느껴야만 터득될 수 있다. 영화의 초창기, 그토록 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념비적인 조각을 구현할 때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장애들을 영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영화를 만들고 보던 학생이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혀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이 당혹감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부끄러움 속에 감추어버리지만, 사실 이러한 스케일의 차이는 탐구되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프리 래디컬스>를 볼 때에는 가능한 작은 스크린을 통해서 먼저 본 이후(만약 스마트폰에서 본다면 가급적 세로로), 최대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렌 라이에 관한 사실들은 로저 호록스(Roger Horrocks)가 2001년에 펴낸 「렌 라이: 자서전 Len Lye: A Biography」과 2010년에 출간한 「움직이는 예술: 렌 라이의 작품 Art that Moves: The Work of Len Lye」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렌 라이에 관한 문헌 목록은 http://sensesofcinema.com/2007/great-directors/lye/#film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영화현장]미술팀: <걷기왕>의 풍부한 색감
영화미술은 영화의 시각적인 톤앤매너(Tone&Manner)를 제시하고 구현하는 작업이다. 미술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이 영화의 톤앤매너를 정하면 미술팀은 그 콘셉트에 맞추어 진행하게 된다. 공간의 구조는 어떻게 할 것이며, 공간의 분위기는 어떠해야 하고, 그것에 맞게 사물을 어떻게 배치할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미술팀은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콘셉트 스케치, 세트디자인, 공간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소품의 디자인까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디자인을 하며, 그 후엔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해 줄 세트팀, 소품팀과 작업을 공유하고 디자인에 맞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감리과정을 진행하게 된다. 프로덕션 기간 중에는 구현된 공간에 콘셉트에 맞는 소품을 배치, 세팅하는 작업 즉, 세트 드레싱을 진행한다. 이렇게 완성된 공간에서 촬영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촬영 중에도 미술적인 부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며 현장 진행을 한다. 이것이 미술팀의 작업의 대략적인 과정이다. 영화 안의 공간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영화 안의 공간은 스튜디오 세트, 오픈 세트, 로케이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로케이션의 여건이 여의치 않거나 로케이션에서 구현할 수 없는 공간일 경우 대부분 스튜디오 세트에서 촬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세트를 만드는 경우를 오픈 세트라고 하며, 이 두 가지는 영화에 맞게 구조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맞춤 신발처럼 꼭 맞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정확한 콘셉트의 구현과 외부 방해 요소가 없어 빠른 촬영을 돕기도 한다. 반면 로케이션은 콘셉트에 맞는 장소를 섭외해서 촬영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변경이 가능하다면 좀 더 영화에 맞게 덧붙이거나 일부 변경을 해서 공간을 디자인한 후 사용하기도 한다. 로케이션은 실제 공간이기 때문에 구조가 정해져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영화에 부합하는 로케이션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트디자인이라는 과정이 없이 바로 데코디자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와 같이 로케이션에서 공간을 어떻게 얼마나 변형을 할 것인가, 또는 어떠한 방식으로 데코를 할 것인가, 그로 인해 이 공간이 얼마나 시나리오의 상황에 부합하는가를 설정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의 시작이다. 결국 스튜디오 세트, 오픈 세트, 로케이션에서 세트디자인의 과정은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지만, 공간의 데코레이팅은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에 대한 모든 결정은 효율성의 고려에 대한 결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간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공간에 적합한 가구의 선택, 동선에 알맞은 배치 그리고 어떤 디자인의 소품이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 이 모두는 공간 분위기를 판가름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 작업을 위해서 미술팀은 큰 가구부터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스타일, 모양, 색상 등을 콘셉트에 맞추어 결정하고 알맞은 위치에 배치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예를 들어 호러 영화의 드라큘라 집에 핑크색 레이스 커튼을 넣었다고 생각하면, 그 커튼으로 인해 호러의 분위기가 깨지고 공간의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단, 일부러 넣은 설정이라면 다르겠지만. < 걷기왕 >은 예산이 적은 영화였고 한 달 동안 촬영을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여서 세트를 따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케이션 헌팅에서 정해진 장소에 디자인과 드레싱 하는 과정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앤매너를 잡았지만 그에 맞는 공간이면서, 촬영에 용이한 환경을 가지는 장소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장 공간 찾기가 어려웠던 곳은 만복의 집과 학교 그리고 육상부실이었다. 만복은 강화도에 사는 여고생이다. 지역의 특성상 아파트나 연립주택보다는 전원주택에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공간은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성격이나 상황 생활습관 그리고 분위기를 대변하기 때문에 가장 부합한 장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의 설정도 가져가면서 인물의 캐릭터와 영화의 콘셉트도 가져가야 하기에, 어쩐지 황량하고 여고생보다는 할머니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우사가 있는 일반 시골집보다는 따뜻한 정서가 묻어나는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반 미술 콘셉트 회의에 이러한 콘셉트에 부합한 레퍼런스 공간들을 찾아 제시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부에서 여러 장소를 헌팅한 후에 가장 만복이 살 것 같은 장소였던 한옥으로 결정되었다. 만복집 로케이션 만복집 콘셉트 스케치 만복집 결과물 마당 한켠에 자리 잡은 아치형의 창고가 있어 소순이(소)의 집으로 설정했다. 기존의 외양간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는데, 우선적으로 콘셉트에 부합하기 위해 벽에 작화(설정된 색상을 칠하고 질감을 만들며 생활감과 세월감을 주는 작업)를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다음, 공간의 씬에 자연스러운 동선이 만들어지도록 소품 배치를 계획했다. 여기서 필요 없을 물건들은 제거하고 영화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 그래서 기존에 있던 파라솔과 테이블은 없애고 문과 평상으로의 동선이 바로 이어지게 계획했다. 작화가 공간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첫 번째였다면, 커튼과 같은 패브릭 요소들로 미술세팅(데코레이팅)을 해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이 두 번째 요소가 된다. 어떤 색감의 어떤 패턴을 쓰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커튼을 설정하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백여 개의 원단 샘플 중에서 선택된 것이 주황색의 커튼. 마당 화단의 푸른 녹음의 색감과 반대되는 주황색을 함께 써서 공간에 색감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이 기회에 말하지만 < 걷기왕 >에서는 주황빛의 색감이 많이 보이는데 주황은 활동적인 에너지의 색이며 식욕의(크게 꿈을 향한 열정(욕심)으로 보았다) 색이기도 하고 강화도의 배경과 만복이 걸어 다니는 설정상 푸른 시골길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대비해서 설정한 색이기도 했다. 영화상 배경은 따뜻한 봄부터 초가을이였지만 실제 촬영은 패딩을 입고 촬영에 임해야 할 날씨였기에 푸른 녹음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 마당 곳곳에 풀과 꽃들을 심고 화분을 가져다 놓고 대문의 담과 집에도 담쟁이 넝쿨을 설정해서 하나하나 벽에 붙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만복 집뿐만 아니라 이 영화 곳곳에 조화나 화분을 이용하여 계절감을 바꿔서 세팅했다. 그렇게 세팅하고 나니 비로소 생기 있는 분위기를 주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공간을 디자인하고 데코플랜을 세울 때 많이 고려하는 부분은 이 공간에 사는 인물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을 하는 것이다.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취향, 성격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공간에서 캐릭터가 엿보여야 한다. 인물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이 한데 모여 인물과 공간을 더 견고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집에 어릴 때부터 살았던 만복의 흔적을 넣었다. 어릴 때 그린 낙서나 초등학교 때부터 만복이가 학교 과제로 만든 공작 물품들을 설정으로 집에 곳곳에 배치하고, 만복의 어릴 때 그림이 붙어있는 부분도 설정했다. 더불어 만복의 가족들이 같이 살고 있는 요소들을 배치하려고 했다. 육상부실 로케이션 육상부실 콘셉트 랜더링 육상부실 결과물(1) 육상부실 결과물(2) 육상부실 또한 건물 색감부터 바꾸며 시작했다. 내부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그 안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육상부실 안에 메인 공간으로 훈련하는 곳과 탈의실, 세탁실까지 자연스러운 동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설정하고 디자인에 들어갔다. 우선 시멘트벽과 합판, 샌드위치 패널로 이루어진 이 공간에 색감을 입힐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들을 모색했다. 만복이 육상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공간과 상대적인 이질감을, 육상부가 되어서는 동질감을 부여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메인색상은 활동적인 에너지의 색감인 주황 색감으로 정해 육상부 내부와 육상부원에게 부여하고,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육상부실에 있는 만복이 상대적 공간과의 이질감을, 육상부가 되었을 때는 주황색 유니폼으로 동질감을 부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색감을 풍부하게 쓰고자 했다. 공간의 전체적인 색감과 배치, 구체적인 소품의 종류들을 선택한 후 로케이션 드레싱을 들어갔다. 소품을 차례로 위치시키고, 소품도 설정된 색으로 다시 도색했다.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색상을 많이 썼기 때문에 색감과 세팅에서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계속 고려하면서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영화에서는 색감이 도드라지지 않게 작업을 하는 편인데, < 걷기왕 >에서는 색감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화면에서는 색감이 풍부하되 산만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했다. 이것이 육상부실을 디자인하고 데코하는데 제일 많이 신경 쓴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운동기구들이 눈에 잘 띄기 위해 강한 색을 많이 썼는데, 영화 안에서 그것들만 도드라지지 않고 공간과 인물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보이도록 초점을 두었다. 위의 두 공간에서 계속 언급했듯 < 걷기왕 >은 색감이 풍부한 영화이고 싶었다.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 모르는 여러 색이 모여 있는 팔레트처럼 말이다.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십 대(만복) 같기도 했다. <걷기왕>이 진행되는 방식은 만화 같은 판타지 함이 있지만 이야기는 학창시절 한 번쯤은 겪었을 현실이 있는 두 가지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두 가지가 상대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듯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작은 예산의 영화는 각 파트가 추구한 콘셉트를 실행하고 유지하는 것이 쉽진 않다. < 걷기왕 >에서도 콘셉트를 유지하고 퀄리티를 잃지 않고 구현하기 위해 적은 인원에서 많은 일을 해내야 했고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증대시킬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했다. 다른 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촬영만 한 달 남짓인 촉박한 스케줄임에도 세트팀을 따로 꾸릴 수 없었기 때문에 중요했던 작화도 미술팀 안에서 진행해야 했다. 촬영하는 동안 미술팀의 누군가는 촬영장을 빠져나가 작화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촬영 내내 이어졌지만 연출자를 포함한 촬영조명과 소통이 있었기에 시행착오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달여의 짧은 시간 동안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끝이 났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있지만 짧은 프로젝트 속에서 놓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의 선택과 결정이 후에도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쉬움도 있지만 앞으로 할 영화들이 많을 것이기에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걸작선]군번없는 용사
“나의 눈물은 인간의 눈물이고 나의 사명은 인류의 희망입니다. 부디 전해주시오. 인류의 희망은 자유라고!” - 송영호의 대사 광고 카피로도 쓰인 이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때는 전선(戰線)이 고착된 채 전쟁은 계속되던, 그리하여 후방에서의 게릴라전(戰)으로 혈육 간에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극이 되풀이되던 1951년 겨울 즈음, 장소는 북한이 점령하고 있는 마식령산맥 인근의 어느 마을이다. < 군번 없는 용사 >는 인민군 장교 아우 송영훈( 신성일 )과 인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유격대 대장 형 송영호( 신영균 ), 최고인민위원회의 대의원이지만 은밀히 형의 유격대를 지원하는 아버지( 최남현 ) 사이의 비극을 다룬다. 아우에 의해 처형당한 아버지의 시체를 수습한 형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사명’을 지속할 것을 대원들 앞에서 천명한다. 여기서 형의 사명이란 아우를 죽이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반동’ 아버지를 처형해야 했던 동생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형제는 이념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적으로 삼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인류’를 위한 사명이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정반대의 위치에 놓인, 그러나 같은 운명을 감당하는 형제에 대한 관객의 공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그려내는 것이 핵심이다. 2시간의 러닝 타임을 끌고 가는 팽팽한 긴장감은 이와 같은 균형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영화의 재현관습과 검열제도 아래서 이러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인민군이 혈육을 살해하는 것은 대개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표상하는, 관습적인 서사의 장치로 사용되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친살해에 대한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 번민이 극을 끌어가는 한 축으로서 위상을 부여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이만희 감독은 불과 2년 전에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작품(< 7인의 여포로 >)이 난도질당하고 그 자신은 인신구속이 되는 수난까지 겪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유격대에 남몰래 협조하는 것으로 속죄하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처벌받는 등 ‘반공’영화로서 받아들여질 만한 요소를 충분히 배치해두기는 했지만, 공감을 넘어서 매혹까지 느끼게 하는 인민군 소좌 송영훈의 캐릭터는 당시 한국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재현의 임계점에 육박한다. 이만희 감독 특유의 빼어난 미장센, 그리고 격정적이되 핵심을 찌르는 대사들과 정교하게 짜인 동선이 인물의 내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 송영훈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도 평균 이상이지만, 보위부 본부와 감옥, 그리고 보위부 부장( 허장강 )의 집안을 담은 실내 장면들은 특히 탁월하다. 예컨대, 영훈이 형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아버지를 취조하는 고문실과 바로 옆의 감방에 갇힌 채 소리로만 상황을 짐작하는 어머니( 황정순 )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교차편집을 통해 축적되어온 긴장감은 영훈이 아버지 대신 자신의 팔에 인두를 갖다 대는 순간에 폭발한다. 경악하는 어머니 얼굴의 미디엄 쇼트로 마감되는 이 장면은 히치콕의 심리적 스릴러를 연상시킬 만큼의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다. 이것은 영훈의 내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장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들 가족의(더 나아가 민족의) 비극적 역사가 집약되어 표현되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작은아들은 형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아버지를 죽음으로써 겁박해야 하며,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이 극단적 상황은 결국, 목격자 어머니를 제외한 모두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포연이 자욱한 전장에 홀로 살아남은 인간, 또는 적의 총탄에 동지를 모두 잃고 그 스스로도 죽음 앞에 선 인간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에서부터 < 군번 없는 용사 >, 그리고 < 1950 04시 >(1972)에 이르기까지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를 번번이 마무리하는 이미지였다. 그와 같은 이미지는 역사로부터 출발했으되 종국에는 역사마저 초월해버리는 인간의 실존적 순간을 그려내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도리와 ‘인류’의 사명을 양립할 수 없게 만들었던 냉전 시대 한국의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인가? 감독 이만희를 때로는 검열의 피해자로, 또 때로는 국책영화의 감독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의 전쟁영화들을 관통하는, 그와 같은 모호함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이 모호함이야말로 냉전의 최전선 한국에서 허용될 수 있었던 재현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초이스]매니멀즈
지난 한 해는 페미니즘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내에서는 쌓여가던 문제의식과 감정들이 몇 가지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왔고, 페미니즘은 가장 뜨거운 화두로 등극했다. 자연히 페미니즘과 관련된 콘텐츠 역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런 2016년을 뒤로 하고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KIAFA)와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에서 준비한 일련의 웹 애니메이션이 공개되었다. ‘창의 인재 동반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현재 웹에서 볼 수 있다. 그 중 <동그리니>는 임신과 육아의 현실적 공포와 고단함, 쓸쓸함을 비롯한 복잡한 감정을 담담하게 묘사했고 <츄츄랜드>는 성 이분법을 깨트리는 특징적인 디자인이 돋보여, 앞서 말한 맥락 속에서 페미니즘적 독해가 가능해 보인다. 이는 < 매니멀즈 > 역시 마찬가지다. < 매니멀즈 >는 한 여성의 과거 남자친구들을 동물에 비유해 묘사하는 코믹한 시리즈물이다. 각 에피소드마다 한 동물이 그려지며 1편 토끼를 시작으로 돼지, 기린, 나무늘보로 각각 이어져 마지막 화는 유니콘으로 마무리된다. 동물의 특성과 도처에 있을 법한 지질한 남자 군상이 배합된 연애의 풍경이 주요 포인트다. 토끼, 돼지, 기린, 나무늘보 경망스럽고 촐싹대는 토끼, 식탐 많은 비만의 돼지, 키가 크다는 장점 하나로 헛된 자기도취에 빠진 기린, 게으르고 뭐든 한 박자 늦는 나무늘보. 모두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연애대상으로서의 남자다. 대비적으로 유니콘은 어디에도 없다는 ‘정말 괜찮은 남자’다. 흰 원피스에 긴 머리와 무표정의 특색 없는 여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애의 풍경을 구성하는 정물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여성의 자의식은 뒤로 물러나 있다. 아마도 기억하는 주체인 여자를 평균점으로 삼아야 남자 측의 과잉이 두드러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한국에서, 여성은 부지불식간에 콘텐츠 속에서 대상화된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남자의 연애 대상이나 보상으로 그려지곤 한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도식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문화적으로 공기처럼 당연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대상화를 역으로 뒤집기 위해서는 단순 뒤집기 이상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 매니멀즈 >에서 보여준 어떤 방법들은 감독이 의도했든 안 했든 그것을 일정 이상 수행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 매니멀즈 >는 남자를 관찰대상으로 삼기 위해 모두 동물로 탈바꿈해야 했다. 일단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된 이상 얼마든지 공격적으로 묘사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뭐라고 하든 신랄하게 묘사하든 어쨌든 결국 토끼고, 돼지고, 기린이고, 나무늘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같은 발언도 톤만 부드럽게 하면 욕인 줄 못 알아듣더라는 이치다. 그런데 잠깐, 남자를 동물에 비유한 것이 ‘남자는 짐승이다’는 식의 암시일까? 그렇게 읽는다면 일차원적이고, 오히려 <매니멀즈>가 주는 여러 가지 재미를 놓쳐버린다. 서두에 < 매니멀즈 >를 비롯해 <동그리니>, <츄츄랜드>가 페미니즘적으로 독해가 가능하다고 쓰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감상의 한 갈래일 뿐, 이들 모두 맥락 없이 보더라도 유의미할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남성 필자가 여성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다루든 무조건 ‘페미니즘으로의 독해’로만 치환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기에, 마지막으로 직접 작품을 보고 즐기기를 권하는 것으로 갈무리하겠다. < 매니멀즈 > 온라인으로 보기 http://tv.naver.com/v/1401285
[초이스]어떤 점거
살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나와 공동체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를 포함한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래된 질문이지만 낯설어서 답을 구하기 쉽지 않다. 아니 우선 그 질문 앞에 서기 어렵다. 일상을 영위하는 일이 예전보다 몇 배 어려워졌고 운 좋게 그런 질문 앞에 선다고 해도 진지해지면 창피해지는 주변 분위기에 어디 물어볼 곳도 없다. 이 질문들은 사회변혁에 대한 실험이 일상에서 사라진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낯설다. 사랑 고백 같은 아니 사랑 고백이라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 어떤 점거 >를 보고 있으면 위의 질문들이 떠오른다. 영화는 “2009년 12월 25일 시작해 2011년 6월 8일 마무리 된 두리반 점거농성의 531일과 그 시간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에너지를 모두 담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기록영상이기보다는....” 로 시작된다. 감독은 고백만큼이나 사랑스럽게 일상을 잡아낸다. 스마트폰으로 찍어낸 농성장의 일상은 거칠고 어둡지만 그 만큼 친밀하다. 칼국숫집의 주인은 안종녀와 유치림이지만 농성장의 주인은 농성을 함께 하는 ‘상근자’를 포함한 이곳을 찾는 모두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불편에 맞서 농성장을 살아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은 전기가 끊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기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는 것부터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농성장엔 햇빛발전기, 자가발전 전구, 연탄, 뜨거운 물이 전기를 대신한다. 번개탄 네 개를 사용해도 연탄불이 붙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유치림의 모습은 그에 대한 감독의 사랑만큼이나 길게 그려진다. 그리고 불편해진 상황을 버티는 것이 농성장의 일상임을 보여준다. 보통은 불편함이 모여 피로를 만들고 결국에는 무기력으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농성장에서는 불편은 다른 것들을 만든다. 안종녀와 유치림 그리고 ‘상근자’(농성장에 연대하러 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들은 불편함을 다르게 소화한다. ‘상근자’들의 잠자리 추위는 유치림이 뜨거운 물로 채운 페트병의 온기로 밀어낸다. 언제든 불쑥 염탐하러 들어오는 용역들의 일상적 위협이 만드는 긴장은 ‘상근자’들의 음악으로 해소한다. 안종녀는 늘어난 ‘상근자’들을 위해 국수를 더 삶으며 자기 순서를 선뜻 내어주고 ‘상근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순간들을 나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은 새로운 감정들과 시간들 그리고 다른 경험들로 변한다. 철거 때문에 텅 빈 공간은 연대하러 온 홍대의 뮤지션들의 공연장으로 변하고 공연이라고는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유치림은 농성이 끝나면 공연장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공사를 위해 버려진 공터는 싱싱한 채소를 얻을 수 있는 텃밭이 되고 옥상은 햇빛발전기를 위한 공간이 된다. 그렇게 농성장은 자본의 질서 대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공간과 시간이 된다. 싸우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기에 투쟁하는 ‘상근자’들과 안종녀, 유치림은 일상을 새롭게 구성하며 풍요로워졌다. < 어떤 점거 >는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다. ‘상근자’로 농성장을 지킨 감독은 자신이 경험한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고 곱씹어 내어 자신만의 대답을 내놨다. 독립다큐멘터리는 감독의 시선이 닿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누구의 강요도 틀도 아닌 것이기에 영화는 감독의 대답이 된다. <어떤 점거>는 사회변혁의 실험이 어려운 시기에 개인이 어떻게 연대하고 싸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살아낼 수 있는지 힌트를 준다.
[초이스]군더더기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물며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 2017 신작전의 프로그래머를 제안 받고 영화(혹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라 불리고자 하는 영상)들을 보며 내내 들었던 질문이다. 웹과 하드웨어, 각종 통신망과 랜선, 창고, 위성 사이에는 (무리해서 이야기하면 뇌까지) 너무나 많은 데이터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공유할 수도 있고 극장에서 상영될 수도 있다. 또한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모여 버튼만 누른다면 언제든지 영화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처럼 영상에 대해 변화된 지각 체계 속에서 영화는 세계와 어떻게 통신하고 빛을 발하는가? 어, 영화의 정의가 달라졌나?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 몇몇 영화들은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줬다. 마침 이번 신작전 중 한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글 청탁을 받고 긴장과 질문을 안겨준 몇 편의 영화 중 < 군더더기 > (2016)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희한한 느낌을 준다. 1인 2역을 맡은 남녀 한 쌍이 등장하는 두 개의 시퀀스가 교차 편집되며 기이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는 그 누구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상 보이는 대로의 추측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흡연구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사/남자, 사진에 찍히는 모델/여자의 시퀀스이고, 두 번째는 카페 테라스에서 여자와 남자의 시선이 서로 교환하는 시퀀스이다.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면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퀀스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장면에서 여자와 남자의 태도는 각기 매우 다르다. 그리고 점점 영화는 더 이상해진다. 서로 붙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과 시퀀스들이 발에 붙은 굳은살처럼 그렇게 붙어 있다. 상호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과 사운드가 결합되기도 하고, 입 모양과 행동, 말소리가 불일치하기도 하며, 명동과 이태원, 한강, 야외에서의 음악 페스티벌 등지를 카메라가 줄곧 떠도는 데 전혀 즐겁지가 않다. 하나로 결합될 수 없는 이야기를 카메라는 겉돌기만 한다. 영화는 마치, 각기 다른 여러 계정의 ID와 닉네임을 사용하며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 ID들을 한데 뭉친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핸드폰 카메라나 DSLR로 무언가를 찍는 사람들이다. (찍힌 저 데이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남성의 이야기는 각각 붕 떠 있기만 하다. 앗! 이 둘이 한 영화 속에 함께 나란히 등장할 수나 있는 걸까?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이 나간 듯 춤추는 장면과 사진 찍는 장면이 교차하며, 거듭 들려오는 DSLR 셔터 소리에 이어 몇 개의 ID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GPS 신호가 오류를 일으킨 듯 미친 것처럼 딩동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폐허가 보인다. 논현동을 같이 걷던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현에 가면 하나 같이 여자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어.” 뒤에 붙은 길거리 장면의 한 성형외과 광고는 음산한 빛을 발하고,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카메라들의 시선과 셔터는 그 순간 곧 어디선가 평가로 기능한다. 붕 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상기된다. 물이 뒤덮여 흘러넘치는 거리, 거기서 아저씨들은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한강 다리 아래서 검은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이후 영화는 도시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마치 다른 계정을 새로 만든 듯, 작은 소나무들을 뿌리까지 보이게 재배해 전시하는 한 중년 남성의 공간과 주변 여름날의 초목 사이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영화의 마지막, 도입부와 비슷한 시퀀스가 또 다시 등장한다.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가 흘러나오는 소나무뿌리주 판매 코너 속에서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여성과 소나무뿌리주의 자태를 구경하는 아저씨들이 교차하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영화는 연이어 붙은 두 장면을 통해 한국사회의 말 붙히기 어려운 힘을 발생시키고 끝이 난다. 도입부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입부에서는 흡연구역과 사진사, 모델이 균등한 크기로 한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세계에 같이 존재하는 반면, 결말부의 노래 부르는 여성과 아저씨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컷을 통해 잘려져 있다. 세계를 본다는 것과 찍는다는 일, 장면과 장면을 붙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영화를 통해서만 지각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상한 지각은 더 가능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 군더더기 >를 경유해보자.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얼기설기 파편화된 몸을 한 채로도 세계에 대한 구체적 지각과 각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칼럼]춘천에서 만나는 작은 영화관 ‘일시정지시네마’
춘천에서 다양한 단편영화와 독립, 예술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일시정지시네마를 만들고 운영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지역에서 독립예술영화를 볼 수 없다는 분노,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무모한 실천,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한발 두발 내딛는 인내. 참 많기도 많은 감정들을 섞으며 흘려보낸 1년이다. 크고 작은 관심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러 영화인들과의 협업, 느릿하게나마 변화를 꾀하며 성장해가는 공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얼 하는 공간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름의 작은 성과들을 이루어내고 있다. 지역사회와 영화계에 작은 일렁임을 만들어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 문화를 정착시키고 유지해 갈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이러한 고민들이 뒤엉켜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일시정지시네마의 방향성과 고민들.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 포기로부터의 시작 본래 일시정지시네마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건립을 목표로 했다. 지금도 그 목표는 변함이 없지만 당시 씨네코드 선재,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의 폐관과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잠정 휴관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그리 좋은 답변을 내놓지 못했고, 마침 알게 된 곳이 이태원에 위치한 6석 영화관 극장판이다. 극장판은 영화제가 아니면 별도 채널이 없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없는 단편영화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단편영화도 유독 좋아했던 주인장은 전용관 건립이라는 거대한 꿈을 잠시 뒤로 미루고 현실적으로 운영 가능한 극장판의 형태를 벤치마킹, 18석의 작은 영화관을 만들게 되었다. 이 차선책은 도리어 시장성이 거의 없는 단편영화를 보다 더 지속적으로 볼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요즘은 단편을 다루는 영화제 및 다른 단편영화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편영화의 안정적 유통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있다. 4월 한 달간은 극장판, 자체휴강시네마와 함께 공모, 선정된 다섯 작품을 함께 상영한다. 이것이 단편영화계의 멀티플렉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독립,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것. 작년 11월, 화제의 독립, 예술영화 10편을 선정하여 상영했던 ‘굿 이브닝 시네마’를 기획할 때 즈음, 한 통의 문의 전화가 왔다. “거기에 가면 < 우리들 > 볼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꼭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실제 영화 상영이 끝나고 전화했던 사람이라며 인사를 건네셨을 때, 이 공간을 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GV 현장 * 관광객들도 오가는 영상문화 공간 서울의 웬만한 구 하나보다도 인구가 적은 도시 춘천. 더 넓게는 강원도가 영화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 남짓이라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무모한 영화관 운영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나름대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로 춘천만큼 좋은 곳이 없다. 춘천은 연극, 마임, 공연 등 무대 공연예술의 잔뼈가 굵은 곳이며 춘천 가는 기차의 낭만을 업고 많은 관광객들이 유입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Romantic 춘천’이라는 슬로건에 어울리는 다양한 콘텐츠 중 영화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여행 프로그램 ‘퍼즈그라운드’를 개발, 영화가 여행객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만난 인연이 일시정지시네마를 운영하는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또한 지역에서는 독립예술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시각예술 장르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착안, 작년 11월에는 인터랙티브 전시 ‘흥력발전 : 즐거움, 예술을 움직이다’를 선보여 색다른 영상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지역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며 다양한 영상문화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정체성을 확장해 가고 있다. * 누구나 영화인이 될 수 있는 아지트 공간을 열고 나서 지역에 숨어 있던 재야의 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연출 전공 취준생부터 다양한 영화를 섭렵한 씨네필 직장인까지. 보다 더 심도 깊은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즐거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이겠지만, 지역에 대부분인 독립예술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기란 쉽지 않다. 독립예술영화는 멀티플렉스에서 보는 영화보다 어렵고 지루하거나 만듦새가 깔끔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도 아직 예술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이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좋아진 이유. 나는 이런 영화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는 잘 알리지도 못하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비정한 운명을 지녔지만, 만나기만 한다면 삶을 돌아보고 긴 여운을 선사하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고귀한 권위를 가지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좌석도 좀 불편하고, 가끔 불을 안 끄는 귀여운(?)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정겨운, 매일 지나다니는 시장골목 좌판 역할을 하는 곳이 일시정지시네마였으면 좋겠다. * 일시정지시네마는 꼭 자립해야 할까? 영화관에서 만나는 소중한 관객들은 나에게 이 공간을 지켜야 하는 명분으로 쌓인다. 하지만 명분만으로 이 공간을 지키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나 단단하고 높다. 나 자신에게 ‘우리가 자립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했다. 답도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시작할 때부터 지원 사업을 받았고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다. 자립을 하지 못한다는 것, 어딘가에 기대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괴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요즘은 그 질문을 바꿔버렸다. ‘꼭 자립으로 힘들게 운영되어야 할까?’ 진정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들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열성적인 지지가 있다면 당연히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시정지시네마의 색을 잃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아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러한 사례를 발판삼아 더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 ‘봄내’라는 뜻을 가진 춘천이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시기이다. 여러모로 새로운 봄을 맞이한 이때, 더 많은 분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영화계에 계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올해는 보다 다양한 영화를 소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든다. 따스한 바람과 꽃향기 느끼며 영화 한 편 보시면 어떨지. 새로운 것를 만나고 싶은 당신에게 일시정지시네마는 (휴무일을 제외하고) 언제나 열려있다.
[영화현장]푸드팀: 영화 속의 또 다른 팀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영화 속의 푸드팀에 대한 글 문의를 받고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이런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을 만큼 그간 영화 속의 음식을 많이 진행했었구나, 두 번째는 수많은 영화에서의 음식을 선보였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쓰면 좀 더 맛깔나고 재미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2017년도 개봉 예정작에 선보일 음식 촬영 진행을 하며 작업할 영화들이 추가되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고민하며 글을 써본다. 푸드팀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지만 아직도 푸드팀과 한 번도 작업을 해보지 않았거나 아예 인지를 못 하고 있는 영화인들도 많다. 영화에서 푸드팀이라는 타이틀로 처음 일을 하게 된 것은 시간을 거슬러 2005년으로 올라간다. 영화 쪽에 먼저 발을 들여 일하고 있던 남동생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입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침 남동생이 작업하던 이준익 감독님의 < 왕의 남자 >(2005)에 연회 씬이 아주 크게 나오는데, 미술과 소품의 영역으로 음식을 차리면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요리 전문가를 모시고 세팅을 하길 원하신다는 감독님의 요청이 있었다며 연락이 왔다. 그땐 우리에게도 영화 속 음식이란 것이 너무도 생소해서 연출 제작팀과 끝없는 회의를 했음에도 지금 돌이켜보면 실소를 금치 못할 실수들이 잦았다. 팔팔 끓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출을 원해서 닭백숙을 정말 뜨겁게 끓여 놓았는데 광대역의 배우들이 닭을 손으로 막 찢어 먹다가 입천장을 데어 다시 식혀 놓기도 하고, 모든 음식을 먹는 거라 이해하고 한 음식마다 정성을 다해 맛있게 간을 하여 세팅했지만 연출상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두 가지로 정해져 있어 수 시간 준비한 음식들을 맛도 보지 못하고 버리는 아픔이 있었다.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왕의 남자> 촬영현장의 음식 세팅 < 왕의 남자 > 이후로 < 식객 >(2007)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요리 만화 「식객」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벅차올랐었는데, 이런 큰 음식 영화가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다니! <식객>은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음식 영화이기도 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했던 셰프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라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갖고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말 공부를 많이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십 편의 영화에서 음식을 담아냈지만 <식객> 때만큼은 우리가 미술 소품에 포함되는 푸드팀이 아닌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에 있는 푸드팀이었다. 음식 영화의 푸드팀장이라는 타이틀은 부담감도 매우 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가. 그때 참 날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며, 그간의 영화 경력을 다시 찾아보니 정말 많은 영화에서 음식을 선보였다. < 왕의 남자 >(2005) < 식객 >(2007) < 미인도 >(2008) < 쌍화점 >(2008) < 폭풍전야 >(2009) < 식객-김치전쟁 >(2010) < 방자전 >(2010) < 미스터 아이돌 >(2011) < 후궁 >(2011) < 기술자들 >(2014) < 나는 왕이로소이다 >(2012) < 톱스타 >(2013) < 협녀, 칼의 기억 >(2013) < 군도: 민란의 시대 >(2014) < 상의원 >(2014)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4) < 허삼관 >(2014) < 궁합 >(2015) < 검사외전 >(2015) < 봉이 김선달 >(2016) < 미쓰 와이프 >(2015) < 뷰티 인사이드 >(2015) < 고산자, 대동여지도 >(2016) < 침묵 >(2016) < 보통사람 >(2017) < 군함도 >(2017) < 공작 > (2017) < 남한산성 > (2017)까지 약 17편의 크고 작은 영화에서 우리의 역할을 드러냈고, 또 드러낼 예정이다. <식객-김치전쟁> 음식 세팅 <뷰티 인사이드> 음식 세팅 영화마다 남아있는 기억도 다양하다. 영화를 통해 평소에 전혀 접하지 않는 식재료들을 다루는데, < 후궁 > 때는 자라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대승 감독님은 촬영 내내 음식에 대해 매우 세심하게 하나하나 신경을 쓰셨는데, 극 중 자라탕이 매우 혐오스럽게 보이길 원해 목이 나와 있는 상태로 탕을 끓이기도 했다. < 검사외전 > 촬영 때는 < 군도 > < 허삼관 > 때 함께 했던 연출, 제작, 미술, 소품팀을 다 같이 만나 매우 반갑게 촬영했다. 현재 촬영 중인 < 공작 >에서는 위의 세 개 영화를 함께 했던 팀들과 또다시 호흡을 맞춰서 정말 즐겁게 찍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고증에 입각한 음식을 선보이길 원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 쌍화점 >은 고려 시대가 배경이었으나 음식에 대한 고증은 기본만 따라가고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세팅해달라는 연출과 미술팀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시대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색감의 음식들을 준비해 23회차씩이나 현장에 나가 음식을 세팅했는데 정작 영화 속 음식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직 개봉 전인 영화 < 궁합 >은 < 식객 > 때 조감독님의 입봉작으로 확실히 음식 영화를 경험하셨던 분이라 영화 속 음식 연출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고증을 철저히 따랐다) 앵글에도 음식이 많이 보였다. 음식을 세팅하는 우리로선 화면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가장 뿌듯하기에 신바람 나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후궁>의 자라탕 <쌍화점>의 화려한 음식 영화 < 식객 >의 인연으로 배우 임원희 와는 지금까지도 매우 친하게 지낸다. 역할은 악역 봉주였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좋고 너무도 친절했다. 그는 왼손잡이여서 칼 사용을 왼손으로 시작했었는데 2007년 촬영 당시 왼손잡이 요리사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칼질을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대다수의 의견으로 피나는 연습을 통해 오른손 칼질을 앵글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때 그 연습 이후로 아직도 칼질 하나 만큼은 오른손으로 한다고 한다. 그가 예능 방송에 출연할 때 야간 매점 음식을 뭘 할지 고민하며 연락왔을 때도 내가 자주 해 먹는 야식 하나를 알려주었는데 예상치도 않게 1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락하며 안부 물으며 지내는 친한 지기이다. <식객>의 배우 임원희 때로는 손 대역도 자처한다. 그간 다양한 영화에서 내 손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많이 비치기도 했다. < 식객-김치전쟁 >을 촬영할 때는 배우들의 조리 동선, 완성된 음식의 형태, 조리과정에 있어 NG 후 필요한 재료들에 대한 조치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요리사 8’의 보조역할로 극 중에 투입되어 촬영하기도 했고, < 허삼관 >을 촬영할 때는 허삼관이 자주 가는 만두집의 만두를 직접 빚는 조리 장면, 피순대와 생고기를 투박하게 써는 장면, 붕어찜의 식재료를 전문적으로 써는 장면 등을 능수능란하게 선보이기도 했다. 내 손이 가녀리진 않지만 날씬하다고 알고 있었으나 화면에 비친 내 손은 아주 통통한 손이었다! <허삼관>을 촬영할 때는 내 평생 그렇게 피순대를 많이 썰어보기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음식을 하는 사람이라지만 피순대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 많이 먹어볼 일도 접할 일도 없는데, 촬영을 위해 엄청난 양이 필요했고 또 의외로 정말 맛있어서 촬영을 마치고 촬영 스텝들과 다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식객-김치전쟁> 촬영현장 <허삼관>의 피순대 푸드팀의 역할이 무얼까. 이름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우리는 영화 속 음식을 세팅하는 사람들이다. 시대극을 찍을 때는 시대적 배경에 맞아야 하며,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감동이 느껴지거나 정치성이 보이거나 등등 음식만 보고서도 그 느낌이 전달될 수 있게 구성하고 세팅해야 한다. 푸드팀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제작, 연출, 미술, 소품팀과의 호흡도 중요하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 전체적인 배경색과 톤앤매너 협의, 소품팀과의 소품 정리, 감독님과 함께 논의하는 연출팀과의 다자간 미팅이 진행된다. 대화를 통해 음식 시안을 공유하며 메뉴 구성을 마치면 영화 촬영장에서는 푸드팀의 요리 마술이 시작된다. 현장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는 조리 공간이 충분치 않아 이미 만들어 온 음식에서 살짝 손보는 정도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날이 더 많다. 또한 다른 팀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준비를 마쳐야 한다. 배우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면 NG 장면을 대비해 미리 음식을 준비하거나, 김이 나야 하는 장면은 슛 들어갈 때 그 김이 바로 보일 수 있게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하는 등 촬영하는 동안 푸드팀 일원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인다. 영화 속 음식이라 대부분 먹지 못하는 음식을 만든다고 해서 요리를 못 해도 푸드팀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음식을 누구보다도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게 푸드팀이다. 역사적 배경과 시대에 따라, 또 상황과 극 역할에 따라 수많은 음식의 종류와 가짓수가 바뀌고 이 부분을 이해, 설명, 그리고 조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푸드팀의 또 다른 역할. 영화 촬영장에 푸드팀이 함께하면 현장 분위기가 매우 훈훈해진다. 예전엔 음식 소품이라 해서 영화 속 음식을 먹지 않고 기피하였으나 정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눈에 보이면 스텝들 눈에도 소품이 아닌 일용할 양식으로 돌변하는 순간이 온다. 현장이 정말 바쁜 날이 아니면 우리가 별도의 조리를 하여 스텝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곤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고된 촬영에 지친 스텝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된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풍길 때면 언제나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스텝들, 음식 옆을 지나가며 차마 먹을 수 없는 상황의 스텝들의 그렁그렁한 소 같은 눈. 감독님, 피디님부터 배우들, 각 팀의 막내까지 모두가 평등해지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일을 두 배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눠먹으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은 그 이상이 된다. 벌써 약 10년이 넘게 영화 쪽 음식을 진행하다 보니, 현장에 아는 사람들도 많고 함께 같이 여러 작품을 한 사람들도 많다. 10년 넘게 시간이 흐르니 영화 입문 초창기부터 봐 왔던 사람들이 어느덧 영화팀의 고참이 되어 현장에서 만나면 함께 예전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남동생의 영화 쪽 지인들을 내가 하는 영화에서 만나 같이 작업하며 친분도 쌓게 되고, 또 최근에 알게 되는 신참 팀원들의 열정적인 패기를 보며 때로는 그들의 열정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곧 크랭크인 하는 큰 규모의 영화 속 음식 예시 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 동기부여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이 뿌듯하다. 약 10년차가 넘게 이쪽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우리 음식이 정말 맛있고 따뜻하게 보이는 마음, 훈훈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영화 < 식객 > 이후로 음식영화가 제작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간 음식에 관련한 다양한 일들을 진행하며 얻은 좋은 아이디어들을 토대로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 이번에 작업하게 되는 영화에서도 음식이 중요하게 보일 예정인데,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푸드팀으로써 더 맛있게 그리고 멋있게 음식을 세팅 해보려한다. 마지막으로 맹렬한 더위와 추위에도,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지금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모든 영화인들, 화이팅입니다!